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9화>
19화 혈통이 결심함 (2)
데뷔전 일정은 정확히 일주일 만에 잡혔다.
권한울은 던전을 미리 확인하기 위해서 전세기에 올라탔다.
“이번에 발견된 던전은 대한민국 대전 지역의 보문산 안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 속에서 주하연이 던전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했다.
“보문산이요? 그런 산도 있나요?”
“대전의 작은 산입니다. 유명한 곳은 아니니 모르실 만도 합니다.”
권한울은 주하연의 설명을 들으며 전신 거울 앞에서 연신 넥타이를 고쳐 맸다.
이렇게가 아닌가.
생전 처음 입는 정장이라 영 어색했다.
“탈출한 몬스터들을 통해 추측한 바에 의하면 던전 내부는 카란쿨라의 둥지라고 생각이 됩니다.”
“끔찍한 놈들이네요. 모체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증식을 하는 괴물이잖아요.”
“잘 아시는군요. 가만히 놔두면 대도시 하나쯤은 단숨에 먹어치우는 괴물들이죠.”
과연 플래티넘 던전다웠다. 출현하는 몬스터의 급이 달랐다.
하지만 지금은 카란쿨라보다 이 넥타이가 더 강적이었다. 넥타이를 낑낑대며 묶으면서 주하연에게 물었다.
“카란쿨라면 틀림없이 던전 내부는 토굴이겠구요?”
“예, 카란쿨라의 토벌을 어렵게 만드는 주범이죠. 사람 한 명이 활동하기에는 굉장히 넓겠지만…….”
“카란쿨라 놈들과 전투를 벌이기에는 비좁죠.”
“잘 알고 계시는군요.”
“헌터로 일할 때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많거든요.”
주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상세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꼭 정장을 입어야 하는 겁니까? 불편해 죽겠는데요.”
“그럴 리가요. 권한울 님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제작이 된 정장입니다. 아라크네의 실을 이용해서 짜여졌기에 신축성은 물론 온도조절 기능까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이런 옷은 처음이라 불편하다는 겁니다.”
살면서 정장을 입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입을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후줄근한 티셔츠와 낡은 청바지로 살아왔으니 정장은 몹시 불편한 물건이었다.
몸에 안 맞는 옷이라는 표현이 이렇게 피부에 와닿기는 처음이었다.
“검은 정장은 흑천 일가의 상징입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정장을 착용하셔야 합니다.”
주하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결코 물러날 수 없다는 강직한 의도가 느껴졌다.
“뭔 가문의 상징이 검은 정장…… 누가 정했는데요?”
“초대 가주님이십니다.”
하나는 결심했다.
흑천의 정점에 오르면 가문의 상징에서 정장을 빼버려야지.
그리 생각하며 권한울은 넥타이를 마저 고쳤다.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소리쳤다.
“됐다!”
만세가 저절로 나왔다. 아무리 시도해도 모양이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던 넥타이가 드디어 깔끔한 모양이 만들어졌다.
권한울은 주하연을 돌아봤다. 자랑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하연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건 다 잘하시면서 이상한 부분에서 손재주가 부족하시군요.”
주하연이 턱밑까지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넥타이를 풀고 다시 매기 시작했다.
권한울은 살짝 당황했다. 시선을 내리자 단정하게 빚은 머리와 새하얀 가마가 보였다.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한동안 넥타이를 매는 소리만 들려왔다.
작업이 다 끝나자 주하연이 권한울의 가슴팍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넥타이는 앞으로 제가 따로 매드려야겠습니다.”
“혼자 맬 수 있도록 연습해 놔야겠네요.”
권한울은 콧잔등을 긁으며 대꾸했다.
“슬슬 도착하실 때가 됐군요. 던전에 도착하시면 우선 관리자들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그 관리자들도 흑천 그룹의 사람들인가요?”
권한울의 물음에 주하연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나 싶어서 권한울은 조금 놀랐다.
“그 사람들이 누구일지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공항에서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권한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제부터는 아이언펭에서 권한울 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언펭.
권한울에게 던전 실패의 책임을 몰아넣으려다가 주하연의 등장으로 무산이 되는 등.
권한울과 소소(?)한 악연이 있는 길드였다.
* * *
고속도로 위를 고급 리무진 차량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권한울과 주하연. 그리고 남은 한 명은…….
“흑천의 혈족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아이언펭의 길드마스터였다.
그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법한 배불뚝이 아저씨였다.
헌터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으나 그래도 한때 강철어금니라고 불리며 무수한 몬스터들의 숨통을 끊은 대단한 헌터였다.
“과연 소문으로 듣던 대로 늠름하시고 후광이 비칠 정도로 미남이시군요!”
그런 인물이 권한울에게 입 발린 소리를 계속 꺼내고 있었다.
믿기 힘든 광경이라 주하연에게 귓속말로 살짝 물어봤다.
“왜 아이언펭 같은 대형 길드가 이런 일을 자처하는 겁니까?”
아이언펭 길드가 맡은 일은 플래티넘 던전의 관리뿐만이 아니다.
권한울의 호위, 거처, 연습용 던전 마련 등등.
권한울이 데뷔전을 치르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도맡기로 약속이 됐다고 한다.
흑천 그룹이 대단하기는 해도 대한민국 1위 길드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건 얼핏 이해하기 힘들었다.
