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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23화 (23/105)

023화

짹짹….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이 정신을 깨웠다. 언제나처럼 잠에서 깬 채이는 잠기운이 덜 가신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군.’

일주일 전.

차마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그런 배덕한 꿈을 꾸고 난 뒤, 채이는 혹시 또 야한 꿈을 꾸지 않을까 긴장하며 잠들곤 했었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날 이후 그때와 같은 못된 꿈을 꾼 적은 없었다.

‘술 때문에 그랬던 걸지도 몰라.’

차이점이 있다면 그뿐이다. 정말 달콤하고 맛있는 술이었지만 이런 일이 생기니까 다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채이 님. 들어갑니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와 함께 에녹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몇 명의 하인들과 에녹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익숙한 듯 아침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에녹이 채이 곁으로 다가가 활짝 웃으며 깨끗한 물이 담긴 잔을 건넸다. 채이의 사용인으로 들어온 뒤 에녹은 항상 이렇게 아침마다 하인들을 불러 방 청소를 시키고 시중을 들었다.

아… 딱 한 번.

레오나드와 술을 마시고 그다음 날 아침에는 어째선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고마워.”

채이는 에녹이 가져와 준 시원한 물 한 잔을 꼴딱 해치웠다. 그 덕에 아까보다 정신이 조금 더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햐. 오늘 날씨 되게 좋네.”

이런 날은 나들이가 최곤데….

“그럼 같이 놀러 나가실래요?”

돌연 에녹이 반가운 소리를 꺼냈다.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적절한 제안이었기에 채이는 깜짝 놀랐다. 본인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난다는 점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까?”

“네! 저택 바깥 외출은 어떠신가요? 레오나드 공자님도 제가 채이 님을 따라간다고 하면, 큰 걱정은 안 하실 거라서. 편하게 갈 곳을 정해 주시면 되세요.”

그래. 저번에 말없이 놀러 나갔다고 엄청 삐져서는 걱정했다고 툴툴거렸지…. 문득 생각난 일전의 기억을 더듬던 채이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이 그렇다고 하니까 마음 놓고 놀러 갈 수 있었다.

“블렌츠 광장은 어때?”

“좋아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라면 마침 광장에서 축제도 열리겠네요.”

채이는 흡족하게 탄성을 뱉는 것으로 반응했다. 축제라니… 사람 붐비는 곳을 구태여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우연히 일정이 겹쳤다면 그것도 함께 즐겨 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그럼 준비하고 계세요. 저도 잠시 준비할 겸 다녀올 곳이 있어서. 10분 정도 뒤에 올게요.”

“그래.”

그렇게 에녹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청소가 끝난 하인들이 하나둘 물러났다. 그제야 채이도 슬쩍 일어나 스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물론 프로페셔널한 저택의 사용인들은 채이가 대뜸 방에서 스트립쇼를 한다 한들 개의치 않을 터였으나… 한국에서 한국의 예절을 배운 채이에게는 남들 앞에서 맨몸을 보이면 부끄럽다는 상식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 옷을 입혀 주는 시중만큼은 지금까지도 한사코 거부하는 중이었다. 혼자 입기 힘든 옷도 그다지 없으니까.

“채이 님! 준비 다 끝나셨나요?”

“아, 응. 잠시만. 지금 나갈게.”

마침 방문 밖에서 들려온 에녹의 부름에 채이는 얼른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돌아섰다. 오랜만의 외출에 채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

창밖으로 봤던 것만큼 하늘은 청량하고 햇볕은 따사롭다. 시기상으로도 이젠 여름에 가까워진 시점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날은 점점 더 따뜻해질 터였다.

‘축제 때문인지 사람 엄청 많네.’

채이는 앞장서는 에녹과 함께 블렌츠 광장 중심을 향해 닦여 있는 큰길을 따라 내려갔다. 광장의 저잣거리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외영지민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그리고….

기척을 최대한 죽인 로렌스가 두 사람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고 있었다. 하지만 채이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나오기 전, 레오나드에게 언질을 받은 에녹만이 그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채이가 도망갈까 봐… 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에녹이 가지고 있는 이레귤러 이능향만으로도 채이를 놓칠 일은 없었기에 로렌스는 단순히 혹시 모를 위험에서 채이를 보호하기 위한 호위였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선 항상 범죄와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채이 님! 저기 보세요.”

마침 무언가를 발견한 에녹이 정면 방향을 가리켰다. 그와 거의 동시에 사람들의 엄청난 경탄성이 들려왔다. 분수대가 있는 광장 중심 쪽에서다. 잔뜩 모인 사람들이 예쁜 꽃잎을 하늘로 뿌려대고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걸 구경하며 즐기고 있었다. 바람을 탄 꽃잎이 너붓너붓 흩날리니, 마치 봄날에 눈이 내리는 것처럼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지켜보게 되는 장면이었다.

