020화
그건 레오나드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채이 나름의 행동이었다.
레오나드가 무엇 때문에 화났는지 아는 사람이 본다면 어처구니없을 상황이었지만…. 다행인지 뭔지, 두꺼운 콩깍지로 인해 별거 아닌 행동도 애교로 보이는 레오나드의 기분은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이거 사러 나갔던 거였어?”
“어? 응.”
‘나간 김에 샀다’는 말을 하면 또 삐질 거 같아, 채이는 대충 하얀 거짓말로 양념을 쳤다. 그거에 또 홀라당 넘어간 레오나드는 바닥까지 추락했다가 다시 하늘을 나는 기분에 복잡미묘한 심경을 느꼈다. 도무지 채이에겐 저항할 수 없었다.
긴 속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린 레오나드가 브로치를 조심히 건네받았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올려진 브로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채이 쪽으로 무너지듯 내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녀석. 엄청 감동했나 보네. 내가 제대로 골랐구먼.’
사실 그건 체념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나 멋지게 착각한 채이는 자신의 뛰어난 안목을 칭찬하며 뿌듯해진 마음으로 레오나드의 등을 도닥여 주기에 이르렀다.
“앞으론 말없이 사라지지 마….”
“그래그래.”
“나 걱정 많이 했어.”
“아, 그랬던 거니. 미안하다.”
그렇게 채이가 한동안 끌어안긴 채 레오나드의 투정을 받아주고 있을 때였다. 어깨에 턱을 대고 있던 레오나드가 꼼지락대더니 고개를 목선 쪽으로 돌렸다. 그의 따듯한 숨결이 살갗을 덥힌다. 왠지 간지러워진 채이는 레오나드를 이만 떼어 내려고 했는데 그 전에 말캉한 감촉이 목선에 닿았다.
말캉한 게… 말캉?
‘응?’
얼굴에 달린 것 중 ‘말캉’한 느낌이 들 만한 부위로는 어떤 게 있었더라. 인간의 코와 턱 사이에 도도록이 자리 잡은 얇고 부드러운 사전적 정의의 무언가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건 일단 배제하자. 그건 아닐 거다. 그걸 왜? 어?
놀란 머릿속이 마구 꼬여서 헛소리를 나열하고 있을 즈음 레오나드가 먼저 몸을 뒤로 물렸다. 채이를 내려다보는 눈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그 아래에 야무지게 다물린 도톰하고 바른 모양의 입술이 오물거렸다. 목소리가 거기서 나왔다는 점과 저도 모르게 그곳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점을 동시에 깨달은 채이가 퍼뜩 놀라 눈을 동실하게 떴다.
“아! 어. 그래.”
하지만 먼저 돌아선 레오나드의 태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사롭기만 했다. 갑자기 모든 게 헷갈리며 긴가민가해진 채이는 혼란해졌다.
‘뭐지… 단순히 착각이었나?’
***
응.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보다.
레오나드와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을 보낸 채이는 잠자리에 누웠을 때 그리 결론 내렸다.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난 건 딱히 비밀이 아니다.
‘그래. 설마 레오가 내 목에다 그런 야시시한 뽀뽀를 할 리가 없잖아.’
실수로 닿았거나 아니면 역시 착각이다. 마음이 편안해진 채이는 너른 침대를 홀로 차지한 채 잠들었다. 오늘은 레오나드가 같이 자겠다며 투정 부리지 않고, 얌전히 잘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이는 기분 좋게 복도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행여나 놓칠세라 옆에 따라붙는 로렌스가 있다. 그런데 그는 평소보다 눈 밑이 칙칙하여 어딘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로렌스.”
“좋은 아침입니다… 다행히 돌아와 주셨더군요. 정말 다행히… 덕분에 여러 목숨이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오늘은 또 어디 가시는 겁니까?”
채이는 영혼 나간 사람처럼 주절거리는 로렌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냥 산책 다녀왔을 뿐인데 목숨을 살렸다느니 어쨌다느니. 이 사람의 호들갑은 오늘도 여전했다.
“아침 조깅하러. 몰랐는데 이 저택 부지 안에는 산책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작은 숲길이 있다더라고요.”
그건 어제저녁 레오나드에게 들었던 새로운 정보다. 그리고 그 작은 숲길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 방치되다시피 한 곳이니 마음껏 써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참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저택 바깥까지 나가야 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숲의 산뜻한 공기를 즐기며 산책할 수 있다면 그편이 훨씬 더 좋았으니까.
“아. 그렇군요.”
어딘가 긴장한 듯 바짝 굳어 있던 로렌스의 표정이 삽시에 부드러이 풀렸다. 이내 그는 안심한 사람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으로 채이의 결정을 지지했다.
바깥보다 위험하지도 않고 매일 아침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덜 번거롭다는, 관심 없는 장점들을 늘어놓았다. 귀찮았지만 로렌스는 산책로 입구까지 꿋꿋하게 바래다주기까지 했다. 거기다 채이가 딴 길로 새진 않는지 지켜보기도 했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걱정이 많은지….
