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그들은 채이를 귀여운 조카 보듯 하며 호감과 흥미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얘야. 나와 혼약하지 않겠니?”
그 호감과 흥미가 이상한 쪽으로 튀고 있는 것 같다만.
“아니. 나와 혼약하자꾸나.”
“쟤보단 내가 더 낫지 않니?”
엘프들이 채이의 뺨이나 손을 슬쩍 건드리며 유혹하듯 굴었다. 자칫 엘프들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판단이 흐려질지도 모르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 하면 또 레오나드이지 않던가. 레오나드의 비현실적인 외모에 이미 적응한 채이는 임자 있는 몸으로서 단호하게 지조를 지켰다. 한때는 가족 같은 사이였다 해도 이미 그를 인생의 반려자로 받아들였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게 아닌 이상, 다른 이에게 섣불리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채이의 생각이었다.
“이런. 엘프는 취향이 아니니?”
“이미 제 옆엔 사람이 있어요.”
“꼭 한 명과 사귀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니? 인간들은 마음에 드는 이가 많으면 여럿을 거느리기도 한다던데.”
“우린 널 공유해도 좋단다.”
“제가 공유 당하기 싫습니다.”
끝까지 단호하게 굴자 결국 엘프들은 목표를 바꾸어 자기가 채이의 형, 누나, 삼촌, 이모가 되겠다느니 하면서 묘한 주제로 다투기 시작했다.
“뭐? 채이의 아들은 나야!”
지나가다 그 다툼을 본 실비에트가 채이의 아들은 자기라면서 싸움에 동참했다.
“호호홍. 그럼 채이 아가의 절친은 나인 걸로 하지! 채이 아가에겐 고마운 일이 참 많아.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나를 부르려무나.”
지나가다 신이 난 쿠쿠프는 자신이 바로 채이의 절친이라며 분위기에 올라탔다.
쓰잘머리 없는 논쟁이 과열되니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이 세상에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세 종족이 나약한 인간 하나를 두고 어린아이처럼 떠들고 있으니, 참 볼 만했다. 정작 채이는 별생각 없이 음료만 쪼로록 마시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제 슬슬 씻고 자야겠다.’
자기들끼리 과열되어버린 상황에서 쏙 빠져나간 채이는 드워프에게 욕조를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내어 시원하게 싹싹 씻고 나왔다. 어느새 떠드는 소리로 시끄럽던 바깥은 한산해져 있었다. 흥에 겨워 몸을 움직이던 술꾼들이 대부분 잠이 든 탓이었다.
땀에 젖어 떠들고 있던 기사들과 에녹 그리고 레오나드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채이가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마침 건너편 집에서 걸어 나오는 레오나드가 보였다. 머리가 물기로 촉촉한 걸 보니 씻으러 들어갔다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레오.”
채이의 부름에 돌아본 그가 곧바로 다가왔다. 레오나드의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이 채이의 뺨을 감쌌다.
“채이, 씻으러 갔었구나. 안 보이는 것 같아서 어디 갔나 했어. 이제 잘 거야?”
“그래야지. 내일 또 일찍 일어나서 움직일 거라고 하니까 피곤하지 않으려면.”
델리온이 대리에게 컴베스트와 가문을 맡기고 자리를 비운 지도 제법 시간이 흐른 상태다. 슬슬 걱정이 되어 발걸음을 서두르고자 하는 건 당연했다. 레오나드가 채이의 손을 잡아끌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같이 자러 가자.”
“아무 집이나 써도 되려나?”
“쿠쿠프 집이면 되지 않을까.”
채이는 그와 대화를 나누며 쿠쿠프의 집으로 향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밖에서 먹고 마시고 떠들다 그대로 잠들었고 일부는 각자 다른 집의 욕실을 빌려 씻고 있어서인지 쿠쿠프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기회를 놓칠 레오나드가 아니다. 고개를 옆으로 슬쩍 숙인 레오나드는 채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때아닌 스킨십에 놀란 채이가 토끼 눈을 뜨고 돌아보았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키스해도 돼?”
“…그럼 저기 방에 들어가자.”
역시나. 레오나드가 한껏 들뜨는 마음을 숨기고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이는 언뜻 목석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욕구가 강하고 솔직했다. 쉽게 ‘선’을 넘어주지 않는 건 아쉽지만… 어쨌든. 그 색다른 이면들은 레오나드를 더욱 자극하곤 했다.
한편 샘물 앞에서 키스했던 일이 떠올라 긴장한 채이는 먼저 이동하는 레오나드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 선뜻 돌아보지 못한 채 서 있자 등 뒤로 레오나드가 다가왔다.
채이의 새빨간 귀를 본 레오나드는 그의 등 뒤에서 허리를 감아 안았다. 채이, 하며 귀에 대고 이름을 부르니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욕망을 참기 힘들었다. 레오나드는 채이의 목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영악한 투정을 부렸다.
“채이가 입 맞춰 줘.”