“늘 이 시기에 열리는 축제예요. 봄이 끝나는 걸 아쉬워하고 축하하면서 봄에만 피는 꽃들을 뿌린답니다. 예쁘지 않나요?”

“응. 볼거리네.”

채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꽃잎이 흩날리는 동안 벤치에 앉은 음유시인이 실력을 뽐냈고, 그 매력적인 음율과 경치를 함께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감성에 젖어 들기에 아주 좋은 하루였다.

“그쵸? 컴베스트에서만 하는 축제라서, 이거 보려고 외영지민들도 이 시기에 많이 놀러 와요.”

“다른 계절에는 안 해?”

“네. 봄에만 하는 축제인데 새해를 무사히 보냈음을 축하하는 의미이기도 해서 그런….”

그때 뒤쪽에서 상황과 맞지 않는 소란이 일어났다. 호통치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고 주변 사람들은 겁을 먹고 야단법석이었다. 싸움이 일어난 것 같았다.

‘뭐야.’

아름다운 장면을 보며 모처럼 감상에 젖어 있는데 느닷없는 싸움으로 감상을 깨트리다니…. 언짢아진 채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에녹도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 걸까요?”

“글쎄.”

가득한 인파가 그 주변을 둘러싸고 구경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뭔 일인지 보러 가볼까?”

채이가 에녹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에 에녹도 긍정의 의미로 채이와 한차례 시선을 교환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강 건너 불구경에 재미를 느끼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내 말을 이해 못 하겠어?”

소란의 중심에 다가가자 마침 상황을 지켜보는 둥근 인파 너머에서 까랑까랑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거리는 레드와인색의 머리카락. 이제 스무 살 초반 정도 된 듯 보이는 호리호리한 사내가 곧게 서 있다. 그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중년 남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에녹이 바로 앞에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딱한 얼굴로 힐끔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게 주인장이 물건 정리하다가 실수로 저 남자의 어깨를 쳤는데… 갑자기 다툼이 일어났어. 음. 주인장은 납작 엎드려 있기만 하고, 저 남자는 일어나라 난리 칠 뿐이니 싸움이라 하기에도 좀 그런가.”

언뜻 들으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저 남자 쪽은 차림새로 보아 어딘가의 귀족쯤 되는 것 같은데.

“대체 어디의 막된놈이 남의 영지에서 저런 망나니짓을 하는 거야?”

그때 에녹이 귀족치고 상당히 거친 언행을 뱉으며 눈을 치떴다. 늘상 잘 웃고 사근사근하던 아이의 이면을 보고 만 채이의 눈이 둥실해졌다.

“아? 방금 막된놈이 어쩌고 누구야.”

그때 사내가 홱 고개를 돌리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호박색 눈동자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했던 것도 아닌데, 그걸 또 어찌 들었던 모양이었다. 귀가 좋은 건지, 그냥 자기 욕하는 거에 예민해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사내가 홱 돌아볼 때까지도 옴츠러드는 느낌이 없던 에녹이 돌연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입을 틀어막곤 비명 같은 헛숨을 들이켰다. 얼굴도 창백해져서는 금방 쓰러질 것처럼 새하얘졌다. 왜 하필 저 사람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걸로 보아서는 아는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에녹? 괜찮….”

“거기. 안 튀어나와?”

말꼬리가 잘린 채이는 불만스레 입술을 감쳐문 채 사내를 흘겨보았다.

아예 타깃을 돌리고자 하는 것일까.

이제 그는 인파 쪽으로 몸을 돌리고 서서, 두 사람을 확실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 찰나에 자기를 향한 욕을 듣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도 함께 가늠한 듯했다. 거기다 여기서 에녹만 잘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에 자기를 욕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해도 범인이 에녹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

“…….”

어떤 사람은 불안한 시선으로, 또 어떤 사람은 불편한 시선으로 채이와 에녹을 힐끔거렸다.

‘흠. 어떡할까.’

채이의 고민이 이어지는 사이 고개를 까닥인 망나니가 성격 급하게 채이와 에녹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이쪽이 마중 나가주지.”

일종의 압박이었다.

에녹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렇게 돼버린 거 자신의 선에서 전부 정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먼저 행동하기 전에 앞으로 나가려는 에녹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서 진정시킨 채이가 대신 나섰다. 자기보다 분명 어릴 청년을 두고 저렇게 소리치는 꼴이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사람 겁박하는 건 그쯤 해.”

“헉, 안 돼! 채이 님! 안 돼요!”

채이의 돌발 행동에 망나니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보다 더 뒤집어지도록 기겁한 에녹이 뒤에서 애달프게 외쳤다. 물론 채이는 들은 체하지 않았고… 사달은 일어나고 말았다.

“저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망나니가 창백하게 질려 있는 에녹을 보고 오묘하게 눈썹을 휘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금세 채이에게로 쏠렸다.

“됐고. 넌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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