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둘이 대화 좀 하고 있어. 난 잠시… 아. 화장실 다녀올게. 나 늦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적당히 둘러댄 채이는 냉큼 방을 나가버렸다. 그 속내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정말 급해서 튀어 나간 줄 알 터였다.
“채이 님! 화장실은 저쪽….”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벤냑스가 손을 뻗어보았지만 이미 한참이나 늦은 후다.
“…….”
“…….”
그렇게 둘만 남게 된 레오나드와 벤냑스 사이에 살벌하고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편 둘만의 자리 만들어 주기에 성공한 채이는 뿌듯한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다. 둘 사이를 의도치 않게 방해한 것 같아 죄책감이 계속 남아 있었는데, 이걸로 한 줌 덜어진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워졌다.
‘조금씩 노력하면 돼.’
이 ‘세계’라는 무대의 주연인 두 사람은 그만한 인연으로 묶여 있으니 결국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아가리라. 레오나드의 해피엔딩도 머지않은 셈이었다.
‘그나저나….’
화장실 간다 하고 나왔지만 정말로 갈 생각은 없어서 그동안 뭘 해야 할지 고민된다. 잠시 후 채이는 바람이나 쐬러 저택 밖으로 나갔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곤란할 테니, 입구 근처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고 적당한 때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파란 하늘을 멍하니 구경하며 얼마 정도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한 시간은 훌쩍 넘은 것 같다. 채이는 주변을 한 번 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올라가 볼까.’
화장실 간다는 변명으로 두세 시간씩 자리를 비우면 너무 의도한 상황이라는 것이 티가 날 테니까.
채이는 열린 입구를 지나 로비로 들어섰다.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도 없고 복도를 돌아다니는 시종도 극히 드물어서 조용하다. 하여 그도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복도로 올라갔다. 방 앞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채이는 그 방 앞에 멈추어 서서 들어가야 하는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한참 고민했다.
안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어쩌지.’
정확한 대화 내용까진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혹시나 둘이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하필 문을 열어서 끼어들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쩌나 싶었으니까. 그즈음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멎었다. 이내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싶더니 문이 벌컥 열려 채이는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건 레오나드의 얼굴이었다.
“아. 어… 재밌게 놀고 있었니?”
레오나드는 문 앞에 서 있는 채이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꼭 채이가 거기에 서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심상한 모습이었다. 어딘가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레오나드의 침묵에 채이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한 박자 늦게 레오나드가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채이. 이만 돌아가자.”
“뭐? 벌써 돌아간다고?”
레오나드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채이의 반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당황한 채이가 방 안쪽을 돌아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딱딱하게 굳어 있는 벤냑스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뭐지?’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인지 감도 안 잡힌다. 자리를 비운 그 잠시 동안 둘 사이의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어 있으리라곤 예상도 못 했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레오나드가 강경한 태도로 나와 어쩔 수 없었는지라 벤냑스에게 마지막 인사부터 남겼다.
“벤. 그러면 저희 가볼게요.”
“네, 채이 님. 다음에 봐요.”
벤냑스가 힘없이 웃었다. 평소보다 시무룩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채이는 찝찝한 기분으로 레오나드를 따라 나갔다.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올라탄 후에도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결국 마차가 한참을 달리고 난 후에야 채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레오. 벤이랑 싸웠어?”
그제야 레오나드도 채이와 눈을 마주했다. 저 짙은 벽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런 건 아니야.”
“정말?”
“응.”
“하지만 분위기가 안 좋던데….”
“분위기가 좋을 이유도 없잖아.”
일부러라 해도 될 정도로 냉정하기 짝이 없는 대꾸에, 채이가 결국 한숨을 터트렸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이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시나리오는 외부 개입으로도 잘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다. 전후 관계와 결과는 달랐으나 레오나드가 채이 집을 몰래 빠져나가 마물에게 다칠 뻔했던 일도 똑같았고 레오나드가 발현하고 난 후 결국 가문으로 돌아갔던 일도 그렇다.
그렇다면 엔딩의 시작이 되는 레오나드와 벤냑스의 관계도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아야 하지 않나. 채이는 두 사람이 이토록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이유가 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레오나드가 제 형인 에일런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던 것처럼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으리라.