걱정해주는 건 물론 고맙지만 인생을 참 고달프게 사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이후 채이는 2시간가량의 산책과 조깅을 끝마치고 오닉스로 돌아갔다.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복도를 걷다가 약 2시간 전에도 봤던 로렌스와 마주쳤는데….
‘누구지?’
그의 앞에 처음 보는 앳된 청년이 서 있었다. 독특한 녹색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졌고, 채이보다도 좀 더 작은 청년이었다. 호기심이 생겨 바라보는데 완전히 상관없는 사람도 아니었는지 청년은 채이를 발견하자마자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채이 님. 오늘부터 채이 님을 곁에서 보필하게 된 에녹 올리븐이라 합니다.”
응? 알고 보니 상관없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이제부터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제 형질은 우성 오메가고 랭커스터의 가신이자 올리븐 가문의 가주이신 오필리드 백작님의 둘째 아들이에요.”
“그렇군요.”
“예! 아, 말은 편하게 놓으세요.”
상당히 밝고 싹싹한 청년이다. 기본적으로 착해 보였다. 하지만 오메가에 백작의 아들이면 높은 지위의 자제분인 건데, 베타 평민이 아무렇지 않게 하대해도 되는 건가. 갑작스러운 상황이기도 해서 채이가 로렌스를 흘깃 쳐다보니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레오나드 공자님이 편의를 봐주셔서… 오늘부터 올리븐 공이 채이 님의 전속 시종으로 일하게 되셨습니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거나, 불편한 게 있을 때 올리븐 공께 말씀하시면 맞춰줄 겁니다.”
혹여나 일상생활에서 불편한 게 있을까 봐 붙여준 시종인 모양이었다. 흠…. 이런 것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너무 과한 배려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지도 않고….
돌려보낼까?
채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줍은 표정으로 냉큼 바꾼 에녹이 채이의 생각을 잘라냈다.
“채이 님을 정말 만나 뵙고 싶었는데… 전 정말 운이 좋은 거 같아요!”
“예? 저랑 만나고 싶었다고요?”
“네. 레오나드 공자님이 그리 숨기고 아끼시는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해서 기대 많이 하고 왔거든요.”
그렇다고 하니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돌려보내면, 오히려 이 젊은 청년을 시무룩하게 만드는 꼴이 될 것 같았다. 결국 반짝거리는 눈에 못 이긴 채이는 한숨처럼 웃어야 했다.
“잘 부탁해요. 에녹.”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채이 님, 부디 절 편하게 대해 주세요. 그래야 저도 마음이 좀 놓일 것 같거든요.”
“음. 그럼… 알겠어.”
“감사합니다. 채이 님.”
에녹이 임무를 완수한 사람처럼 개운하게 미소 지었다. 순간 채이는 이 청년에게 휘말리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기분 탓일 거다. 채이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 뒤에서 에녹과 로렌스가 은근한 시선을 한차례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채이는 알지 못했다.
“참, 그리고 채이 님. 이건 레오나드 공자님께서 전달 부탁하신 물건이에요.”
에녹이 품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직사각 형태의 통을 채이에게 내밀었다. 열어 보니 그 안에는 새로 발급된 채이의 신분패가 들어 있었다.
‘오… 엄청 빠르네.’
새로 발급해준다고 해서 한 일주일쯤 걸리려나 했는데, 벌써 완성됐나 보다. 채이는 신분패를 요리조리 살펴봤다. 위조 신분패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마 위조 신분패에 썼던 정보를 토대로 했기 때문이리라.
차라리 좋았다.
은행 문제도 있고 걱정했는데 이거라면 번거로운 절차 없이도 쓸 수 있을 테니까.
‘채이’라는 두 글자 이름이 박힌 정식 신분패를 만족스럽게 보고 있는데, 문득 등 뒤에서 발소리가 느껴졌다. 돌아보니 레오나드가 마침 복도로 올라와 이쪽을 향하여 다가오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일을 끝마치고 오는 길인 듯했다.
“채이.”
그는 로렌스와 에녹을 관심 없는 눈으로 힐끔 돌아보았다가 다시 채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채이도 레오나드를 반겨주기 위해 몸을 돌리고 서는데, 돌연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상황을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기울어져 온 레오나드가 채이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채이의 사고회로도 잠시 일하기를 멈추었다. 놀라서 입을 헤벌렸던 채이가 전보다는 빠른 속도로 이성을 되찾았다.
‘헛. 레오가 애교를?’
어릴 땐 단 한 번도 애교스럽게 뽀뽀해준 적이 없던 녀석인데…. 참으로 갑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썩 나쁘진 않은 일이었다.
“웬일이야. 네가 어릴 때도 안 하던 애교를 다 부리고. 뭐 나한테 원하는 거라도 생겼어?”
하지만 레오나드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헛웃음과 함께 아래로 떨어진 얼굴은 어처구니없어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승부욕까지 생기네….”
“응?”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레오나드가 다시 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냥. 이제는 애교 자주 부리려고.”
그의 입매는 꼭 악동처럼 삐딱한 호선을 옅게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