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그러나 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턱이 없는 에녹은 오히려 밝은 얼굴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신호인 건 분명해요! 보통, 상대가 접대해야 할 귀빈이 아닌데도 사적인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일은 드물거든요.”
“…음.”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좀 안심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방심하지는 않기로 하자. 속으로 그리 다짐한 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가겠다고 전해줘.”
“네!”
에녹이 다시 총총 메인 하우스로 돌아갔다.
약속한 저녁 시간이 찾아오고 레오나드가 마중을 나왔다. 델리온에게 데리고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였다. 채이는 그와 함께 걸으며 물었다.
“혹시 나 왜 부르는 거래?”
“글쎄. 나도 이유는 모르겠어.”
난색을 표한 채 대답한 레오나드가 손가락으로 채이의 뺨을 쓸어주고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별일 아닐 테니.”
만약 ‘별일’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레오나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상 채이에게 해악을 끼치지는 못할 터였다.
“어서 오십시오.”
로비로 들어서자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집사장이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채이도 그를 연회장에서 몇 번인가 봤지만 이리 가까이서 마주하는 건 처음이다. 그는 채이와 눈이 마주치자 자애로워 보이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두 분. 이쪽으로.”
레오나드와 함께 앞장서는 집사장을 뒤따라간 채이는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쏟아지는 시선들을 한 몸에 느꼈다. 먼저 와서 담소를 나누며 앉아 있던 레오나드의 형제들이었다. 채이가 어색할까 봐 배려한 것인지는 몰라도 아직 랭커스터 부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때 왔네.”
에일런이 제일 먼저 채이와 레오나드를 반겨주었다. 오스카는 가벼이 고개만 까닥여 인사했고 할러드와 바이올렛은 레오나드를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전부 아는 얼굴이었는지라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채이였다.
“편히 앉으십시오.”
담담한 태도로 앉아 있던 오스카가 레오나드와 채이를 위한 자리인 듯 딱 비어 있는 자리로 손을 내밀었다. 그 자리는 ‘가주와 가주 부인이 앉는 상석’과 무척 가까웠다.
상석과 가까운 자리는 대개 경쟁이 치열한 귀빈석이기에 그 자체로 대우를 받는 자리다. 하지만 걸리는 구석이 있던 채이는 상석과 가까운 자리가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만큼 델리온하고 베넷을 가까이서 봐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거기에 한술을 더 떠….
“채이. 이쪽에 앉아.”
레오나드가 비어 있었던 두 자리 중 상석과 더 가까운 자리에 채이를 앉혔다. 그랬더니 채이는 상석 바로 옆자리에, 레오나드는 채이와 형제들 사이에 앉은 셈이 되었다. 다만 그의 ‘의도’는 채이를 제 부모와 가까이 앉히기 위함이 아니었다. 바로 옆자리에 있는 에일런과 채이가 가까이 앉지 못하게끔 하려니 남은 게 그 선택지였을 뿐이니까.
물론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채이로서는 그게 그거였지만 말이다.
‘밥 먹다가 체하겠네.’
그리 속으로 한숨을 삼킨 채이가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식사가 준비되기에 앞서 미리 올려진 전채 요리를 몇 가지 식탁 앞으로 가져왔다.
‘다들 먹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본디 가문의 주인들이 상석에 앉고서 식사가 시작되는 것이 규칙이었지만 가족들 간의 식사라 그런지 비교적 자유로웠다.
채이는 아직 따뜻한 수프에 빵을 찍어 먹기 시작했다. 체하겠느니 뭐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치고 전채 요리를 향한 손놀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채이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오스카는 잘 먹는 채이의 모습을 지켜보다 말을 걸었다.
“채이 공은 혹시 못 먹는 음식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주방장에게 미리 말해두려는데요.”
“아. 가리는 건 딱히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뭐든 잘 먹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혹 달리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꺼리지 말고 말해주십시오.”
“예…. 깊은 배려 감사합니다.”
그리 답하긴 했으나 채이는 속으로 의문을 가졌다.
어쩐지 그녀에게서,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다정하고 짙어진 배려심을 느낀 탓이었다. 마치 가족을 대하는 느낌? 하지만 그녀와는 이후 별다른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채이를 대하는 태도가 바뀔 만한 계기도 없었다. 그렇기에 의아한 것이었다.
물론, 채이만 모르고 있을 뿐 계기는 있었다.
사실 채이와 레오나드가 막 도착하기 전까지 오스카를 포함한 레오나드의 형제들은 갑작스레 열린 만찬의 속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 유일하게 눈치를 채고 있던 에일런이 미리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고… 그걸 계기로 형제들 모두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어떤 사람을 곁에 붙여 주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레오나드가 흔쾌히 정한 상대. 거기에 두 사람이 처음부터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도 할러드 빼고는 모두가 알고 있는 상태였다.
