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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85화 (85/105)

085화

“채이 님은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실 수 있는 건가요?”

수줍게 내리뜬 벤냑스의 눈동자에는 감명받은 마음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라면 그런 용기, 절대 내지 못했을 텐데. 채이 님은 정말 멋진 분이세요.”

“아.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사실 그런 말을 들을 정도의 사람이 아닌걸요.”

머쓱해진 채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벤냑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또랑또랑하게 빛나는 벤냑스의 시선은 채이를 한가득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갓 첫사랑에 빠진 이의 것이었다.

“아니요! 정말… 정말 동경하게 돼요. 그리고 저는… 그런 채이 님이 좋아진 것 같아요.”

동시에 매화 향을 닮은 그의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잘 갈무리되었을 페로몬이 제멋대로 범람하는 마음으로 인해, 형태가 되어 밖으로 흘러나오는 거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잘 모르는 채이는 처음에 그가 말한 ‘좋아한다’의 속뜻 또한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고맙다고 받아치려 했지만.

“좋아해요….”

그보다 먼저 벤냑스의 말이 이어졌다.

“좋아해요, 채이 님. 동경을 넘어서요. 늘 다정하고 멋진 채이 님이 좋아요. 그러니까… 제게 채이 님과 사귈 기회를 주실 순 없을까요? 채이 님을 품은 이 마음에 단 한 번만 답해 주시지 않을래요?”

채이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하려던 말들은 열린 입 밖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입만 뻐끔거리게 되었다. 그 소심한 벤냑스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솔직하고 직설적인 고백이었다.

“사귀, 다니… 저랑요?”

“네.”

“…레오가 아니라요?”

“네!”

채이는 사고가 멈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저 당황스러워 멍하니… 저를 향해 눈을 반짝이는 풋풋하고 순수한 청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은 채이였다.

‘아. 살면서 받을 고백을 최근 들어 다 받는 거 같네.’

사실 권채이였을 적에도 그는 주위의 시선을 많이 받았었다. 외모가 훈훈하고 체격은 듬직했으며 입을 다물고 있으면 우수에 찬 듯 신비로운 분위기가 흐른 덕분이었다. 동시에 성격이 다정하고 부드럽기까지 해서 인기가 없을 수 없었다. 워낙 채이가 연애에 관심이 없던 터라 타인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벤. 그, 저는….”

뒷목을 매만진 채이가 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면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에게는 이미 레오나드가 있다. 채이 자신도 레오나드를 좋아했다. 여지를 남기는 듯한 답변은 결코 벤냑스를 위한 일이 아니었기에 확실하게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벤냑스의 풋풋한 마음을 짓이겨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너무 미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벤에게도 레오나드와의 관계를 이야기해 둘 걸 그랬다. 물어보지도 않은 일을 대뜸 꺼내려니 여간 머쓱한 것이 아니었는지라 그냥 나중에 궁금해하면 말하자, 하고 넘겼던 건데… 설마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거절해두는 수밖에.

하여 채이가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 때였다.

“채이.”

마침 끼어든 음성에 두 사람 모두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건 레오나드였다. 방금 전 함께 올라갔던 에녹과 요신은 보이지 않고 레오나드만 혼자서 내려오고 있었다.

설마 벤냑스의 말을 들었을까. 긴장되는 순간이다. 혹시라도 그가 크게 화를 낼까 봐. 하나, 다행히도 채이가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레오나드는 무심하게 주변을 한 번 훑을 뿐이었다.

“페르난데는?”

“아… 아. 페르는 쉴 거라고 먼저 갔어.”

“그래?”

레오나드는 벤냑스의 고백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이 커지지 않을 듯하여 다행이다. 그렇게 채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킬 무렵… 왠지 아까보다 기운이 없는 듯 보이는 벤냑스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잠시 침묵하다가 슬쩍 끼어들었다.

“채이 님. ‘대답’은 천천히 해 주셔도 돼요. 그럼 저도 이만 가 볼게요!”

“잠깐, 벤….”

벤냑스가 도망치듯이 저택을 나가 버렸다. 채이는 그런 벤냑스를 다시 불러 세우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감이 좋은 레오나드가 묘하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 눈썹을 휘었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그 잠깐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눈치챈 모습이었다.

‘채이에게 뭘 한 거지. 저 녀석.’

레오나드의 부리부리한 시선이 도망가는 벤냑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간과하고 있었다.

