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이후 레오나드는….
이전에 자기가 한 발언을 실천하기 위함인 듯 애교가 급격히 늘었다. 자주 채이를 끌어안기도 하고 기습적인 볼 뽀뽀에도 적극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행동이 영 익숙하지 않아서 흠칫흠칫 놀라던 채이였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져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됐다. 바로 지금처럼.
“레오, 나 바쁘다. 건드리지 마.”
얼마 전 로렌스에게 배운 자세를 떠올리며 목검을 잡고 집중하던 채이가 엄하게 꾸짖었다. 슬쩍 등 뒤로 다가온 레오나드가 또 끌어안더니 목선에 입술을 비빈 탓이었다. 물론 싫은 건 아니다. 아니지만, 집중하고 있을 때도 그러니까 간지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다.
“좀 이따가 상대해줄게.”
결국 채이에게 혼나버린 레오나드가 슬쩍 물러섰다. 시무룩해진 얼굴이었다.
‘내가 좀 너무했나?’
채이는 자기가 혼내 놓고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탓에 잠시 레오나드의 기척을 신경 쓰고 있을 때였다. 채이의 목깃 아래로 보이는 뽀얀 속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별안간 고개를 수그렸다.
채이가 뭔가 싶어 힐끔 돌아볼 즈음….
‘응?’
그는 채이의 여린 귓불을 슬며시 깨물고,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
생소한 느낌. 그에 순간, 눈이 번뜩 뜨인 채이가 한 박자 늦게 놀라며 몸을 틀었다.
“무…!”
제 귀를 움켜잡은 채이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익어서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뭐…!”
목소리도 어긋나며 삑사리를 내고 말았다. 채이의 머릿속엔 지금 물음표만 백만 개쯤 떠올라 있어,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로 굳어 잠시 침묵. 평소 같지 않게 뚝딱거리는 채이가 귀여워 뚫어져라 쳐다보던 레오나드가 뒤늦게 변명을 떠올렸다.
“…방금 그거, 벨라 왕국에서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인사법이래.”
정말 듣는 이가 부끄러워질 만큼 조잡한 변명이었다.
그런데 웬걸.
채이는 그걸 또 믿었다.
“아…! 뭐야. 그런 거였어?”
“…….”
“나 참, 그럼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깜짝 놀랐잖아.”
채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안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반대로 채이를 바라보고 있던 레오나드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체념한 것 같기도 한… 상당히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무언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서 채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지만, 레오나드는 힘없이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다행히 채이에겐 이 상황에서 이유를 생각해 볼 정도의 눈치가 있었다. 턱을 짚고 곰곰이 상념에 잠겼던 채이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칭찬 안 해줘서 삐졌나 보다.’
기껏 새로운 지식을 배워서 보여준 건데 투덜거리기만 하고 칭찬은 해주지 않으니 얼마나 서운했겠는가. 나 참. 내 눈치가 빠른 편이라 다행이지.
자신의 상황 판단력에 비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채이는 당당하게 웃으며 레오나드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그나저나 그런 것도 다 알고 대단하네, 우리 레오. 다음에 또 공부한 거 있으면 알려줘.”
문제는 채이의 눈치가 위기와 위협을 판단하는 쪽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연애와 사랑에 관련된 눈치는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채이.”
“…응?”
뾰족하게 눈을 뜬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채이가 ‘이게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쪽의 눈치는 분명 나쁘지 않았다. 레오나드가 낙심한 듯 채이를 나무라며 말했다.
“채이는 ‘의심’이 뭔진 알아?”
“알지.”
“그런데 내 말을 그냥 믿어?”
“음? 너 나한테 뭐 거짓말했어?”
“…그건….”
“그런 것도 아니면 내가 널 어째서 의심해야 해?”
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꼭 의심하라는 것처럼 들리잖아. 신뢰하면 안 되는 건가. 우리가 생판 모르는 남도 아니고….
레오나드의 의도가 ‘자신이 보이는 행동의 이유를 의심하고 다르게 의식해달라’는 뜻이라는 걸 모르는 채이로서는, 다소 섭섭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성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식조차 하지 않는 채이에게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는 발언을 대뜸 할 순 없지 않나. 궁지에 몰린 것도 아니고서야 구태여 그런 위험한 짓을 하는 건….
레오나드도 두렵고 갑갑했다.
두 사람 사이에 결론이 나는 법은 없다.
끝내 레오나드는 천천히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땅이 꺼질 만큼 깊은 한숨이었다. 그런 레오나드를 보며 채이는 눈만 데굴 굴렸다. 먼저 입을 연 건, 이 상황이 만들어지도록 시발점을 제공한 레오나드 쪽이었다.
“미안….”
“응? 아냐. 네가 왜 미안해.”
시무룩해진 게 눈에 보여서 채이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레오나드가 품에 안겨 오기에 등을 토닥여 주었더니 그는 잠시 그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채이. 나는 저녁에 다시 올게.”
