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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50화 (50/105)

050화

한참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이후 근처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남은 아이스크림을 해치웠다. 채이가 녹은 아이스크림까지 깔끔하게 청소하고 있자 슬쩍 웃은 레오나드가 물었다.

“채이. 그렇게 맛있어?”

“응. 왜? 너는 별로야?”

“나도 맛있어.”

“그래? 그럼 다행이고.”

채이는 비어버린 컵을 벤치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배도 다시 부르고 기분도 좋고. 벤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으니 긴장도 사르르 풀려 이곳이 곧 천국이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뺨에 닿았다. 봄기운을 느끼게 하는 따뜻하고 산뜻한 바람이었는지라, 기분이 나른해졌다.

“기분 좋네….”

채이가 잠시 눈을 감았다.

분수대 쪽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와글와글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웃음소리들이 꼭 백색소음처럼 느껴져 편안했다. 한잠 자고 싶은 기분이라며 흘러가듯 생각하던 중, 문득 눈을 다시 뜬 채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

그리곤 굳은 얼굴로 놀라며 탄성을 뱉었다. 뭔가 잊은 거라도 떠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채이의 옆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던 레오나드도 같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큰일 났다. 해가 지고 있잖아.”

“…아.”

“아, 가 아니야. 얼른 가자.”

레오나드가 김샌 표정을 짓고 있을 동안 채이는 냉큼 벤치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채이와의 시간을 더 즐기고 싶었던 레오나드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은 채 말했다.

“조금만 더 있다 가자, 채이.”

“응? 왜?”

“시간이 꽤 늦긴 했지만 노을 질 시간까진 아직 멀었잖아. 좀 더 있다가 가도 괜찮아. 광장 구경도 다 못 했고.”

레오나드의 설득은 그럴싸했다. 물론 채이의 입장도 강경했다.

“그건 그렇지만 너무 놀았어. 병문안 온 건데…. 그럼 벤 집에서 자고 내일 돌아가?”

채이가 시간을 확인하며 묻자 레오나드의 얼굴에 얕은 균열이 일었다. 잠깐 얼굴만 보고 가면 되는 것을, 채이는 대체 얼마나 있을 셈인 걸까.

“…아냐. 오늘 안엔 돌아가야지.”

알 수 없는 채이의 속내에 두려워진 레오나드는 결국 어기적거리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병문안 갔다가 오늘 안에 돌아갈 건지, 좀 더 노는 대신 내일 돌아갈 건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였다.

말을 묶어 두었던 장소로 돌아가자 일찍 돌아와 있던 마부가 두 사람을 반겼다. 그들은 곧장 외곽을 따라서 이동하여 코네러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니 랭커스터 저택만큼이나 큰 저택과 그 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랭커스터의 문양을 달고 올라오는 마차를 확인한 코네러 가문의 병사들이 주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상황을 전달받은 코네러 부부는 방문객을 직접 맞이하기 위해 문 앞까지 마중 나갔다. 하여 마차가 대문 앞에 멈춰 설 즈음 채이와 레오나드는 코네러 부부를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레오나드 공자.”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코네러 부부는 정말 여기까지 걸음 해준 레오나드를 보며 너무 기뻐했다. 채이의 눈에도 뻔히 보일 정도로.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들은 레오나드와 소중한 외동아들 벤냑스가 성공적으로 약혼하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바람을 품고 있는데 레오나드가 마침 소식을 듣고 직접 병문안을 온다?

자세한 걸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그게 누구라도 긍정적인 신호로 생각할 것이었다. 거기다 벤냑스도 레오나드가 온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잔뜩 들떠서는 평소보다 행복해했으니 코네러 부부가 착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벤냑스는 레오나드가 ‘채이라는 사람과 함께’ 온다는 말을 듣고 반응한 것이었지만…. 벤냑스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기에 코네러 부부는 그것까지 눈치챌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레오나드에게 잔뜩 말을 걸고 나서야 뒤늦게 채이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코네러 부부가 드디어 채이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채이라고 합니다.”

채이가 먼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자 코네러 부부도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채이 공. 얘긴 많이 들었어요.”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 웃는 모양새가 벤냑스와 많이 닮았다.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곧 벤냑스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내가 교양 있는 정중한 태도로,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이런. 인사를 해야겠군요. 제 이름은 웨커슨 디 클랭커스 코네러입니다. 우성 오메가고요. 그리고 여기 있는 제 아내는….”

“반가워요. 저는 마델리아 디 클랭커스 코네러라고 합니다. 형질은 열성 알파예요.”

마델리아가 말을 이어받으며 마찬가지로 인사했다. 채이가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게 되새기는 동안 두 사람은 저택 쪽으로 몸을 돌리고 섰다.

