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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55화 (55/105)

055화

그에 채이가 조금 걱정스러운 눈치로 바깥 상황을 힐끔거렸다.

“괜찮은 거야?”

“네. 저희는 걱정할 거 없어요.”

에녹이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싱긋 웃었다. 마침 모나크 병사가 이쪽을 향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이 앞은 모나크의 영지입니다! 통행증을 제시하고 지나가려는 이유를 말하십시오.”

곧 이쪽의 기사 한 명이 마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가더니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마차 안에서는 그게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아마 미리 준비한 통행증일 것이다.

병사들은 그걸 확인하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일행을 영지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일전 레오나드와 함께 클랭커스 영지로 들어갈 때 만났던 병사들과 같은 반응이었다.

채이가 이유를 궁금해하던 차에 에녹이 슬쩍 설명해 주었다.

“모나크 백작이 시달려서 힘들었을 때 랭커스터가 많이 도와줬다고 해요. 그래서 컴베스트 대공국민들에겐 항상 우호적이라더라고요.”

“그랬구나.”

“뭐… 랭커스터 가문이 가진 힘과 영향력이 제국 내에서도 남다르다 보니, 더 잘 보이려는 것도 있겠지만요.”

컴베스트 대공국은 클랭커스와도 우호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랭커스터의 지위가 클랭커스보다 높아서, 클랭커스가 랭커스터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는 것처럼 보였다.

새삼 랭커스터가 쌓아온 힘이 얼마나 큰지를 느꼈다.

이윽고 마차는 영지 경계선을 지나 거대한 암벽을 가르는 골짜기로 들어섰다. 골짜기라곤 하지만 그 폭은 그리 좁지 않았다. 문제는 땅이 울퉁불퉁해서 마차가 엄청 흔들린다는 점이었다.

“우윽….”

창백해진 에녹이 창틀에 팔을 걸친 채 목을 내밀고 있었다. 속이 많이 울렁거리나 보다.

“에녹. 괜찮니?”

“네… 어떻게든.”

“멈춰 달라고 할까?”

“아뇨….”

채이가 에녹의 등을 조심히 쓸어주며 상태를 확인할 때였다. 갑자기 마차의 속도가 급격히 느려졌다. 하지만 아직 마차를 멈추어 달라고 말한 게 아니었기에, 에녹의 상태 때문은 아닐 터.

‘뭐지?’

채이가 그리 의문을 가지며 고개를 들 즈음이었다. 앞에서 마부의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 위험합니다! 비키세요!”

아무래도 누가 마차 행렬을 가로막고 선 모양이었다. 이미 영지 경계선도 지났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그러는 걸까? 정확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진 채이는 냉큼 창밖으로 목을 내었다. 그곳에는 기다란 장신의 사내 한 명이 정말로 우두커니 서서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아.’

아직 거리가 상당히 먼데도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사내의 백금발이 유독 눈에 띈다. 마부가 한 번 더 경고를 했음에도 사내는 요지부동이었다.

“하. 정말… 뭐 하자는 건지.”

결국 짜증을 숨기지 못한 마부는 중얼거리며 말 고삐를 당겨 속도를 좀 더 늦추었다. 이름 모를 사내가 별안간 고개를 들었다. 제 코앞까지 온 마부를 곧게 응시하는 눈은 바다처럼 짙은 푸른색이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레오나드를 꼭 닮은 푸른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

사내가 마부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아서 채이가 미간을 좁히는 그때.

이히이이잉!

마부가 갑자기 의식을 잃은 것처럼 옆으로 떨어졌다. 그 때문에 고삐가 틀어져서 놀란 말이 달음질하며 옆으로 내달렸다.

“조심…!”

“채이 님!”

말을 묶고 있던 줄이 끊어지면서 함께 기울어진 마차가 암벽 쪽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에녹의 짧은 비명이 들리고 잠깐 동안 어둠이 찾아왔다. 전부 한순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윽….”

아주 잠깐 기절을 했던 걸까. 정신을 차린 채이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어지러운 머리를 짚었다. 그러자 끈적하고 뜨뜻한 액체가 만져졌다. 그사이 어딘가 찢어진 건지 피가 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을 맞은 상황에 황당해하던 채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제 품에 쓰러져 있는 에녹은 여전히 기절한 상태인지 미동이 없었다. 크게 다친 건가 싶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에녹… 에녹!”

에녹의 어깨를 잡고 흔들던 채이는 그가 일어나지 않자, 코 밑에 손가락을 댔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그제야 안도한 채이는 우선 마차 밖으로 나가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체는 암벽을 보고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었기에 하늘을 보고 있는 문이 비교적 멀쩡하리라 생각했지만….

