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툭… 툭.
델리온의 손에 잡힌 만년필 끝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류 종이를 찍었다. 깊이 상념에 잠길 때면 매번 나오는 델리온의 습관이다. 현재 그는 채이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서류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신분패를 최근에 발급했군. 이름은 채이. 나이는 서른다섯에, 베타 평민. 특이할 점은 없어. 그런데 왜 이전까진 위조된 신분패를 써 왔던 걸까.’
과거와 관련된 정보는 일부러 누군가가 없애 놓은 것처럼 깨끗하였기에 델리온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것뿐이었다. 더군다나 이 이전에는 추적이 불가능한 위조 신분패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따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는 루트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한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었습니다. 돈을 벌기에는 마물의 사체를 팔아넘기는 게 가장 빠르다 보니 본의 아니게요.
툭. 만년필을 내려놓은 델리온이 깍지 낀 손에 얼굴을 괴었다.
‘사냥꾼이라.’
델리온은 사냥꾼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자들을 과거에 몇 명인가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이 주로 마물을 잡을 때 사용하는 기술은 야만적인 잡기에 가까웠다. 그저 살기 위해서 본능과 몸으로 익힌 그런 것들…. 그런데 채이가 보인 움직임은 분명 낯설긴 했으나 군더더기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극히 절제되어 있었다. 그는 자주 겪어 본 일인 듯 침착한 판단력을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기에 많은 걸 판단해낼 순 없었지만… 그는 분명 ‘훈련받은’ 사람이었다.
물론 며칠 전 연회장에 들이닥친 암살자와 관련 있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델리온은 채이가 그러한 기술을 어디서 익힌 건지 순수하게 궁금한 것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어 번 노크했다. 그러더니, 들어오라고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벌컥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누가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가 싶었는데… 얼굴을 보니 레오나드인 게 아닌가.
델리온은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굉장히 놀랐다. 레오나드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신을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네가 무슨 일로 날 찾았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까?”
그런데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내립떠보는 눈엔 평소와 같은 무미건조함 대신 혐오 어린 불쾌함이 들어차 있었다.
“혹여 채이에게 허튼짓을 할 생각이면 지금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이건 부탁이 아닌 경고입니다.”
그럼에도 델리온은 그만 픽 웃음을 짓고 말았다. 채이가 저택에 들어오고부터 다채로워진 레오나드의 표정을 보는 것이 제법 신기해서. 그러한 변화는 오히려 달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 가장 무서운 건 무관심이라던가.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델리온은 문득 생각했다.
“그리도 그 베타가 소중하더냐.”
그에 레오나드는 답하지 않았다. 델리온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 마음은 경애더냐, 성애더냐.”
순간 레오나드의 얼굴에 얕은 균열이 일었다. ‘그’ 레오나드가 동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현재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대충 어떠한지도.
‘자신을 어릴 때 거둬 키워준 베타를, 그것도 짝사랑하다니. 어려운 길을 가는군.’
델리온은 언뜻 무감해 보이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슬쩍 걸었다.
스스로 눈치채진 못하고 있으나 그는 레오나드가 돌아온 이후로 부쩍 유해져 있었다. 분명 레오나드의 존재로 인해 당연시하여 답습해 오던 많은 고정 관념과 가문이 자행했던 악습에 의문을 품고, 조금씩 생각을 바꾼 탓이리라.
하지만….
이번 건은 별개의 문제였다.
“레오나드. 너도 알겠지. 정식 후계라면 후사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베타의 피가 섞이면 태어나는 아이의 형질은 대부분 베타가 된다. 베타-오메가 혹은 베타-알파 사이에서 알파 혹은 오메가 후사를 볼 수 있는 확률은 발현자끼리 결혼했을 때 베타가 태어나는 극악의 확률과 같았다.
하물며 베타 남성은 아이를 갖는 것조차 못한다.
아예 사랑하지 말라고 막을 생각은 없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다면 후계자 자리는 반납해야 할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랭커스터 가의 명맥을 레오나드가 끊어 먹게끔 내버려 둘 순 없으니까.
무엇보다 랭커스터 가문의 장로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
“방법은 있습니다.”
깜박이던 눈을 아래로 떨군 레오나드가 조금 저조해진 목소리로 반론했다. 그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본 델리온은 짧게 한숨을 지었다.
“그래. 있기야 하지.”
딱 한 가지. 베타를 오메가로 바꾸는 방법이.
“하지만 운이 따라줘야 한다.”
