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95화 (95/105)

095화

채이의 아래에서 씩씩거리던 데비드가 부리부리하게 뜬 눈으로 채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죽음도 각오하고 일을 벌였다 한들 막상 날붙이를 눈앞에 두면 또 망설이게 되는 법이다.

데비드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손이 하나 남아 있었지만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이 녀석이 시선은 리먼을 향해 두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자신의 미약한 꿈틀거림도 예리하게 캐치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정말이지, 빈틈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내였다.

평범한 베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즈음 이쪽으로 다급히 달려오는 여럿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침묵을 흐트러트리는 그 소음의 정체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데비드는 베타 한 명을 위해 콧대 높던 랭커스터가 이렇게까지 움직인단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고, 리먼은 순순히 자백과 함께 용서를 구하려 하고 있었다.

“저쪽이에요!”

직후 채이도 비교적 선명한 에녹의 외침을 듣고 랭커스터 가의 일행들이 바로 이 근처까지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데비드에게서 떨어진 채이가 단검을 멀리 떨어트려 치우는 동안 한걸음에 달려온 기사들이 데비드와 리먼을 조심스레 구속했다.

“채이 님! 어느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응. 난 괜찮아.”

“죄송해요. 제가 옆에 있었는데도 이런 일이….”

“아니야, 아니야.”

에녹이 너무 미안해하고 있었기에 채이가 손을 내저었다. 급기야 그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고, 채이는 그런 에녹을 오히려 달래 주어야 했다.

그나저나… 납치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거 같은데 어떻게 이쪽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던 걸까? 구속당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문득 의문이 들었던 채이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채이는 에녹의 이능향이 자신의 흔적을 추적하는 데에 쓰이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레오는 같이 온 거야?”

“아… 같이 오셨는데.”

채이의 질문에 ‘그러고 보니 레오나드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싶었던 에녹이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으로 채이도 함께 고개를 돌렸다. 일행의 맨 뒤쪽…. 레오나드는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가만 보니 숨도 거칠어 보이고 페로몬 향이 들쑥날쑥하며 흘러나오는 게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뒤늦게 레오나드의 상태를 알아차린 에녹이 헛숨을 들이켰다.

“헉, 어떡해. 감정이 흐트러져서 페로몬 제어가 잘 안 되시나 봐요. 공자님이 여기서 폭주라도 하시면 큰일인데….”

폭주.

이제 보니 델리온을 포함하여 레오나드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채이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레오나드의 이능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발현자들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인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능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알파와 오메가가 폭주하는 경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설령 이능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잠재적인 위험도가 낮을 시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폭주해도 큰 문제가 없는’ 축에 레오나드는 들어가지 않았다.

레오나드의 이능향은 잠재적인 위험도가 상당히 높았으니까. 마물들을 조종하는 이능향. 그러한 힘이 폭주라도 하게 된다면 자극당한 근처의 마물들이 이성을 잃고 날뛸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하물며 현재 레오나드의 이성을 흐트러트리고 있는 건 분노였다. 그에 동조하여 날뛰는 마물들이 얼마나 거칠고 흉포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채이는 문득 레오나드가 무리하게 이능향을 쓰다가 피를 보고 말았던 때를 떠올렸다. 분명 폭주로 위험해지는 건 주변뿐만 아니라 그 본인도 마찬가지일 터.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한 채이가 망설임 없이 레오나드 쪽으로 향했다.

“채이 님…!”

에녹이 등 뒤에서 작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레오나드가 슬쩍 눈을 들었다가 뒤로 물러났다. 한번 흐트러지니 걷잡을 수 없이 널뛰는 페로몬을 힘겹게 혼자서 다스리고 있던 중이라, 혹시라도 그런 자신이 채이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간 채이는 힘들어 하는 레오나드를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그리고 아이 달래듯 레오나드의 등을 쓸며 괜찮아, 괜찮아 해 주었다. 레오나드가 정확히 무슨 이유로 이토록 흐트러졌는지 채이는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 상황이 충격적이었거나, 자신을 걱정해서 심히 불안해졌거나, 그러한 이유라고 생각했으니까.

“…채이.”

“그래.”

“다친 데는 없어?”

“응, 걱정하지 마.”

천천히 팔을 올린 레오나드가 채이를 마주 안았다.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지만 채이는 숨이 막힌다며 불평하지는 않았다. 그저, 동화책 이야기를 들으며 잠든 어린 레오나드의 가슴께를 도닥여 주었던 것처럼 조용히 다독일 뿐.