채이가 레오나드의 정실이 되는 것은 거의 확실해진 상황이니 그만큼 유해지는 건 당연했다. ‘채이라면’ 레오나드의 곁을 내어 주어도 괜찮다고 모두가 그리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에일런이 상체를 앞으로 숙여 레오나드에게 가려진 채이 쪽을 건너보았다. 그에 레오나드가 눈을 내리떴다. 딱 봐도 불만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채이를 공유하고 싶지 않은데 오늘따라 형제들이 채이에게 관심을 보이니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본인 마음대로 투정을 부렸다간 채이에게 따끔한 잔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하니 참는 레오나드였다.
“좋아하는 거….”
채이가 좋아하는 것 중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것을 추리기 위해 고심하다가 말했다.
“디저트? 특히 담백한 종류.”
뭐든 잘 먹지만 최근에는 확실히 디저트를 자주 먹었고 또한 좋아했다. 원래는 먹지 않았는데, 입맛이 많이 바뀌었다. 유독 이 세계의 디저트가 수준 높은 탓도 있고 자기 관리를 위해서 먹지 않다가 이제서야 다채로운 디저트의 세계에 눈이 뜨인 탓도 있으리라. 물론 적당히 조절하면서 먹는 중이었다. 잘못했다간, 기껏 만들어둔 신체 밸런스가 무너져버릴 수도 있으니까.
“담백한 종류라면 스콘 같은?”
“어, 맞아. 그런 거.”
“그래? 흐음. 알겠어.”
의미심장한 투로 말을 흘린 에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젠가 선물이 필요한 때가 오면, 그때 사 들고 갈 것들을 머리에 착착 새기는 중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채이는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제때 와 있었군.”
그때 식당 입구에 델리온과 베넷이 나타났다. 두 사람이 상석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도 본격적으로 메인 요리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편히 식사 들지.”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떨어진 델리온의 한마디 후 여기저기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채이는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델리온의 얼굴에 약간은 긴장했다. 식사를 시작한 몇 분간은 모두가 조용하게 식사만 했기에 더욱 그랬다.
‘뭘까.’
머릿속에 물음표를 하나 띄워 놓고 있던 채이가 고기 한 점을 입에 쏙 넣었을 때였다.
“채이.”
입가를 한차례 닦은 델리온이 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 채이도 슬쩍 돌아보는데 그가 갑자기 폭탄을 던졌다.
“자네는 좋아하는 이가 있나?”
정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역시 올 게 온 건가.’
준비된 돈뭉치가 없는 것을 보면 저 와인 잔이 날아오려고 그러는 걸까? 아니면 저 포크를 집어 던지려고? 그렇게 채이가 일어나지 않을 상황에 혼자 이입하고 있는 동안….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었나?’
델리온은 자신의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었던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했다. 겉으로 드러난 표정은 평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나 사실 자신의 서툰 의사소통 능력에 누구보다 쩔쩔매고 있었다.
“있죠.”
그때 레오나드가 채이 대신 대답하며 채이의 손등을 가벼이 포개어 잡았다. 레오나드는 델리온이 그런 애매한 질문을 던진 이유가 무엇인지 이미 눈치채고 있기에 스스럼이 없었다.
“저랑 각인할 겁니다.”
반면 채이는 느닷없는 공개 선언이 되어버린 상황에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모두가 생각도 못 한 일이라며 충격의 물결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채이의 예상과 다르게 델리온과 베넷은 물론 레오나드의 형제들까지도 모두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음. 언제 각인하기로 정했지?”
“내 러트일에.”
“그런가. 적절한 시기로구나.”
“그럼 그때 결혼식도 올려요?”
오스카와 주고받는 담담한 대화도 그렇고 결혼식부터 꺼내는 바이올렛도 그렇고…. 에일런은 아예 알고 있었다는 양 대수롭지 않게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할러드도 ‘어른들의 대화’에 호기심은 가지는 것 같았지만 레오나드와의 관계에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채이는… 예상과 너무 다른 덤덤한 분위기에 당황스러웠다.
거기에 정점을 찍은 건 델리온의 한마디였다.
“잘되었군.”
그걸로 대화는 끝이 났다.
진짜다.
반응이 너무 미지근하다 보니 못마땅해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그런 것치곤 순순히 받아들이는 느낌이 더 강했기 때문에, 역시 이상했다.
‘이게… 잘됐다로 넘어가 버려도 될 정도로 가벼운 문제였던가… 정말 이게 맞나?’
채이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그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식사 자리는 그렇게 얼렁뚱땅 지나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