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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76화 (76/105)

076화

저택으로 무사히 도착하여, 셀리언과 클레망까지 배웅해준 그다음 날이었다. 축복의 땅 마을의 드워프들은 덕분에 세계수의 뿌리를 이용한 작업을 순조롭게 이어가고 있다며 소식을 알렸다. 세계수 뿌리의 활력 이용량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악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공급에 신경 쓰겠다고도.

이후부턴 채이가 깊이 관여할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채이 님. 페르난데 공자님과 벤냑스 공자님에게서 편지가 왔었대요. 자리를 비우고 있는 동안 보내셨나 봐요.”

에녹이 서기관에게 전달받은 편지 몇 통을 들고 와 채이에게 건네주었다. 오랜만의 산책 후 분수 공원에서 쉬고 있었던 채이는 반가운 이야기에 건네받은 편지를 곧바로 열어 보았다. 첫 번째 편지는 페르난데가 보낸 것이었다.

『채이에게.

페르난데다.

축복의 땅과 관련된 소식을 들었는데 엘프들이랑 한차례 교전이 있었다면서?

거기에 너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이유는 모르겠는데 베타 한 명이 같이 가는 것 같다’는. 너 맞지? 설마 다치거나 한 건 아니기를 바라. 그랬다가는 레오나드 그 녀석이 가만있지 않았을 거 같긴 하지만… 넌 좀 무모한 면이 있잖아. 걱정 끼치지 말라고.

조만간 찾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갈 거야. 여긴 역시 끔찍해.

어디 고장 났는지 지치지도 않고 내 앞에서 허리를 접어대는 놈들보단 틈만 나면 지랄하는 레오나드가 훨씬 낫다니까. 아무튼. 내가 너 다시 찾아가기 전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어라.』

격식 없고 투박한 글이지만 나름대로 걱정해주는 게 느껴지는 글이었던지라, 슬쩍 웃음이 났다. 채이는 편지를 고이 접어 두고 두 번째 편지를 펼쳤다. 그건 벤냑스에게서 온 편지였다.

『채이 님에게.

채이 님. 그간 평온하셨나요? 병문안을 와 주셨던 그날 이후, 못 뵌 지도 오래된 듯해서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채이 님이 무척이나 보고 싶지만 당분간은 더 집에 머물러야 해서, 뵙지 못할 것 같아요.

랭커스터 가의 소식도 전해 들었어요. 엘프들과의 교전에 대표하여 참가했다더군요. 채이 님은 괜찮으신 거죠? 부디 존체 보존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벤냑스 코네러 보냄.』

벤냑스도 다정하게 걱정을 해주고 있다. 이렇게 두 편지의 내용을 읽어 보니 편지는 일행이 저택으로 귀환하기 전에 쓰인 것으로 보였다. 지금쯤이면 무사히 귀환했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테니 걱정해준 두 사람도 안심시킬 수 있으리라.

“…….”

문득 벤냑스의 편지를 보다 레오나드와의 관계가 떠오른 채이는 상념에 잠겼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에게 큰 관심이 없었고 둘을 이어주려던 노력은 실패했지만 그렇다 한들 채이는 그에게 가진 약간의 미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이 레오나드를 빼앗아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쉽게 떨쳐지지 않아서였다.

“채이 님? 왜 그러세요?”

곁을 지키고 있던 에녹이 어딘가 기분이 저조한 듯한 채이를 보고서 물었다. 혹시 두 사람이 보낸 편지에 이상한 내용이라도 적혀 있었나 싶어서 걱정이었다. 다행히 채이는 금방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그 대답을 끝으로 편지를 접어서 주머니에 고이 넣어둔다. 그렇다고 하니 에녹으로서도 더 캐물어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메인 하우스가 있는 방향에서 걸어 내려오는 레오나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정면으로 서 있던 에녹이 먼저 그를 발견했고 채이도 뒤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레오. 왔구나.”

“응. 여기 나와 있었네.”

다가온 레오나드는 채이의 두 뺨에 한 번씩 쪽쪽 입을 맞추었다. 평범한 인사법 같기도 한 스킨십이었기에 채이도 그 정도는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식사 안 했으면 같이 먹을까.”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그래, 나 아직 안 먹었어. 점심 먹으러 식당 가자.”

채이가 벤치에서 일어나자 레오나드가 당연하다는 듯 채이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앞서 걷는 동안 에녹은 흐뭇한 얼굴로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시간 좀 비나 보네. 돌아오고 나서 쭉 바쁜 거 같더니. 어제도 잠깐 얼굴 비추고 돌아갔잖아.”

“응. 내가 해야 하는 건 거의 다 끝냈어. 나보다는… 컴베스트 공작이 죽어 나가고 있을 거야. 현 가주는 아직 그 사람이니까.”

