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페르난데가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못마땅하게 찡그린 얼굴로 생각에 잠긴 듯, 바닥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 틈에 채이는 아직도 페르난데의 뒤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주인장을 돌아보았다. 마침 힐끔거리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채이가 가게 쪽을 눈짓했더니, 용케 알아들은 주인장이 후다닥 몸을 숨겼다.
채이도 이만 에녹을 돌아보았다.
“가자, 에녹.”
넋 놓고 있다가 퍼드득 놀란 에녹이 먼저 자리에서 벗어나는 채이를 잽싸게 뒤따랐다. 그대로 왕재수와는 헤어질 줄 알았는데…. 다른 곳을 더 구경하기 위해 인파에서 빠져나와 분수대까지 되돌아갔을 무렵 채이가 눈썹을 휘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따라와?”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사내가 계속 채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에녹의 뒤다.
채이 바로 등 뒤에 붙어 걷고 있던 에녹이 썩 불편한 눈치로 제 뒤를 힐끔거렸다. 그들은 지금 채이, 에녹, 페르난데 순서로 일렬종대를 이루며 걷고 있었다. 그리고 최후방에서 현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로렌스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양아치처럼 주머니에 손을 꽂은 불량한 자세로 졸졸 따라오던 사내가 비죽거렸다.
“따라가든 말든 내 마음이지.”
“그래, 그럼.”
쿨한 허락에 페르난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화제를 돌려 다시금 대화를 이었다.
“…베타 귀족치곤 힘이 좋더군.”
“네가 너무 약한 거겠지.”
스스로 낮추는 게 아니라 채이가 느끼기에 정말로 그랬다. 실제로도 페르난데는 현 제국에 존재하는 우성 오메가 중 가장 약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비리비리했다. 평소 자신의 이능향만 믿고서 신체 단련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한 탓이 컸다.
“그리고 난 평민이야.”
“하! 거짓말하네.”
“그래서 할 말은 그거뿐?”
“…내가 특별히 안내역을 맡아주마. 이 근처는 자주 놀러 와 봐서 잘 알거든.”
“필요 없어.”
“씨, 해줄 테니까 알겠다고 해.”
고집불통인 건 똑같은데….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채이는 거만하게 턱을 들고 있는 사내를 슬쩍 흘겨보았으나 이내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알겠으니 네 마음대로 하세요.”
“채이 님….”
에녹이 걱정스럽게 채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쑥 끼어든 페르난데가 채이 옆으로 성큼 다가서서 어딘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갈 거지?”
“음. 쇼핑을 좀 하고 싶네.”
“어떤 쇼핑?”
채이가 곰곰이 생각하며 턱을 짚었다. 우선 에녹이랑 로렌스 그리고 레오나드에게 줄 깜짝 선물을 하나씩 사려는 생각이었다. 이래저래 신세 지고 있으니 감사의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다른 사람한테 선물로 줄 만한 것들… 가격대는 조금 있어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럼 고급 수공예품점으로 가는 게 좋겠군. 저기 건물 서너 개 지나면 마이그레인이라는 가게가 있는데 퀄리티도 괜찮고 가격도 나쁘지 않아.”
저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페르난데가 발걸음을 옮겼다. 채이도 혹시 모를 일을 걱정하는 에녹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보낸 다음 페르난데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광장의 중심에서 벗어나 조금 인적이 드물어 한산해진 골목길로 들어섰다. 잠시 뒤 채이와 보폭을 맞춘 페르난데가 은근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해코지 안 할 테니까. 어디 귀족 가문 출신의 알파야?”
뭔가 했더니 또 아까의 연장선이었다. 채이는 한숨을 뱉었다. 이 녀석의 오해를 어찌해야 바로 잡아줄 수 있는 건지….
“평범한 평민 출신 베타라고.”
“거짓말하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너 지금 내 정체가 뭔지 알아서 일부러 숨기는 거지?”
네 정체가 대체 뭔데.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알아봐 주리라는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데!
물론 페르난데는 제국 황제가 그토록 아끼는 사랑스러운 외동아들인 만큼 나름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으나… 그 사실을 채이는 아직 알지 못했다. 페르난데의 억지에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채이가 무시하기로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됐다. 빨리 안내하기나 해.”
그러자 잠시 침묵한 페르난데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어딘가 묘한 표정이었다.
“예예. 잘 따라오시지요.”
그러고는 다시 걸음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채이와 에녹이 페르난데를 따라 그 골목길에서 좀 더 걸어 내려갔을 때였다.
“저기야.”
채이는 제국어로 ‘마이그레인’이라 적힌 나무 간판을 발견했다. 그 아래에 굉장히 규모가 큰 수공예품점이 하나 있었다. 제법 유명한 곳인지 가게 주변에는 구경하거나 오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들어가 보자.”
채이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그런 채이의 뒤를 에녹과 페르난데가 동시에 따라붙었다.
‘왜 이 사람까지 따라 들어와?’
에녹이 그리 불만을 삼킬 무렵.
