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한편 레오나드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이는 그레이트 홀 뒤편, 사람이 없어 한적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는 곳이라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채이는 잠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다가 벤냑스 쪽으로 돌아섰다.
“벤. 저번에는… 좋아한다고 말해 줘서 고마웠어요.”
그 첫마디에 벤냑스의 기다란 속눈썹으로 아래로 똑 떨어졌다. 좋다 싫다가 아닌 애매한 첫마디. 그것만 듣고도 벤냑스는 그가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여기까지 왔는데. 벤냑스는 행여나 거절을 듣더라도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 말은, 채이 님. 제 고백에 대한 승낙인가요? 아니면 거절인가요?”
그에 벤냑스가 상처받을까 걱정하던 채이도 이내 마음을 먹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벤. 제 곁에는 이미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벤의 마음은 받아 줄 수가 없어요. 하지만 벤은 분명 저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더 좋은 사람. 그 순간 레오나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죄책감을 닮은 기분이 강해졌다.
그 ‘더 좋은 사람’을 자기가 뺏어 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미안해요.”
그래서 채이는 한 번 더 사과를 건넸다.
고백에 대한 거절.
이로써 확실하게 생각은 전했다. 채이가 벤냑스의 표정을 살피며 가늠하고 있는 동안… 벤냑스는 역시나 예상했던 답변이구나 하고 후련함과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이내 작게 웃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 그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레오나드 공자님인가요?”
솔직히, 채이는 놀랐다. 벤냑스의 입에서 레오나드의 이름이 바로 나올 줄은 몰랐기에. 그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설마 처음부터? 아니면 그저 추측에 불과한데 정확히 맞추어 버린 걸까? 찰나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러던 와중 달싹이며 열린 채이의 입에서 딱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벤냑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저 감이 좋았던 것뿐이었나 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사귀는 것을 알면서 고백을 했다면 그건 나쁜 행동에 더 가까웠으니까. 적어도 채이가 아는 벤냑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감이 좋았던 것뿐’이라는 채이의 짐작과 달리, 벤냑스가 두 사람의 관계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코네러 영식이 채이에게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이미 압니다.
그건 채이와 레오나드가 함께 벤냑스의 병문안을 갔던 당시, 채이가 갑자기 화장실을 가 봐야겠다며 자리를 떠난 직후에 있었던 일이었다. 한참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는데 거기서 레오나드가 다소 공격적인 말을 두서없이 내뱉고 만 것이었다.
-네. 맞아요. 저는 채이 님을 조, 좋아해요. 그게 잘못된 일인가요?
벤냑스도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두고 ‘타인’일 뿐인 레오나드가 날카롭게 느껴지는 말을 내뱉는 게 불쾌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까칠하게 받아쳤다. 레오나드와 채이가 어떤 관계로 얽혀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었다.
-그 자체로 ‘잘못된’ 일은 아니죠.
그리고 그때.
-하지만 그쪽한테 빼앗기는 걸 두고만 볼 생각은 없어서요. 저도.
레오나드는 거의 고백과 다름없는 말을 했었다. 벤냑스는 이미 그때부터 알았던 거였다. 레오나드를 향한 채이의 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레오나드만큼은 채이를 확실히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걸.
-뭐? 벌써 돌아간다고? … 벤. 그러면 저희 가 볼게요.
이후 벤냑스는 느지막이 되돌아왔던 채이가 레오나드의 재촉에 당황하며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했었다. 저런 모자랄 것 없는 완벽한 남자를 자신이 이길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생각에는 곧바로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나 같은 게 레오나드 공자님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고.
벤냑스는 한동안 주눅이 들어 자신감을 잃었다. 지금보다 좀 더 강해져서… 좀 더 멋있어져서 채이의 옆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보호받는 사람이 아니라 보호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탓도 있으나 무엇보다 그의 이능향이 가진 ‘위험성’이 가장 걸림돌이었다. 마물을 흥분시켜 이성을 잃고 날뛰게끔 만드는 이능향. 고등 이종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건 아니었지만, 상급 마물을 흥분시켜 날뛰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능력이었다.
때문에 그걸 악이용하려는 세력이 그를 호시탐탐 노려 왔고 부모님들도 벤냑스가 밖으로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늘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그런 ‘보호받는 게 당연한 환경’ 속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위해선 남들보다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이런 내가 채이 님의 옆에 있으면 오히려 민폐야.’
벤냑스는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채이가 너무 눈부셔서… 결국 자신도 모르게 전하지 말아야 할 마음을 전하고 말았다. 그리고 거절당하기까지. 하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애매한 마음으로 채이의 옆에서 희망을 가지는 것보다는.
“그래도 채이 님. 지금까지처럼… 저와 친구는 해 주실 거죠?”
“당연하죠.”