하긴. 레오나드는 아직 후계자로서 보조하는 정도의 위치에 있었더랬다. 델리온은 랭커스터의 가주이자 컴베스트 공국의 군주이기도 하니, 얼마나 신경 쓸 게 많을지 채이로선 짐작할 수 없었다. 앞으로 레오나드가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니 걱정스럽기도 했다.

물론 레오나드는 뭐든 척척 잘 해내는 아이니까 시간과 업무에 쫓기며 고통을 받진 않을 거 같지만 말이다.

“어서 오세요, 채이 님! 오랜만에 오늘은 레오나드 공자님도 함께 식사하러 오셨군요.”

식당에 도착하자 일찍이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주방장, 골리가 두 사람을 환하게 맞이했다. 웬만하면 식사를 거르지 않는 채이라서 자주 만나다 보니 주방장과도 제법 친해진 상태였다.

“골리.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고 있었어요?”

“아휴, 그럼요. 채이 님이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면서요. 오늘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준비했어요. 나중에 맛보세요.”

“고마워요.”

잠시 후 식탁 위에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오늘도 언제나 그랬듯이 골리의 음식 솜씨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하여 그 솜씨를 칭찬하니 골리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간다. 후식으로 준비되어 있던 수제 아이스크림도 사르르 녹아서 입 안이 시원하고 달았다.

“맛있어?”

“응. 너도 먹어.”

“난 괜찮아.”

레오나드는 채이의 입 주변에 살짝 묻은 아이스크림을 엄지로 훑어 닦아냈다. 그걸 혀로 할짝이니 왠지 모르게 낯이 간지러워진 채이가 붉어진 얼굴을 뒤로 내뺐다. 저보다 한참 어린 레오나드의 앞에서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인 듯하여 순간 부끄럽기도 했다.

“안 닦아줘도 되는데. 고마워.”

“고마우면 보상 줘.”

레오나드가 자기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예전 같으면 입술과 뽀뽀를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일이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뽀뽀해 달라는 요구임을 모를 수 없었고 당연히 이러한 수작질에 면역력이 없던 채이의 얼굴은 더 활활 타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뻔뻔한 얼굴로 요구하는 레오나드와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너… 진짜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워 오는 거니. 솔직하게 말해 봐. 너 이전에도 다른 사람이랑 연애해본 적 있지?”

“있다고 하면 질투해줄 거야?”

레오나드가 턱을 괴고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에 채이가 눈을 깜박였다. 질투가 생겨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그렇다고 대답해서 맞장구를 쳐야 하는 걸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그를 빤히 쳐다보던 레오나드가 작게 웃고 말했다.

“채이만 좋아한 지 십 년은 됐을걸. 나한테는 채이가 처음이고, 마지막일 거야.”

“…십 년? 그렇게 오래됐다고?”

채이가 레오나드의 발언에 새삼 놀랐다.

십 년 전이면 이제 막 초등학생 고학년쯤 된 무렵부터라는 거니까. 생각해 보면 아무리 이번 생을 기준으로 해선 나이 차 많이 나는 형 정도라지만, 전생을 기준으로 하면 아들뻘인데… 그런 꼬맹이한테 홀라당 넘어가 버리다니. 새삼 레오나드와의 나이 차를 느낀 채이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가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채이는? 어떤데?”

“으응?”

“나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줄 거야? 오메가가 되지 않더라도. 계속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어?”

순간 가슴께가 간지러워지는 느낌이 들어 채이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장난으로 시작되었던 대화가 어느새 진지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레오나드는 이전, 얼렁뚱땅 지나갔던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선뜻 대답을 하기엔 여전히 어려운 질문이다.

서로를 좋아하고 그 마음을 신뢰하는 것과 별개로 현실을 생각하면 상당히 복잡한 문제였기에. 거짓말로 그렇다고 대답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되지도 않다 보니 더더욱 그러했다.

“레오… 그 문제는 일단.”

한참 침묵했던 채이가 입을 달싹인 것도 잠시. 서로 엇갈리는 거친 발소리들이 들려와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레오나드와 채이가 식당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모습을 보인 이들은 나이가 제법 지긋해 보이는 노인들이었다. 채이를 노려보는 눈이 부리부리하여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가운데… 그들을 뒤따라 델리온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델리온은 골치 아파 죽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짚고 있었다.

“그래. 저놈이 바로 그 괘씸하기 짝이 없는 베타로군.”

이름 모를 노인들이 대놓고 채이에게 적대감을 보였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베타 혐오는 채이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채이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데 노인들을 향한 레오나드의 눈이 살벌하게 변했다. 닿으면 얼어버릴 것처럼 차갑다. 그뿐인가. 살을 벨 것처럼 날카로운 레오나드의 페로몬이 그들을 위협하듯 흘러나와 장내를 장악했다.

그 탓에 상황을 지켜보던 주방장과 시종들, 입구에 서 있던 기사들까지 긴장하는 것이 피부로 저릿저릿 느껴질 정도였다. 하여 채이도 숨죽여 상황을 지켜볼 즈음.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던 레오나드가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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