우성 알파들만 가지는 ‘흥분향’. 그 특이 페로몬에 오랫동안 노출된 베타는 열성 오메가로 형질이 바뀔 수 있다. 문제는 그것도 쉽게 바뀌는 사람이 있는 반면, 죽어도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방법으로 형질이 바뀔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다려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시간은 유한하지 않으니까. 지켜봐 줄 수 있는 건 레오나드의 나이가 서른이 되기 전까지일까. 한참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레오나드가 이내 또렷이 눈을 뜨고 델리온을 응시했다.
“그렇지 않다면, 후계 자리를 내려놓고 가문을 다시 떠나면 그만입니다.”
레오나드의 의지는 확고했다.
채이를 포기하느냐.
가문을 포기하느냐.
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선택하는 것은 가문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채이는 이미 레오나드에게 있어 인생에 없어선 안 될 필수 요소 같은 존재였기에.
“할 얘기가 끝났으면 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레오나드는 더 이상 이 장소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휑하니 나가버렸다. 레오나드의 뒷모습을 잠자코 지켜본 델리온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러나저러나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야겠군. 레오나드가 가문을 떠난다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니까.’
아마 장로들이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입에 거품을 물든가, 델리온과 베넷에게 우성 알파를 더 낳으라고 입에 거품을 물든가. 둘 중 하나일 터였다.
뭐. 그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들이 행여나 레오나드의 신경을 과하게 건드리기라도 하면 가문 자체가 위험해진다.’
그가 발현하고 제 발로 돌아왔을 때의 일을 떠올린 델리온이 눈을 내리떴다.
레오나드가 가진 이능향….
그건 위험하다.
그의 이능향은 마물을 조종하는 레귤러 타입으로 특이할 게 없었지만… 문제는 영향이 미치는 범위와 힘의 세기였다. 레오나드의 이능향은 위험 1등급 마물은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더 정신력이 강한 고등 이종족에게도 영향을 미치니까.
오죽하면, 레귤러 이능향이 분명한데도 돌연변이 같은 힘이라 하겠는가.
그의 힘은 영지 하나 따위 충분히 멸해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니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레오나드가 채이를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대한 장로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리라.
“…하아.”
앞으로 골치 썩을 일들을 생각하니 델리온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
연회가 흐지부지 끝나고 근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오늘도 페르난데가 찾아왔다. 그는 연회가 끝난 이후로도 줄곧 채이를 만나러 출석 도장을 찍다시피 했기에, 오늘 또 얼굴을 비춘 게 이상하지 않았으나….
“벤냑스?”
페르난데 옆에 벤냑스가 함께 있는 건 아무래도 역시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채이 님.”
수줍게 시선을 떨군 채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벤냑스가 용기 내어 인사를 건넸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설명이 필요했던 채이와 에녹이 페르난데 쪽을 돌아보자 그는 콧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어제저녁에 다시 왔더군. 당분간 이 녀석도 여기 머물 거란다. 그래서 지금 나랑 같은 저택을 쓰는 중이고 말이지.”
“컴베스트 공작님이 제 어리광과 편의를 봐주신 덕분에 당분간 머물 수 있게 됐어요…!”
벤냑스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보석 같은 눈을 반짝였다. 채이를 바라보는 얼굴엔 순수한 감동과 행복이 가득했다. 반면 벤냑스가 왜 되돌아올 필요가 있었는가에 대해 일고했던 채이는 이내 머릿속에 느낌표를 띄웠다.
‘아. 레오 만나고 싶어서 다시 온 거구나!’
레오를 다시 만날 생각만으로 저런 천사 같은 얼굴을 하다니…. 채이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나한테도 얼굴을 비추려고 일부러 어려운 발걸음을 해 주다니.’
어쩜 이리도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이런 아이가 레오나드를 데려가 준다면 채이는 충분히 납득할 것이었다. 그렇게 채이는 오늘도 단단히 착각 회로를 가동하고 있었다.
“벤냑스, 얼굴 비추러 와 줘서 고마워요. 기왕 온 김에 벤냑스도 같이 티 타임하고 가겠어요?”
마침 레오나드는 저녁까지 바빠서 못 온다고 했으니…. 그동안 미래의 며늘아기에 대해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아, 물론 강요는 아니에요. 혹시 따로 할 일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음에 나눠도 좋고….”
채이의 소극적인 제안에 벤냑스는 눈을 더욱 반짝반짝 빛내다 활짝 웃었다. 당연하지만 벤냑스에게 거절한다는 선택지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아뇨! 이야기 나눠요, 채이 님!”
오히려 벤냑스는 채이가 제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행복해했다. 그리고….
“…….”
“…….”
눈치 빠른 에녹과 페르난데는 딱 봐도 동상이몽을 꾸는 중인 벤냑스와 채이를 번갈아 보다가,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