그에 한차례 입술을 감쳐문 채이가 슬쩍 몸을 돌리고 섰다. 레오나드의 뺨을 감싼 채이는 발그스름한 얼굴로 레오나드의 눈을 마주하다가 입술을 천천히 겹쳤다. 그 살덩이를 약하게 깨문 레오나드가 기꺼이 열린 입 안쪽을 탐했다. 몇 번인가 먼저 키스하기를 시도한 적이 있음에도 여전히 스킨십이 서툴러 레오나드가 이끄는 대로 휘둘리는 채이였다.
“음… 읏.”
곧 터질 것처럼 심장이 뛰어대더니 숨도 함께 거칠어진다. 허리를 더듬으면서 무심하게 올라오는 손길이 너무 뜨거워 체내로 그 온도가 옮아오는 것만 같다. 눅눅하게 젖은 입술을 한 번 훑고 고개를 기울인 레오나드가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채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고개를 떨군 채이는 빈틈없이 들러붙은 레오나드의 팔을 붙들어 잡았다.
“자, 잠시….”
흥분한 탓에 더욱 짙어진 레오나드의 페로몬이 채이를 휘감자 아랫배가 간질거리며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역시 키스에서 끝나지 않고 더듬더듬 이어지는 욕망 어린 손길은 이전보다 느리고 검질겨서 오히려 더 예민해진 몸이 후끈거렸다.
채이도 남자였으므로, 그러한 흥분의 결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당혹스러운 건 조금 빈틈을 두고 아래를 내려다본 레오나드가 그 결과물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뚫어져라 봐.”
“내가 도와줄까?”
그에 힐끔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레오나드의 바지춤을 훔쳐본 채이가 순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슬그머니 몸을 옆으로 돌렸다.
“아니야. 혼자 할게.”
상상해 보니까 아직은 부끄러움이 더 커서 선뜻 그러자고 답할 수 없었던 탓이다. 레오나드의 손에 의해 하얀 결실을 맺고, 터지는 신음을 참지 못한 채 들썩일 걸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채이 본인이 한참 연장자인 만큼 조금 더 의젓하게 받아주고 싶은데 이 어린놈이 워낙 능숙하여 참 쉽지 않았다.
“다, 다녀온다.”
채이가 후다닥 나가버렸다. 결국 레오나드도 혼자서 쌓인 걸 풀어야 했다.
다시 차분해진 채 레오나드의 얼굴을 마주한 채이는 상당히 머쓱해했지만 레오나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채이를 품에 끌어안고 잠들기까지 했다. 채이도 그런 모습에 안정감을 얻어 금방 부끄러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
다음 날 일행들은 이른 아침부터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실비에트는 채이와 인사를 한 후 먼저 떠났고 엘프들이 떠날 때는 드워프들과 채이의 일행이 모두 모여 배웅해 주었다. 그들까지 보내고 나면 채이와 일행들도 이제 랭커스터 저택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채이. 다음에 또 보자꾸나.”
“또 볼 생각이었습니까?”
“후후 당연하지. 가끔 찾아가마.”
맹랑한 질문에 웃은 엘프가 채이의 턱을 쓸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클레망이 부럽다며 자기도 엘프들의 노예가 되길 바란다는 둥 헛소리를 했으나 무시당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었다.
“아… 그리고 죽은 엘프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그건 심려치 말거라. 그들은 충분히 인정할 만한 강자에게 굴복했으니 떳떳할 것이며 동시에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물론, 너희가 준다는 보상은 사양 않고 받아 갈 거지만 말이야.”
“보상이 뭔데요?”
문득 호기심이 생긴 채이가 델리온을 돌아보았다. 델리온과 시선이 마주쳤으나 그에 대한 대답은 엘프들이 직접 해주었다.
“‘페로몬 석’에 쓰일 페로몬을 공급받기로 했다. 너희가 흔히 발현자라 부르는 존재들의 페로몬 일부를 돌에 담아서 오랫동안 풍기도록 하는 물건이지.”
“페로몬 석이란 게 있어요?”
“그래. 페로몬 석은 우리 엘프들이 세계수 나무 아래에 있는 자갈을 이용해서 만드는 일종의 사치품이라서 말이지. 너는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아… 향수처럼 쓰는 그런 용도인가? 페로몬 석이라는 게 있다니. 그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그럼 정말 가보도록 하지. 페로몬 석은 조만간 완성이 될 즈음 수거하러 가겠다.”
“알겠습니다.”
델리온이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렇게 엘프들이 모습을 감춘 이후 델리온은 일행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앞서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양호한 상황이라 그런지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이곳으로 출발했던 당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전부 채이가 용기를 내준 덕분이리라. 마지막으로 채이에게 시선을 멈춘 델리온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말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간다.”
“예!”
기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렇게 채이 일행은 드워프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떠났고…. 중간에 다시 만난 수인들이 드워프를 도와준 답례로 말들을 공짜로 빌려주겠다 한 덕에 거기서부터 저택까진 안전하고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