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었던 건 델리온과 레오나드다. 델리온 옆에는 오랜만에 보는 쿠쿠프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움. 엄마다.”
그때 채이 품에 안겨 있던 실비에트가 앞발톱으로 그 여인을 가리켰다. 순간 폴리모프한 모습이란 걸 잊고 당황한 채이가 여인과 실비에트를 번갈아 볼 때였다. 마침 이쪽을 돌아본 이름 모를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
그녀도 채이 품에 안긴 실비에트를 단번에 알아본 듯 탄성을 뱉더니 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서로를 이렇게 보는 건 분명 처음일 텐데, 본능적으로 같은 냄새를 가지고 있음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던 세 명의 일행 또한 그녀를 따라 채이 쪽으로 향했다. 레오나드와 한 번 시선을 마주할 즈음 그녀가 실비에트를 보고서 피식 웃었다.
“오냐. 내가 네 엄마다.”
“왜 이제 와?”
“오호. 이 어미가 보고 싶었냐?”
눈을 가늘게 뜬 실비에트의 엄마가 악동 같은 얼굴로 이죽대자, 실비에트도 못마땅하게 눈을 내리떴다. 그 사이에서 채이는 눈치를 보았다. 뭔가 감동적인 재회가 될 줄 알았는데… 예상하고 달랐다.
급기야 실비에트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폭탄 발언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훙. 그냥 평생 오지 말지.”
채이는 그런 반항적인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실비에트의 엄마는 도리어 깔깔대며 웃음보를 터트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대화였는데 어디가 웃겼던 건지 채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로 대강의 이유는 유추할 수 있었다.
“솔직히 인간들 틈에서 자랐다기에 걱정했는데, 똘똘하게 잘 큰 것 같군. 제국어도 잘 배워 둔 거 같고. 네가 그동안 이 녀석을 맡아준 인간이지?”
돌연 그녀의 시선이 채이 쪽으로 돌아왔다. 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군, 반갑다. 내 이름은 레무엘이라고 한다. 네 이름은 뭐지? 이 녀석에게는 따로 이름을 지어 주었나?”
“아. 제 이름은 채이입니다. 그리고… 실비에트란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그녀의 악수 요청을 받아준 채이가 곧 제 품에 안긴 실비에트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레무엘은 그 이름을 한차례 읊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
“예쁜 이름이네. 고맙구나.”
진심 어린 속마음이 엿보이는 감사 인사였다. 그 탓일까. 채이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쩌면 실비에트와 함께한, 짧으면서도 길었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잠시간 몽글몽글한 감정에 젖어 있을 때였다.
“덕분에 손 안 대고 코 풀었군.”
그녀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얄미운 얼굴로 얄미운 소리를 했다. 딱 봐도 짓궂은 성격이었다. 실비에트가 결국 채이 품에 찰싹 안겨 우에엥 울고 말았다. 그러든 말든 레무엘은 딴청을 피웠다.
“나 가기 싫어! 채이가 좋아!”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채이가 실비에트의 등을 쓰다듬으며 달래는 동안 에녹과 레오나드도 곁에서 채이를 도왔다.
“실비 님. 마음은 이해하지만….”
“싫어!”
“고집부리지 마. 채이를 계속 괴롭힐 거야? 사람 틈에서 계속 지내는 건 너한테도 좋지 않고 우리한테도 좋지 않은 선택이야.”
“우에엥! 레오나드도 싫어!”
이제 보니 레오나드는 채이를 돕는 게 아니라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쿠쿠프는 태평하게 턱수염이나 쓸며 웃었고 델리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기를 잠시… 놀릴 만큼 놀렸다고 생각했는지 딴청 피우던 레무엘이 실비에트의 머리를 쓰다듬듯 툭 손을 올렸다.
“널 잃어버리고 난 후에, 네 아빠는 어제까지만 해도 계속 눈물 콧물 질질 짜고 있었어. 널 정말 애지중지했거든.”
“…….”
“널 찾은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얼마나 흥분을 하던지… 그러니, 씩씩하게 가서 네 귀여운 아빠한테 건강히 자란 모습을 보여줘야지 않겠어?”
“…….”
실비에트에게서 대답이 없다. 하지만 투정은 멈추었다. 실비에트는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망설이는 실비에트의 등을 밀어주기 위해 채이가 조곤조곤 덧붙였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우린 항상 여기 있을 테니까, 언제든 생각나면 놀러 와.”
그 격려에 실비에트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레무엘도 덧붙였다.
“아니면 우리 둥지로 놀러 오라고 해도 된다. 원래 인간은 들이지 않지만, 채이 정도면 괜찮겠지.”
“정말?”
“그래. 채이에겐 우리 둥지의 위치를 알려 두마. 언제든 놀러 올 수 있게.”
“…좋아.”