레오나드는 채이의 품이 건네주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을 때마다 채이의 포근한 체향이 혈액처럼 몸 안을 도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서, 채이가 영원히 제 품 안에만 있어 준다면… 제 눈이 닿는 곳에만 있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레오나드는 숨통이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채이가 크게 다치기라도 할까 봐, 혹시라도 그를 잃게 될까 봐. 만약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서 미칠 것 같았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만든 데비드는 머지않아 지독한 심판을 받게 되리라. 그러지 않는다면 레오나드 자신이 손을 써서라도 그를 멀쩡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제게서 소중한 걸 뺏으려고 한 대가는 마땅히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채이의 품속에서 레오나드의 눈빛이 잔혹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사납게 희번덕이던 눈은 금방 눈꺼풀 사이로 숨어들었다. 레오나드는 이대로 조금만 더… 채이의 품속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싶었다.

‘정말 쪼들리게 해 주는군.’

그즈음, 숨죽인 채 레오나드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던 델리온이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러고는 이번 일의 주모자인 데비드를 돌아보았다. 마침 델리온과 눈이 마주친 데비드가 슬쩍 시선을 회피한다. 델리온은 데비드를 조심히 붙잡고 있는 기사들에게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본가를 위해 힘써야 할 방계가 본가에 해를 끼치는 것은 중범죄다. 돌아가면 이에 대해 마땅히 심판할 것이니, 이만 데리고 가라.”

“예…!”

기사들이 허둥지둥 데비드를 재촉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구속한 뒤 마차 하나를 비워서 그곳에 태우려는 것이다. 그 뒤로는 데비드에게 가담한 리먼도 함께다. 데비드는 얌전하게 이동했지만 델리온 옆을 지나갈 때에는 눈을 흘기며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랭커스터를 평생 저주할 것이다.”

물론 델리온은 그에 반응하지 않았고 데비드 또한 델리온의 반응을 보려던 건 아니었는지 그대로 기사들과 함께 마차가 있는 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데비드 장로가 가진 열등감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지만 설마 그로 인하여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이야. 델리온은 채이에게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채이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면, 레오나드라는 폭탄이 이후 어찌되었을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처리해야 할 일도 생겼고. 델리온이 손짓하자 자리에 남아 있던 기사들이 먼저 움직이고 채이와 에녹도 레오나드와 함께 마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데비드와 리먼을 태운 랭커스터의 마차는 영지로 가는 길목의 마을에서 하루 정차한 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저택에 도착했다.

***

델리온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공식적인 원탁 소집령을 내려 장로들을 불러 모은 후 데비드의 처분을 논의했다. 가벼운 벌만 주고 석방할 것인가, 죄의 무게를 무겁게 보고 감옥에다 투옥할 것인가. 사실상 전자는 ‘봐주자’는 의미였지만 이를 선택하여 발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방계 가문의 장로들까지 그를 외면한 것이다.

그들은 데비드를 감싸려다 자신들한테 피해가 올까 봐 두려워했다. 방계 가문의 장로들은 입김이 강한 데비드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는데 그 중심이 무너져 버렸으니, 그들로서는 힘이 반토막 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태도를 바꾸어 그가 선을 넘었다며 비난하는 이도 있었다.

그 결과 데비드는 만장일치로 투옥되었다.

선대 가주이자 델리온의 아버지인 일레카는 이러한 결과에, 꼭 앓는 이가 빠진 것처럼 만족스러워했다. 그간 방계 장로들의 아집 어린 간섭에 시달렸던 델리온도 속이 후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얼마 뒤. 채이는 에녹에게서 ‘데비드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통쾌함이나 동정심 따위의 감흥도 크게 느낄 수 없었던 채이는 “그렇구나.” 하고 넘길 뿐이었다. 벌받을 일을 했고 그래서 합당한 벌을 받은 것뿐. 관심 없는 것에 대한 채이의 생각은 냉정하기까지 했다.

“참. 그러고 보니.”

맞은편에 앉아 한참 떠들다가 잠시 목을 축이던 에녹이 별안간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운을 뗐다. 그에 턱을 괸 채 홍차와 함께 오후 시간의 산뜻한 햇살을 즐기고 있던 채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레오나드 공자님의 러트일… 이젠 정말 얼마 안 남았네요.”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문제를 에녹이 다시금 끄집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