‘위로 나가는 건 불가능하겠군.’

마차가 전복되고 잠시 기절했었던 그사이에 다른 무언가와 부딪혔던 건지 문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저래서는 쉽게 열리지 않으리라. 하여 채이는 자기가 기대고 있는 쪽의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차체 상부가 암벽과 닿으면서 공간이 생긴 덕분인지 이쪽 문이 더 멀쩡했다.

쿵!

문짝이 떨어져 나가면서 기어 나갈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에녹이 떨어지지 않게끔 자세를 고친 채이는 아래 공간을 통하여 기어서 빠져나갔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마차를 바로 세우려는 생각이었다.

“윽….”

강하게 부딪힌 충격 탓인지 온몸이 삐거덕대는 것 같다. 신음을 삼킨 채이가 통증을 견디며 마차 밖으로 몸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보니, 뒤를 잇던 마차들도 하나같이 엉키고 전복되어 멀쩡한 게 없었다.

더군다나 기사들 중 몇몇은 마차 밖으로 나와 있었음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쓰러진 채로 미동이 없었다.

‘…뭐지?’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문득 마차 행렬을 가로막았던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도 잠시.

“네가 그 ‘베타’인가 보군.”

발소리가 들린 직후 채이의 눈앞으로 누군가의 검은 신발코가 나타났다. 조용히 고개를 드니 푸른 눈동자를 가진 백금발의 사내가 채이를 내립떠보고 있었다.

“…….”

마치 채이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 채이는 이 상황이 단순한 불운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가 아닌 ‘의도된’ 상황임을 직감했다.

“무슨 속셈이지?”

채이의 침착한 물음에 사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겁을 먹어 덜덜 떨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무표정으로 감정을 감추었다. 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채이의 당돌한 물음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채이는 그 소갈머리 없는 사내에게서 한참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 레오나드가 떠오르는 이유는.

‘…닮았구나.’

그래. 레오나드와 닮았다. 그래서 계속 겹쳐 보이는 거다. 그에 채이가 의아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사내가 무겁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기절해라.”

채이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대관절 누가 기절하란다고 얌전히 기절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현듯 짙게 깔리는 페로몬의 낌새가 느껴졌다. 순식간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직후 채이는 마치 증발하는 것처럼 의식이 흐려지다가 정말 기절해버렸다.

“…….”

기절해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사내가 채이를 어깨에 둘러업었다. 그대로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깐… 당신 뭐야. 채이 님을 어쩌려는 거지?”

뒤늦게 정신을 차려 마차 밑으로 기어 나온 에녹이었다. 에녹은 채이를 둘러업은 채 어디론가 가려고 하는 사내를 보자마자 독기가 느껴질 만큼 날카롭게 눈을 치떴다. 여차하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채이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

멈춰 서서 돌아보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에녹은 낯설지 않은 얼굴에 경악했다.

“아. 그래. 잊을 뻔했네.”

중얼거린 사내가 에녹 쪽으로 다가갔다. 에녹은 자신에게 손을 뻗는 사내의 이름을 달싹였으나… 이마 끝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다시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며 기절했다.

“위치는 알려뒀으니까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면 알아서 잘 찾아오도록 해.”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는 말을 중얼거린 사내는 다시 채이를 둘러업었다.

그리곤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

문득 부스럭대는 기척에 눈을 뜬 채이가 몽롱하게 상황을 파악하다 몸을 일으켰다. 꿈 한 점 꾸지 않고 정말 푹 잠들었다 일어난 것 같았다.

‘…기절했던 건가?’

어처구니없게도 기절하라 했다고 정말 기절해서 강제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머리를 한차례 손등으로 짚어 본 채이는 그사이 축축했던 피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누가 피를 닦고 소독까지 해준 상태였다.

“…….”

채이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습하고 곰팡내가 나는 걸 보면 빛이 잘 들지 않고 사람도 자주 드나들지 않는… ‘창고 같은’ 곳인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그러자 구석진 자리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건축용 나무와 돌이 보였다. 나갈 곳을 찾아볼까 싶어서 소파 아래로 다리를 내리는데 그 기척을 감지한 건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나.”

흠칫 움직임을 멈춘 채이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짙은 그늘 탓에,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보아도 여전히 어두운 공간. 그곳에 형형히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의 사내가 돌 더미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

그래. 왜 안 보이나 싶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납치해온 주제에 상처까지 치료해준 납치범 장본인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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