“아…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결국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채이가 레오나드를 보내고 난 뒤, 시간이 훌쩍 흘렀다. 약속대로 레오나드는 저녁이 되어 채이를 찾아왔다. 그는 채이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평소처럼 평온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다행이네.’
조금 싱숭생숭했는데. 채이도 그제야 한시름 덜고 웃을 수 있었다.
“그거 뭐야?”
그렇게 레오나드와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가는 중이었다. 레오나드의 손에 들린 가죽 자루를 본 채이가 물었다. 크기가 아주 크진 않고 길쭉하며 반듯한 형태… 유리병이 들어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맛있는 거. 채이랑 마시려고 가져온 거야. 나중에 식사 끝나고 방 가서 보여줄게.”
레오나드는 어딘가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살포시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썩 기대가 된다. 채이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레오나드와 도란도란한 식사를 끝마쳤다. 그러고 두 사람은 곧장 채이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함께 올랐다. 가죽 자루에 든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게 뭔지 보여줘.”
방으로 먼저 들어간 채이가 침대 뒤쪽의 테이블 의자에 앉으면서 재촉했다. 그 맞은편으로 향한 레오나드는 테이블 위에 가죽 자루를 올려놓고 끈을 풀었다. 가죽 자루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술병’이었다. 독특한 모양의 유리병에 고급스러운 라벨이 붙어 있는.
“드워프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벨몬주. 이거, 구하기 엄청 힘든 물건이야.”
“술?”
“응. 오늘 잠시 놀러 온 드워프가 주고 갔어. 혹시 벨몬주가 뭔지 알아?”
채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드워프는 술을 엄청나게 좋아하고 잘 마시기도 하는 술고래다.’라는 이야기는 언젠가 책에서 보아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이 벨몬주라는 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채이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레오나드가 코르크 뚜껑을 따면서 말을 이었다.
“벨몬이란 열매를 이용해서 만든 과일주인데… 벨몬은 향과 맛이 달콤하고 기분을 좋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 근데 한 그루당 1년에 하나밖에 안 열리는 희귀한 열매라서 그만큼 희소성이 어마어마해.”
“오… 신기하다.”
“원래 벨몬나무는 엘프들이 독점 중이라서 중요한 거래가 있을 때만 가끔 받을 수 있는 술인데, 오늘 웬일로 받게 됐네.”
“그런 희귀한 걸 내가 같이 마셔도 되는 거야?”
마침 열린 뚜껑에서 달콤하고 감미로운… 생전 처음 맡아보는 신비한 향이 흘러나왔다. 향 자체가 굉장히 강렬해서 자극적인데도 코가 따갑거나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당연하지. 채이도 술 마시는 거 좋아하니까, 처음부터 같이 마시려고 가져온 거야.”
함께 동봉되어 있던 잔을 건네준 레오나드가 거기서 반 정도만 차게끔 술을 따라 주었다. 잔의 크기가 귀여울 정도로 작았기 때문에 얼마 따르지 않아도 금방 넘실거리며 차올랐다.
“고마워. 그럼 잘 마실게.”
“응.”
채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향부터 음미했다. 식사할 때 마시는 벌꿀주 말고는 술을 마시는 게 오랜만이기도 하여 기대되었다.
‘마셔 볼까.’
슬쩍 한 모금 들이켰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뜨거운 느낌이 독주임을 확연히 깨닫게 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달콤함이 계속 입 안에서 감돌아 마시기 어렵지 않고 목 넘김도 좋았다. 지금까지 먹던 술과는 다른 느낌이다. 채이는 신기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은 맛이었다.
“되게 맛있다. 이거 숙취 심해?”
“아니. 숙취는 거의 없다시피 할 거야. 벨몬 열매에 있는 성분 중 하나가 숙취를 일으키는 물질을 다른 걸로 바꾸면서 억제해준다고 들었거든.”
“그래? 완전 좋네.”
한 잔 비우고 또 한 잔. 안 그래도 작은 잔이라 감질나서, 더 술술 넘어갔다.
이걸로 얼마나 마신 거지?
평소보단 훨씬 적게 마신 거 같은데 모르겠다. 채이는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벨몬 열매에 기분을 좋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더니 정말인가.
“잠깐 채이….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그러다 취하겠어.”
“아.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채이는 레오나드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자기 잔에도 가득 차게끔 쪼르르 따르고 쭉 들이켰다. 이거 참, 물건이다. 어디 가서도 맛볼 수 없는 진미였다.
“채이. 안 되겠어, 그만 마시자.”
“아, 아니야.”
이제 시작인데 뭘 그만 마시라는 거야. 그리고 난 아직 하나도 안 취했다. 채이가 말리려는 레오나드의 손을 설레설레 뿌리치고는 다시 기분 좋게 술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