설마 무슨 말만 하면 바들바들 떨어 대기 바쁜 놈이 그 잠깐 사이 채이에게 고백 따윌 했을까,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벤냑스가 채이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진즉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전달하는 건 한참 뒤거나 아예 그럴 일이 없으리라 본 거였다. 벤냑스도 분명 위협적인 존재였으나, 레오나드가 페르난데보다 벤냑스를 상대적으로 덜 경계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채이. 무슨 일 있었어?”

“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한편 괜히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채이는 이렇게 된 이상, 레오나드에게 아까 전 일을 철저히 숨기기로 했다. 그리고 벤냑스에게는 나중에 따로 만나 제대로 이야기한 후 마음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보다 왜 혼자 내려왔어?”

“아. 그 녀석 이름이… 요신이랬던가.”

“응. 요신이 왜?”

“떠나기 전에 채이랑 한 번 더 이야기하고 싶다 해서. 데리러 온 거야.”

“…요신이 나와 대화하고 싶어 한다고?”

예상 밖의 이야기에 놀란 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였다. 요신의 입장에서 보면, 채이는 그를 학대하고 노예로 팔아 치운 극악무도한 가해자였으니까. 당연히 다시는 얼굴을 보려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채이도 그걸 염려해 가능한 한 요신을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가 먼저 채이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니. 채이의 면전에 대고 지금까지 쌓인 한을 잔뜩 풀고 싶은 걸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었고 요신과의 대면 자체를 채이가 거부할 이유도 없었기에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겠어. 요신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줘.”

설핏 웃은 레오나드는 채이의 이마에 ‘쪽’ 하고 입술 도장을 찍은 뒤 요신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레오나드를 뒤따라간 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4층 복도에 나와 있는 에녹과 요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채이 님. 여기.”

에녹이 조용한 목소리로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살짝 웃어 준 채이는 이내 에녹의 옆에 서 있는 요신을 돌아보았다. 그는 놀라울 만큼 차분해져 있는 상태였지만 여전히 두려움을 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두려움은 채이를 향한 감정임이 분명했다.

마침내 채이가 요신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요신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눈만 굴리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부르긴 했는데 막상 채이를 눈앞에 두니 무서운 걸까? 낌새로 보아 침묵은 더 길어질 듯했다. 4층은 빈방뿐이라서 굉장히 조용했기 때문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으니 무거운 정적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에녹. 너는 먼저 로비에 내려가 있어.”

그때 레오나드가 에녹을 돌아보고 말했다. 혹시나 채이의 과거가 외부로 새어 나갈까 봐 배려해 주는 것이다. 그가 노예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에녹이, 채이에 대한 감정이 바뀔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채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레오나드는 채이가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는 일이 없길 바랐다.

상황이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갈 것임을 눈치챈 에녹이 냉큼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다시 찾아온 침묵. 채이는 계속 옆에 있어 준 에녹이 사라져 버려서 요신이 괜히 더 두려움에 떨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결국 고민하던 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잘 지내도록 해요. 참,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돈은 제가 나중에 드릴 생각인데 그건 랭커스터 이름으로 대신 보내라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더 이상 당신이 저와 엮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너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고 앞으로 네 눈앞에 나타날 일도 결코 없을 것’이라고 열심히 어필하는 모양새였다. 채이는 “혹시 나를 욕하거나 때리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리해도 좋다”고 허락까지 했다.

물론 레오나드가 그건 안 된다고 가로막았지만 말이다.

그즈음 요신이 용기를 냈는지 슬쩍 눈을 들어 채이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왠지 모를 긴장감이 들었다. ‘소설 속 채이’가 요신에게 저지른 만행들을 채이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기에… 요신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채이를 원망하고 있을지를 알기 때문이리라.

“미안해요. 그리고 용서하지 않아도 돼요.”

요신을 바라보는 채이의 시선에 따뜻함이 깃들었다. 반면 채이를 바라보는 요신의 시선에는 점차 두려움 대신 호기심, 신기함 그리고 놀라움을 닮은 감정들이 깃들고 있었다. 잠시 후 요신은 ‘드디어’라고 해도 좋을 첫마디를 꺼냈다.

“저… 저기.”

하지만 곧바로 본능처럼 몸을 움츠렸다. 함부로 입을 열었다고 학대당한 기억 때문이겠지. 안 그래도 작고 마른 몸이 더욱 쪼그라들자 참 안쓰러웠다. 채이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요신은 한참 뒤에 방황하는 자신의 눈을 바닥에 내리꽂고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채이 님이… 제, 제가 아는… 그 채이 님인 거… 마,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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