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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26화 (26/105)

026화

“그 손 떼.”

이쪽을 노려보는 눈이 흉흉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흉흉한 시선은 채이가 아닌 페르난데를 주시하고 있었다.

‘뭐지?’

어째 싸움이 날 분위기가 잡히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은 기겁하여 숨거나 이미 밖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페르난데는 돌연히 나타난 레오나드가 그 자신을 독살스럽게 노려보는데도 썩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도 레오나드와 당당히 마주 노려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채이가 데굴 눈을 굴려 대치 상태인 레오나드와 페르난데를 번갈아 살피던 때였다. 문득 페르난데가 채이를 돌아봤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다음 순간 그는 무언가 알았다는 듯이 악동처럼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채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가까이 다가섰다.

“……?”

두 사람의 키는 비슷했기 때문에 페르난데가 조금만 고갤 숙여도 얼굴이 맞닿을 위치였다. 채이로서는 그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조금 거리를 두기 위해, 슬쩍 몸을 빼려고 했지만 그것도 잠시.

“윽…!”

페르난데가 저만치 밀려나며 짧게 신음했다. 놀란 채이가 눈을 둥글게 떴다. 순식간에 뻗어온 누군가의 손이 채이와 페르난데를 갈라놓고 있었다. 그게 레오나드임을 깨달았을 때 페르난데는 이미 멱살을 붙잡힌 뒤였고 직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페로몬을 뿜으며 서로를 위협했다.

전부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돌연, 페르난데가 사납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서 레오나드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왜. 한 대 치려고?”

“…….”

“치고 싶음 치든가.”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에 레오나드는 응하지 않았으나 이미 눈빛만 보면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패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매서운 기세에 어련히 겁을 먹을 만도 한데, 뻔뻔한 표정을 잘만 유지하고 있는 페르난데도 대단한 놈이었다.

물론….

‘얘네 갑자기 왜 싸워.’

느닷없이 싸우기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버린 채이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그건 그렇다 치고… 저택에 있어야 할 레오나드는 또 왜 여기 있는 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꺼져.”

레오나드가 채이를 제 등 뒤에다 숨기며 툭 밀치듯 페르난데의 멱살을 놓았다. 그 경고를 가벼이 무시한 페르난데는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눈을 얄브스름하게 접었다. 턱을 들어 올려 웃으니 상당히 거만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거였군. 이제야 알겠네, 저 베타의 정체…. 내가 왜 그걸 생각 못 하고 있었을까.”

“관심 가지지 마.”

“하! 싫은데? 내가 쟤한테 관심 가지든 말든 내 마음이지,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한 페르난데의 태도는 둘이 왜 이러는지 모르는 채이가 봐도 얄미웠다. 일부러 아니꼬우라고 거들먹대는 속내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

좀처럼 감정 다스리기가 쉽지 않은지 레오나드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페르난데를 내립떠보는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 문제는 그의 기세가 널뛰니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가게 안 사람들의 얼굴도 더욱 창백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채이야 강한 정신력에 더불어 레오나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어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채이가 진정하라는 의미로 레오나드의 등을 살살 쓸어 주었다. 그랬더니 거칠던 기세가 확연히 잦아들었다. 어깨를 으쓱인 페르난데는 마지막으로 채이 쪽을 일별한 후 씩 웃었다.

“다음에 또 보자. 채이.”

그렇게 한바탕 벌어진 소동 이후 페르난데가 떠나고….

가게 안에는 얼음장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레오나드가 여전히 불쾌한 듯 어두운 얼굴로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눈치가 보여 움직일 수 없었다.

행여 아까 느낀 저 사내의 위협적인 페로몬이 본인들에게 향한다면 그때는 정말 기절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나 좋으니 누군가가 이 분위기를 좀 깨주길. 그렇게 가게 안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바라고 있는 와중….

“오.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린다 야.”

싸늘한 분위기에 영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이의 목소리였다.

“아니면 이건 어때? 인물이 훤하니까 뭘 해도 잘생겼네.”

그는 우두커니 선 레오나드의 머리에 예쁜 머리핀을 이것저것 꽂으며 조잘대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채이의 그런 행동은 언뜻 레오나드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알랑방귀 같았다.

하지만 사실 채이에게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어쨌건 상황은 일단락됐고 마침 선물을 주려던 대상이 직접 찾아왔으니, 채이로서는 아까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 결과가 좋으면 만사 오케이라지 않은가. 겨울이 지나고 봄날이 찾아온 것처럼 스르르 풀린 레오나드가 채이를 돌아보며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왜?”