‘혹시 그런 거라면….’
이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좋은가.
‘어느 쪽이 레오에게 좋은 거지?’
채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꼬여버린 상황에 채이 본인이 엮여 있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채이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마음이 복잡한 건 레오나드도 마찬가지였다.
채이는 자신이 두 사람의 이벤트를 망친 탓에 이 꼴이 났다며 전전긍긍하는 중이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레오나드의 마음은 줄곧 채이만 보고 있었으니까. 유독 벤냑스와 관련해서만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채이의 행동들은 레오나드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모두 깊이 있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으로 인해 생긴 문제였다.
“…채이는 내가 코네러 영식하고 그렇게 친해졌으면 좋겠어?”
그때 입 다물고 있던 레오나드가 불현듯 질문을 던졌다. 그 속에 담긴 의도를 파악해내는 건 불가능했기에 채이는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이 친해지면 좋지.”
“왜?”
“둘이 잘 됐으면 좋겠으니까.”
그런데 그 대답을 들은 레오나드는 아까보다 더 표정이 안 좋아졌다. 왠지 실수한 것 같다고 느낀 채이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잠깐의 침묵 후 레오나드가 다시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채이.”
“응.”
“아까 화장실 갔던 거 아니지.”
“…어.”
“무슨 생각이었어?”
책망하는 듯한 뉘앙스라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 더 말을 아꼈다가는 레오나드와 단단히 틀어질 것 같다고 느낀 채이가 결국 이실직고했다.
“미안, 나는 그냥 둘이 제대로 대화 좀 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줬던 것뿐이야.”
그때였다.
마차가 천천히 멈추더니 숙소에서 묵고 가실 거냐는 마부의 외침이 들렸다. 하여 잠시 대화를 멈춘 레오나드와 채이는 마차에서 내려 방을 잡았다. 저번처럼 방은 하나고 침대는 두 개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방으로 올라가는 길이 무겁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분명 레오나드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리 애매하게 대화가 중단된 상태로 계속 있을 수도 없기에, 채이가 먼저 입을 열려던 것도 잠시. 방문을 연 레오나드가 먼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쓸데없는 짓이었어.”
심장을 짓이기는 것 같은 서늘한 목소리였다. 왠지 숨이 가빠져 채이는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레오나드가 채이 자신을 이토록 매정하게 질타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당황스럽고 왠지 모르게 두렵다.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하고 괜히 미안하기도 했다. 그대로 대화를 포기한 채 스트레스를 받는 이 상황에서 도망가버릴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채이는 그러지 않았다.
“미안하다, 레오. 나는 그냥 네가 행복하길 바라서 그랬던 건데 그게 기분 나쁜 일이 될 수도 있단 걸 생각하지 못했어. 내가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하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상황을 해명하고 제 마음과 미안함을 전달했다. 이 이상 그와 어긋나고 싶지 않았기에.
“…….”
우두커니 서서 침묵하고 있던 레오나드가 돌연 몸을 돌려서 채이와 마주 보고 섰다. 채이 또한 무슨 말이 나와도 들어줄 생각으로 레오나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채이.”
“응.”
“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런데 대화의 포인트가 그 발언에 맞춰진 것은 조금 예상외였다. 물론 잘못한 입장인 채이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래. 그럼 방법은 딱 하나야.”
언뜻 듣기에 차가울 정도로 단정 지어 말한 레오나드가 눈을 내리떴다.
“채이가 날 좋아해주면 돼.”
겉모습만 보면 그는 평소보다 더 분위기가 저조했지만 사실 어느 때보다 감정적인 상태였다.
“……?”
다만 채이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지금도 자신은 그를 누구보다 좋아하고 있는데, 어째서 또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이런 상황이 돼도 레오나드가 자신에게 성애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채이는 오히려 다른 이유로 속상해했다.
“레오. 늘 말하지만….”
하여 채이가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주려던 때였다. 레오나드는 마치 착각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덧붙였다.
“내가 말한 ‘좋아한다’는 입술을 빨고 몸을 맞대도 이상하지 않은 관계를 의미한 거지 친아들처럼 좋아한다는 그런 건전한 의미가 아니야.”
채이가 물러설 곳이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