그제야 결심을 굳힌 듯 총명하게 눈을 빛낸 실비에트는 채이의 품에서 벗어났다. 온기가 멀어지자 울컥 감정이 올라왔지만 채이는 꾹 참고 미소 지었다. 문제는 실비에트가 제 슬픈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채이… 우우. 나 꼭 놀러 올게.”
“그래. 가서도 잘 먹고 잘 자고.”
“우웅.”
파닥파닥 날아서 레무엘의 등 뒤에 찰싹 붙은 실비에트가 어부바하듯 안겼다. 픽 웃은 레무엘은 채이의 이마에 손가락을 한 번 터치하고는 물러났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채이의 머릿속에 둥지로 가는 길이 선명하게 기억되었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보지.”
이어 레무엘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짐승처럼 길어지던 주둥이가 드래곤의 형상을 완벽히 갖추었고 거대해진 몸뚱이는 파충류와 같은 표피로 뒤덮였다. 하얀 몸체에 금색 눈동자… 이렇게 보니 실비에트와 정말 판박이였다.
레무엘이 사람들을 굽어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자 잠시 후 전음이 흘러나왔다.
“쿠쿠프. 너도 데려다줄까?”
“호홍. 널 드워프들의 마을로 데리고 갔다가는 난리가 날 테니 사양하지. 조심히 가보거라.”
쿠쿠프의 사양에, 짧게 코웃음 친 레무엘이 크고 멋진 날개를 한차례 치면서 날아올랐다.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도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성체 드래곤이 주는 위압감은 해츨링과 차원이 달랐다.
레무엘은 마지막으로 채이를 힐끔 쳐다보고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가, 단숨에 날갯짓하여 저 멀리 모습을 감추었다. 실비에트와 레무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쿠쿠프도 일행을 돌아보았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구나. 나도 이제 가보도록 하겠다. 또 내 도움이 필요한 때가 생기면 얼마든지 부르도록 해라, 델리온.”
“쿠쿠프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저희 랭커스터를 부르십시오. 언제든 나서서 도와줄 테니. 다음에 또 보도록 하죠.”
“호홍. 아가들도 잘 지내려무나.”
“아. 조심히 가세요, 쿠쿠프.”
잊지 않고 모두를 언급해주는 쿠쿠프의 섬세함에 채이가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그렇게 쿠쿠프까지 떠나고…. 채이와 레오나드, 에녹, 델리온 네 사람 사이에는 한차례 침묵이 내려앉았다. 채이는 사라진 실비에트의 자취를 좇으며 시원섭섭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진짜 갔구나.’
실비에트를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체감되지 않았는데… 서서히 체감되고 있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보러 갈 수는 있게 됐지만 말이다. 그때 델리온이 채이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채이. 너도 지금까지 수고했다.”
솔직히 의외의 일이었다.
“…천만에요.”
“그리고 할러드가 자네를 귀찮게 하는 것 같던데.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어려워하지 말고 레오나드를 통해서라도 말하도록 해라.”
말투는 분명 딱딱한데 은근히 다정하다. 그 묘한 다정함이 얼떨떨하여 채이가 고개만 끄덕일 즈음 델리온은 레오나드를 힐끔 보더니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 보니 할러드 공자님은 실비랑 마지막 인사도 못 했네.”
“아. 그러게요.”
채이의 중얼거림에 에녹이 공감하며 맞장구쳤다. 아쉬웠다. 하지만 실비에트는 이미 떠나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약간의 미련을 마저 털어낸 채이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레오나드를 돌아보았다.
“레오는 다시 일하러 가니?”
“응. 저녁에 돌아올 것 같아.”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마주한 레오나드가 그리 답하며 채이의 이마에 쪽 입술을 가볍게 댔다. 흠칫 놀란 채이가 눈을 데굴 굴렸다. 분명 평범한 인사인데 왜 이렇게 간지럽고 어딘가 마음이 불편한 걸까. 채이는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구었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입을 열었다.
“참. 그리고 레오.”
“응?”
“너 벤이랑은 연락해봤어?”
혹시 모르니 확인차 묻는 질문이었다. 원작과 많이 달라진 상태인 만큼 레오나드가 오히려 벤냑스에게 먼저 마음을 품은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그의 반응은 벤냑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내가 왜 연락해야 해?”
물어본 사람이 머쓱해질 만큼 쌀쌀맞고 냉정한 대답…. 상대방에게 어떤 마음도 없어 보이는 그런 반응이었다. 채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방해한 것 같아서 채이는 괜스레 죄책감도 느꼈다. 만약 이대로 두 사람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행복할 일만 남은 레오나드의 인생이 혹여 잘못될까 걱정도 되었다.
‘어떻게든 되돌려놔야….’
그동안 실비에트를 챙기느라 바빠서 잠시 뒷전으로 미루고 있었던 문제를 이제는 본격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채이?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채이는 레오나드의 등을 밀며 얼른 가보라고 재촉했다. 의심스럽게 눈을 흘기던 레오나드였으나, 결국 그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떠났다. 그렇게 레오나드를 돌려보낸 채이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