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화
“이봐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때 옆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더니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채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웬 근육질의 아저씨가 한 명 서 있었다.
“신참인가?”
그는 제법 건장한 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중얼거렸다.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신입이 생겼나… 하는 의문이었다. 반면 채이는 무어라 변명을 하면 좋을지 막막해져서 입만 달싹였다. 납치당해 끌려왔다고 말하면 분위기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심각해질 것 같았다.
“음. 그… 에일런의 친구인데요.”
그래서 대충 변명을 보태 둘러댔다.
변명을 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을 터인데 참으로 기괴한 상황이었다.
“아. 에일런의?”
더 웃긴 점은 아저씨가 에일런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소가 익숙한 듯 행동하더니 에일런은 진짜 자신이 자주 다니는 장소로 채이를 납치해온 거였다. 채이가 의사 표현을 못 하는 애도 아니고 잘못하면 들켜서 무언갈 해보지도 못한 채 매도당할 뿐일 텐데… 평범한 납치범의 행보는 아니었다.
“거기 서서 뭐 해.”
때마침 변명을 해야 할 납치범이 나타났다. 푸짐한 고기와 큰 빵 두 개, 계란 두 개, 잼 통과 우유 한 컵이 올려진 식판을 든 채로. 에일런이 눈을 가늘게 뜨자 이름 모를 목수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채이를 가리켰다.
“너한테도 친구가 있었다니 의외잖아! 너무한 거 아니냐? 같이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우리한테도 소개 좀 시켜주지. 왜 꼭꼭 숨겨 놓고 있었어?”
“…친구라니. 누가요.”
“응? 너랑 친구라고 하던데?”
그에 채이를 힐끔 쳐다본 에일런은 다시 아저씨를 흘겨보면서 까칠하게 대꾸했다.
“신경 끄세요.”
저런 식이면 화를 내거나 상처를 받을 만도 한데 평소에도 에일런이 곧잘 저랬는지 아저씨는 오히려 채이의 귀에 대고 장난스럽게 시시덕거렸다.
“저놈 저렇게 틱틱대도 사실 나쁜 놈은 아니거든. 은근 정도 많고. 그렇지?”
맞장구를 쳐야 하나, 고민이 된 채이가 멀뚱멀뚱 쳐다보자 에일런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어이쿠, 소리를 낸 아저씨도 이내 손을 휘적이고는 돌아섰다.
“친구 소개는 나중에 받아야겠구먼. 밥 먹을 거면 괜히 먼지 날리는 창고에서 밀회하지 말고 기숙사 가서 먹어라.”
그렇게 아저씨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에일런은 불편한 얼굴로 고민하더니 결국 채이를 흘겨보곤 기숙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채이도 말없이 에일런의 뒤를 따라갔다. 도착한 기숙사에는 에일런의 명패가 걸려 있었다. 아예 여기가 그의 집인 모양이었다.
“대충 먹어.”
대충 먹기에는 양이 엄청난 음식을 에일런이 소파 앞, 준비된 협탁에 올려주었다. 친절하게도 포크까지 준비해서 말이다. 귀족가 식사에 비해 소박하긴 해도 제법 먹음직스러운 상차림이지 않나. 썩 만족한 채이가 빵을 잼에 찍으며 말했다.
“그래. 아까 넌 레오랑 화해하고 싶은 것도 아니라고 말했었지… 솔직히 난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그에 에일런도 채이 맞은편에 간이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턱을 괴었다. 잼 발라둔 빵을 우물우물 맛있게 씹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포크로 고기 한 점을 찍어 가는 채이를 보니, 복잡미묘하다. 진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려는데도 전혀 진지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제 스무고개는 그만하고 진짜 목적을 말해. 넌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채이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다.
에일런은 작게 한숨을 삼켰다.
“레오나드는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을 거두어 키워준 네가 무엇보다 소중할 거야. 승계 싸움할 적에 본 반응만 떠올려 봐도 알 수 있지.”
“…….”
“그런 사람을 건드렸으니 레오나드는 지금쯤 얼마나 지독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영지를 가로질러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니 마음 좀 졸이겠지… 꼴좋아.”
독백하듯이 중얼거리던 에일런이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채이가 입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납치쇼의 목적은 레오한테 엿을 먹이는 거다? 레오가 고통받기를 원해서?”
“…….”
“정말 그래? 너는 레오가 미워?”
“그래. 증오해.”
에일런이 제법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식사를 잠시 멈춘 채이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가 보기에 넌 레오를 정말 증오하는 게 아니야. 정말 네가 레오를 증오한 나머지 고통받길 원해서 나를 납치했던 거라면 진즉에 목부터 잘라서 랭커스터 앞으로 보냈어야지.”
상대가 소중히 하는 존재를 죽여서 보내는 것만큼 잔인하면서 상대를 영원한 절망 속에 빠트릴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 직접 겪어 보진 않았지만 간접적인 경험은 수차례 했었기에 알았다. 그런데 에일런은 무척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무슨 그런 끔찍한….”