“아. 안 그래도 너 줄 선물 사려고 했었거든. 머리핀 괜찮지 않아? 앞머리 거슬릴 때 써도 되고. 아니면 네가 직접 고를래?”

“아냐. 난 다 좋으니 채이가 나한테 주고 싶은 걸로 골라줘.”

“그러니? 그럼 어디 골라 볼까.”

레오나드가 채이 옆에 붙어 노닥거리고 있으니 무겁던 분위기도 순식간에 온화해졌다. 두 사람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했다. 지켜보다가 ‘이때다’ 싶었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에녹도 안도하며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거리를 두었다. 채이의 의도하지 않은 행동 하나로, 알게 모르게 주변 상황은 정리되고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레오.”

그때 마침 궁금했던 점이 떠오른 채이가 진열대에서 예쁜 브로치 하나를 꺼내 들며 물었다.

“너 여긴 왜 온 거야? 아직 일하고 있을 시간이지 않아? 같이 가자는 말이 없길래 바쁜 줄 알았는데.”

“…….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길래 채이 보고 싶어서 마중 나왔던 거야.”

“흠? 그래?”

중간에 끼어 있는 침묵이 수상하기는 했지만 대수롭잖게 넘긴 채이가 레오나드의 옷깃에 브로치를 달아 주었다. 역시 검은 제복에는 이런 금장식이 달린 장신구가 어울린다니까. 그런 생각으로 채이가 뿌듯해하고 있을 무렵, 손을 뻗어온 레오나드가 채이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채이가 고개를 드니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채이. 아까 그 녀석이 혹시 이상한 짓은 안 했어? 무례하게 굴었다거나 때리려고 했다거나….”

“아. 페르난데 말이지?”

채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을 데굴 굴렸다. 그와 자신의 신분상 자신이 오히려 무례하게 굴고 손목도 꺾었지, 본인이 당한 건 딱히 없었다. 페로몬으로 위협당하고 자칫 폭력도 당할 뻔했지만 채이에게 있어 그런 건 염두에 둘 정도의 일도 아니었다.

“괜찮아. 그런 일은 없었어.”

“정말이지?”

“응, 걱정하지 마. 내가 어디 가서 당하고 사는 성격도 아니고. 그런데 페르난데랑은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아까 전 상황을 떠올린 채이가 슬쩍 물었다. 그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레오나드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일전에 컴베스트 공작이 그놈을 내 약혼 상대로 지목한 적이 있었거든.”

순간 입을 옴츠린 채이가 레오나드의 눈치를 살폈다. 컴베스트 공작이라면 레오나드의 친아비다. 그럼에도 레오나드는 그를 ‘아버지’가 아닌 컴베스트 공작이라 부르고 있었다. 명백히 타인으로 대하는 그 호칭에서 새삼 레오나드가 가족에게 느끼는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를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채이가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레오나드가 말을 이었다.

“나보다 한 살 많아 나이대도 비슷하고, 신분적으로도 알맞으니. 분명 가문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 거겠지.”

“그렇겠네.”

“하지만 난 다른 사람하고는 약혼 맺을 생각이 없고… 무엇보다 투덜대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어쩌다 크게 싸웠어. 그 뒤로 그놈이랑은 계속 사이가 안 좋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한마디로 페르난데와는 말다툼했었던 것 때문에 데면데면한 사이가 됐다는 말이다. 일이 있었다기에 뭔가 심각한 사건이라도 있었나 했는데, 생각보다 귀여운 이유였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점 하나에 채이가 레오나드의 발언을 곱씹었다.

‘다른 사람하고는 약혼 맺을 생각이 없다…? 그럼 약혼 맺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기는 하단 말인가?’

솔직히 미묘한 뉘앙스 차이일 뿐이라서 과민 반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채이는 그 말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만약 마음에 둔 사람이 정말 있는 거면 대체 누구인 거지? 레오의 오메가 짝이 나타나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레오나드와 그의 짝이 될 오메가는 랭커스터가 주관하는 연회장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그 연회장이 열리는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진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회가 열리면 많은 귀족들이 초대받아 저택에 들를 거라 모를 수가 없는데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러므로 두 사람이 벌써 만났을 리는 없었다.

‘이상하네.’

하지만 채이 본인의 일도 아니고 깊이 생각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마… 레오나드는 바라지도 않을 쓸모없는 참견이기도 할 것이었다. 그리고 레오나드도 다 컸으니 어련히 잘하지 않겠는가.

‘만약 착각이 아니라면 누구인지는, 레오가 말해 주고 싶을 때 말해 주겠지.’

채이는 더 이상 레오나드의 연애사에 깊이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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