벤냑스의 물음에 채이가 망설임 없이 답해 주었고, 밝게 웃는 걸로 화답한 벤냑스는 채이보다 먼저 자리를 뜨기 위해 돌아섰다. 그러나 바쁜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던 그는 마침 그곳에 서 있던 레오나드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대화를 듣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이제 와서는 어찌되었든 상관없는 일이다. 레오나드의 시선을 잠시 마주하고 서 있던 벤냑스는 홱 고개를 돌리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레오나드는 눈물로 젖어 있던 벤냑스의 얼굴을 잠시 흘겨보다가 그와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채이는 어딘가 상념에 잠긴 얼굴로 서 있었다.
그 곁으로 레오나드가 먼저 다가가니 그제야 기척을 알아차린 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응? 레오, 네가 왜 여기 있니?”
항상 타이밍 좋게 나타나는 레오나드가 마냥 신기한 채이였다.
“그냥. 바람 쐬러 잠시 나왔어.”
엿들었다고 하면 싫어할까 봐 적당히 둘러댄 레오나드는 채이의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마에 쪽 입술을 눌렀다. 벌꿀처럼 달콤한 채이의 금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으니 평소보다 더욱 반짝이는 듯하다. 발그스름해진 뺨을 하고서 쳐다보는 얼굴은 레오나드의 마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밤이 쌀쌀해. 이제 그만 안으로 돌아갈까?”
“그래, 그러자.”
채이는 레오나드의 손을 단단히 잡아 주며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 연회가 이어지는 홀 뒤편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연회는 밤새도록 이어졌으며, 즐겁게 웃고 떠들며 마시고 즐기는 분위기에 각자의 크고 작은 사정들은 조용히 묻어 가고 있었다.
***
새벽달이 고요하게 떠오른 밤.
귀족들이 하나둘 저택으로 향하여 한산해진 연회장 뒤편에, 그림자가 하나 있다. 그 그림자는 바로 페르난데였다. 그리고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아버지인 사무엘과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던 중이었다. 채이가 잘해 보라며 자리를 비우고 나서 사무엘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조용히 다가왔던 까닭이었다.
결과적으로 페르난데는 자신의 아버지와의 케케묵은 악감정들을 어느 정도는 풀 수 있었다. 채이가 말했던…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진즉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걸, 지금까지 너무 멀리 돌아와 있었던 거다.
그래서일까.
페르난데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붕 뜨고 멍했다. 그 탓에 사무엘이 먼저 떠난 이후로도 이리 하늘을 바라보며 바람이나 쐬고 있었던 거였다. 문득, 지금쯤이면 채이도 쉬러 갔겠구나 싶어서 정신을 되찾은 페르난데가 몸을 돌리려던 순간.
“흑….”
어디선가 입 안으로 먹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에 멈칫한 페르난데가 고개를 돌렸다. 이런 한산한 시간에 구석진 곳에서, 누군가가 혼자 울고 있었다. 페르난데의 등줄기가 섬뜩해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그건 ‘귀신’ 같은 게 아니었다. 대체 누구인가 싶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쩍 보았더니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벤냑스였으니까.
‘뭐야. 괜히 쫄았군.’
긴장이 쏙 빠져 버린 페르난데가 주책맞게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벤냑스를 조용히 흘겨보았다. 기척을 느낀 벤냑스는 잔뜩 젖은 눈으로 그런 페르난데를 힐끔 돌아보았다가 미간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토록 궁상맞은 꼴도 없다. 그래, 마치 ‘누구한테 차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뭘 가만히 구경하고 계세요? 저리 가 주세요.”
“채이한테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했나 보지?”
“가, 가시라고요!”
“진짜냐….”
페르난데가 게슴츠레 눈을 내리떴다.
새삼 생각해 보면 벤냑스는 무르고 약한 겉모습과 다르게 은근 고집이 있는 성격이었다. 페르난데는 확신이 없었기에 채이를 향한 마음을 되도록 키우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레오나드와 이어졌다는 걸 알곤 진즉 마음을 접기도 했었으니까.
페르난데는 어차피 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관계를 물고 늘어질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벤냑스가 이 순간만큼은 승리자처럼 느껴졌다.
“…….”
작게 한숨 삼킨 페르난데가 훌쩍이는 벤냑스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걸로 약간의 위안을 얻은 벤냑스의 울음소리가 좀 더 커졌다.
‘그러고 보니….’
문득 근본적인 문제점이 하나 떠오른 페르난데가 고개를 들었다.
‘그 녀석, 채이가 오메가로 재발현하지 못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랭커스터 가문의 엄격하고 매정한 가풍은 아스타리우스 제국 내에서도 상당히 유명하다. 오메가가 아닌 베타… 그것도 임신이 불가능한 남성 베타를 선택한 레오나드에게는 채이를 오메가로 바꾸는 데에 성공하거나, 다시 쫓겨나거나. 혹은 가문 전체를 적으로 돌리거나. 셋 중 하나의 길밖에 없으리라.
‘갈 길이 멀겠네.’
그저 페르난데는 채이한테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만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