‘역시 이 녀석. 낯이 익은데….’
페르난데는 그런 에녹을 흘겨보며 자신의 흐릿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때 진열대를 살펴본 채이가 요리조리 눈을 굴리며 말했다.
“여기 예쁜 거 많다. 에녹, 가서 네 마음에 드는 걸로 찾아보고 올래? 사주는 거니까 네가 원하는 걸로 마음껏 골라 봐.”
“예? 하지만….”
“요즘 너한테 신세 지고 있으니까 감사의 의미야. 난 네가 받아 주면 고맙겠는데.”
“앗!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수줍게 상기된 얼굴로 기쁨을 표현한 에녹이 근처 진열대를 살펴보기 위해 조금 걸음을 옮겼다. 가게 안이 넓긴 해도 그 정돈 한눈에 보일 거리였기에 남몰래 해코지를 하진 못할 거라며, 안심한 에녹이었다.
채이와 둘만 남게 된 페르난데가 진열대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야. 너 진짜 내 정체 몰라?”
“몰라.”
“그럼. 궁금하지는 않은 건가?”
그에 채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왠지, 궁금해하길 바라는 기색을 느낀 탓이었다. 페르난데가 돌아보는 채이의 시선을 피해 아래로 눈을 떨궜다. 눈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분명 긴장하고 있다. 그는 채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거 같다. 대충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파악한 채이는 속으로 한숨을 죽였다.
‘아직 애네, 애야…. 겉으로 보기에는 레오하고도 비슷한 나이인 거 같은데.’
그리고 스무 살 초반이면, 이 세계의 기준으로 봐도 새파랗게 어린 나이가 맞았다. 이 세계 사람들의 수명은 그렇게 짧지 않기 때문에… 귀족 자제들의 데뷔탕트 또한 보통 스무 살 초반쯤 돼서야 이루어진다고 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20대는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는 초년생이었다.
물론 랭커스터 가문처럼 명망 높은 몇몇 집안들은 엄격하고 가혹한 승계를 추구하여 이른 나이부터 가문의 업무를 익히도록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뭔데? 들어줄 테니까 말해 봐.”
채이가 완전히 페르난데를 향해서 몸을 돌리고 섰다. 페르난데는 먼저 말을 꺼냈던 주제에 목덜미를 긁적이며 머뭇거렸지만, 검질긴 채이의 시선에 못 이긴 듯 이내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 이 제국의 황제야.”
“…루드비스 3세 황제 폐하?”
페르난데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채이도 이번만큼은 좀 놀랐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에 와서야 이해했다.
“그렇구나. 네 이름은?”
“페르난데.”
“드디어 이름 알았네.”
“…별로 안 놀라는군.”
“원한다면, 리액션은 해줄 수 있어. 근데 너 내가 놀라길 바라서 말한 거 아니잖아.”
페르난데의 안면이 옴칠 떨렸다.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채이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딱 보면 알지 뭐.”
마침 어릴 적 레오나드와 비슷한 반응이기도 했고. 페르난데가 괜스레 바닥을 콕 치면서 침묵을 지켰다.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채이는 그런 페르난데에게 일전에 레오나드에게도 해주었던 말을 읊어 주었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이, 너는 그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야.”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으나 그 말에 어쩐지 마음이 가는 페르난데였다.
“…….”
언제나 그의 주변에는 그를 두려워하거나 과보호하거나, 특별하다는 말로 배제하려는 인간들뿐이었다. 우성 오메가인 아버지는 그가 무얼 한들 감싸고돌기만 했고 우성 알파인 어머니는 그에게 늘 관심이 없었다.
누구 하나 진심으로 그를 대하는 이가 없는 세상.
그래서 ‘페르난데 님은 특별하니까….’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고 귀족들의 가면 놀음이 역겨웠으며 아무것도 안 했는데 과하게 두려워하는 평민들의 시선이 거슬렸다.
어느 순간부턴 눈앞이 캄캄했다.
모든 것들이 가짜처럼 느껴졌다.
시종들을 쓰고 싶지 않다고 반항하고, 그냥 편하게 좀 대하라고 몇 번이나 소리쳤더니 어느 순간 반항아나 망나니 등으로 불리기 시작했지만, 차라리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네가 누구든 상관없이, 너는 그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야.
그 한마디로 어두웠던 눈앞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그게 신기해서 페르난데는 풋 하는 소리를 시작으로 자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날카로운 눈매 탓에 사나워 보이던 얼굴이건만 웃으니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채이는 그가 왜 웃는진 몰라도, 웃는 걸 보니 함께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 지었다.
“웃으니까 훨씬 예쁘다, 너.”
보기에도 얼마나 좋은가.
한데 페르난데는 웃다 말고 갑자기 멈추더니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채이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너… 그런 말을 아무렇게….”
조심히 뻗어진 페르난데의 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이의 뺨을 감쌀 때였다.
쾅!
채이는 뭔가 무너지는 소리와 비명에 깜짝 놀라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레오나드가 한쪽 벽을 부서트린 상태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