“우선 안쪽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렇게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레오나드와 함께 코네러 부부의 뒤를 따라간 채이는 코네러 저택을 구경했다.

화려함을 강조하는 느낌을 주는 랭커스터 가에 비교하면 소박한 느낌이 강하다. 자녀들에게 별채를 하나씩 지어 주는 랭커스터와 다르게 넓은 부지에 저택도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벤냑스와는 한 저택에서 함께 생활하는 모양이었다.

코네러 부부의 성격과 가족 간의 관계가 반영된 결과물이 아닐까 싶었다. 자식이 하나뿐이란 것도 이유일 테고.

“벤의 방은 이 층에 있어요.”

저택 로비를 지나 계단을 오르던 중 마델리아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잠시 후 앞장서서 복도를 걷던 웨커슨이 벤냑스의 방 앞에 멈춰 서서 노크를 했다.

“벤. 레오나드 공자와 채이 공께서 찾아오셨단다. 이분들을 들여보내도 되겠니?”

그러자 안쪽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잠잠해지자마자 달깍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그 사이로 빼꼼 나타난 벤냑스의 얼굴이 오랜만에 채이를 맞이해 주었다. 딱 봐도 좋아하는 게 티 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코네러 부부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벤,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렴.”

“네! 어머니.”

제 부모님을 배웅한 벤냑스가 곧장 레오나드와 채이를 안으로 들였다. 방이 굉장히 깔끔하고 화사한 느낌이라 채이가 감탄하면서 구경했다. 반면 벤냑스는 채이에게 제 은밀한 공간을 보인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어쩔 줄 몰라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채이는 그냥 벤냑스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 거라고 이해했다.

“몸 상태는 괜찮아요? 저희는 병문안 온 거지, 귀찮게 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편안하게 누워 있어요.”

채이의 제안에 벤냑스는 조금 고민하다가 이불 속으로 쏙 몸을 숨겼다. 사실 몸 상태는 이미 많이 호전되었지만 이불 속에 숨어 있는 편이 마음이 안정되었다.

“채이 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벤냑스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수줍게 채이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지켜보던 레오나드가 급기야 불쾌함을 드러내며 미간을 구겼지만 금방 무표정 뒤로 감추어졌다.

“그럼요. 벤은 어땠어요?”

“저도 괜찮았어요! 사실 그간 채이 님을 못 본다는 게 제일 슬펐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벤냑스가 채이를 힐끔 쳐다보고는 덧붙였다.

“보고 싶었어요. 채이 님.”

개미가 기어가는 듯 조그만 목소리였지만, 조금만 그런 쪽으로 눈치가 있으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속내였다. 소심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과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망설이지 않고 전부 표현하는. 레오나드의 입장에서 벤냑스는 엄청나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참다 못한 레오나드가 채이와 벤냑스의 대화를 차단하기 위해 끼어들었다.

“그런데… 코네러 영식의 눈에는 제가 보이지 않나 봅니다. 누가 보면 채이 혼자 병문안 온 줄 알겠네요.”

그리고 레오나드가 ‘기분 나쁘다’는 말을 에둘러서 표현하고 있음을 모를 수 없던 벤냑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공자님.”

“그렇습니까?”

“네. 정말이에요. 레오나드 공자님께도 당연히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른 분도 아니고, 레오나드 공자님이 제 병문안을 와 줄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그럼 저하고도 대화하시죠.”

레오나드가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보기 드문 미소는 언뜻 보기에 아주 다정했지만 벤냑스는 알 수 있었다. 눈이 웃지 않고 있음을. 오히려 벤냑스는 그에게 더욱 큰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포식자에게 노려지는 먹잇감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하여 벤냑스가 도움을 바라며 채이를 힐끔 돌아봤으나….

‘레오가 저렇게 웃어 주다니.’

레오나드의 미소를 본 채이의 생각은 안타깝게도 그의 감상하곤 달랐다.

‘생각보다 둘이 평범하게 대화도 잘 나누는 것 같고. 이게 바로 그린 라이트인가?’

두 사람의 갈등이 더욱 심해지는 레드 라이트였지만 채이는 마냥 긍정적이었다.

‘좋아. 그럼 슬슬 일어나볼까.’

슬쩍 웃은 채이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 움직임을 놓칠세라 레오나드와 벤냑스의 시선이 냉큼 따라붙었다. 그뿐인가. 두 사람은 순간 텔레파시라도 통한 건지 동시에 외쳤다.

“어디 가.”

“어디 가세요.”

언뜻 손발이 착착 맞는 레오나드와 벤냑스의 모습에, 그 두 사람의 속도 모르고 채이는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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