마치 그런 과격한 방법은 상상도 안 해봤다는 것처럼.
그러니 도리어 채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래서야 누가 복수를 위해 납치한 가해자고 누가 납치당한 피해자인지 알 수 없다. 생각보다도 순수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채이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굴기만 하다가는 오히려 네가 화를 입고 죽게 될 거야. 지금이라도 아무 일 없었던 걸로 해줄 테니까 레오랑 대화를….”
“죽이고 싶으면 죽이라고 해.”
순간 멈칫한 채이는 에일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일런은 정말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에일런이 말을 이었다.
“승계 싸움에서 밀리고 가문에서 퇴출당했을 때… 레오나드는 나를 안 죽이는 대신 세 가지 조건을 붙였어.”
갑작스러운 서두라고 생각했지만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기에 채이는 잠자코 그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일푼으로 나갈 것. 나가서 신분을 이용하지 않을 것. 다신 컴베스트 땅을 밟지 않을 것.”
“…….”
“그때는 자비라고 생각했지만 녀석은 그냥 자기가 서민가에서 겪었던 고통을 내가 그대로 겪길 바랐던 거야.”
“…….”
“그 덕분에 굴욕을 많이 당했어. 죽고 싶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야. 근데 스스로 죽는 건 무섭더라고. 그냥 그때 죽여줬더라면…. 지금이야 여기 정착하면서 좀 나아졌지만 어찌 됐든 간에 레오나드의 복수는 성공한 셈이지.”
이야기를 끝낸 에일런이 픽 웃음을 뱉었다. 채이는 잠시 침묵했다. 비아냥 섞인 그 중얼거림에서 문득 확신에 가까운 의문 하나가 생겼다.
“너는… 죽고 싶은 건가?”
어쩌면 그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어떤 감정들을 떨쳐낸 뒤 편안해지기 위해, 사실은 죽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그 괴로운 감정의 정체가 처음엔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어서 흘러나온 에일런의 솔직한 속내를 듣고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모든 일이 없었더라면, 가문의 악습에 반항했다면 지금쯤 뭔가 달랐을까. 뭐, 물어봤자 네가 알 리는 없나.”
정확히 그들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후회하는구나.”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걸.
후회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죽음을 꿈꾸는 한편 레오나드에게 분풀이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이런 충동적인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럴지도. 하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어. 레오나드랑은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졌거든.”
안면을 굳힌 에일런이 이내 자조하듯 웃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차가운 얼굴 뒤로 감정을 감춘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어쨌든, 나랑 레오나드는 관계를 회복할 만한 관계가 아니야. 괜히 허튼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아직 안 늦었어.”
잠자코 듣고 있던 채이가 단호하게 부정하자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침묵한 에일런이 채이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에일런은 어깨만 으쓱이고는 기숙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번에도 문은 걸어 잠그지 않은 채.
“…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식사를 끝낸 채이는 멋대로 화장실을 빌려 쓰고 멋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에일런은 이후에도 한참 동안 오지 않았기에 심심했던 채이는 멋대로 책장을 뒤져서 읽을 만한 책 하나를 골랐다.
문득 남의 집에서 이렇게 행동해도 되나…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지만 멋대로 행동하길 원하지 않았다면 묶어두든가 했어야지 하면서 금방 자기합리화했다. 물론 에일런이 정말 채이를 묶어두었다고 한들 너무 심심한 나머지 스스로 풀어버렸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채이는 꼭 제집 같은 편안함을 만끽하며 혼자 놀다가 스르륵 잠들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기숙사로 돌아온 에일런은 멋대로 침대를 차지한 채 자고 있는 채이를 보고, 어이없어했다.
“허.”
그가 일부러 구속하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납치한 사람이 오히려 민망해질 만큼 태평한 모습이었다.
‘이 녀석은 위기감이란 게 없나.’
만약 본인보다 더한 악질에게 잡혔으면 어쩔 뻔했냐며 납치범인 에일런의 걱정까지 이끌어 내고 말았다.
물론 채이의 태평함은 어디에 던져 놔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일런이 만일 채이를 상대로 처음부터 거칠게 나왔다면 지금쯤 역으로 당해 돌돌 묶인 건 에일런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마물을 사냥하는 일도 없고 마을에서 지낼 때보다 운동량도 줄어서 근육이 조금 빠지고 감각이 둔해진 상태라 해도 말이다. 전생부터 수십 년간 쌓아 온 노련함과 경험의 수준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 엄연히 말하면 힘을 가진 자의 여유라고 볼 수 있으리라. 다행스럽게도 에일런은 그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은 소파에서 자야겠군.’
속으로 한숨을 삼킨 에일런은 투덜거리며 장신의 몸을 소파에 구겨 넣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평화는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