“권한울 님, 흑천 그룹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길드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부탁도 아니고 명령.
이 오만한 말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납득됐다.
흑천 그룹의 위치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아이언펭의 입장에서도 플래티넘 던전을 흑천에서 처리해 준다고 하면 좋은 일이니까요.”
플래티넘 던전은 대형 길드가 나서야 할 정도로 중대한 사항이다. 아이언펭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
“이해득실이 걸려 있군요.”
“사실 득이 되지 않아도 아이언펭은 흑천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또 왜죠?”
“권한울 님의 일로 흑천 그룹에서 한 번 손을 썼거든요.”
권한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나 했더니 한 번 크게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자리는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귀하신 분께서 만족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달리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아, 괜찮습니다.”
권한울은 아이언펭의 길드마스터를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길드마스터는 끊임없이 눈치를 살폈다.
그 이유야 뻔했다.
“권한울 님, 초면부터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하오나…….”
대뜸 길드마스터가 바닥에 엎드렸다. 내부가 넓은 리무진 차량이라 가능한 행동이었다.
“저희 아이언펭에서 저지른 무례에 대해 용서를 빌겠습니다!”
이미 흑천 그룹이 손을 쓰기는 했지만 순순히 용서해 주기는 뭔가 아쉬웠다.
그렇다고 굴욕을 안겨 주자니 데뷔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큰일을 벌이기는 싫었다.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아이언펭이 하는 태도를 봐서 결정하겠습니다.”
길드마스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모습을 보며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권한울 님도 참…… 성격이 나쁘시군요.”
옆에 앉아 있던 주하연이 속삭였다. 권한울은 못들은 척 어깨를 으쓱했다.
* * *
“저게 플래티넘 던전의 게이트 입니다.”
보문산의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난 곳.
나무들 사이에 거대한 원형 고리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특이하게도 고리는 온통 백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새하얀 빛 때문에 눈이 아플 정도.
고리의 주변에는 중무장한 헌터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아이언펭의 길드원들이었다.
“게이트를 벗어난 몬스터들은 어떻게 했죠?”
“모두 아이언펭에서 사냥했습니다. 사체는 저희 쪽에서 맡고 있는데…… 혹시 필요하신지……?”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안에서 실컷 잡을 예정인데. 한두 마리 쯤은 상관없지.
“카란쿨라 새끼가 던전을 탈출한 적이 많았나요?”
“초기에는 잦았으나 최근에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길드마스터의 대답을 듣고 권한울은 잠시 멈칫했다.
“최근에는 한 번도 없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혹시 안에 토벌대를 보내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저희 아이언펭은 흑천의 행사를 방해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이언펭의 길드마스터는 펄쩍펄쩍 날뛰었다. 행여나 오해를 살까 봐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게이트 안에 아무도 출입을 한 적이 없다 이거죠?”
“예! 맞습니다!”
권한울은 길드마스터를 가만히 바라봤다. 긴장을 했는지 아이언펭의 길드마스터는 침을 꼴깍 삼켰다.
권한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도 카란쿨라 새끼들이 던전을 탈출하지 않았다니 다행이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하핫.”
아이언펭의 길드마스터는 그 뒤로도 여러 가지를 설명했다.
보문산 일대를 아이언펭 길드에서 관리하고 있다든지. 비상시에 권한울을 지원하기 위한 부대가 준비되어 있다든지.
하지만 권한울은 그런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길드마스터를 뒤따르며 주하연에게 속삭였다.
“아이언펭 길드에서 던전에 무슨 짓을 벌인 모양입니다.”
권한울의 말에 주하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말도 안 됩니다. 아이언펭 따위가 감히 흑천에게…….”
“아이언펭 독단으로 벌인 일은 아니겠죠. 득이 될 것도 없는데. 누군지 몰라도 누가 돕지 않았을까요?”
주하연의 얼굴이 굳는 게 보였다. 대체 누구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으니까.
용의자는 흑천 일가의 순혈이 틀림없을 터.
“그 사실을 어떻게 바로 아신 겁니까?”
“아까 물어봤을 때, 심장 박동 수가 빨랐거든요.”
“……예?”
주하연은 진짜로 당황한 얼굴이었다. 헌터들의 감각이 일반인보다 예민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떨어진 상태에서 심장 박동 수를 듣다니?
“제 귀가 좀 특별하거든요.”
교룡지체(蛟龍肢體)를 통해 얻은 이무기의 감각 덕분에 가능한 잡기였다.
“부탁드릴게요.”
“네. 겸사겸사 알아보죠. 반나절만 시간을 주십시오.”
주하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아이언펭 길드마스터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뭐? 골드급 던전이라고? 대전 지역에? 가뜩이나 인원도 부족한데…… 일단 거리부터 통제하고 있어 봐!”
길드마스터가 이쪽을 돌아보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골드급 던전이라고요?”
“예! 현장에 애들만으로는 어쩌기 힘들어서…… 최대한 빨리 해결을 보고 오겠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몸 풀 곳이 필요했는데.”
권한울의 말에 길드마스터가 황송하다는 듯이 말했다.
“권한울 님께서 도와주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저 혼자 들어갈 겁니다.”
권한울의 말에 길드마스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핫, 권한울 님, 잘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다른 던전이 아니라 골드급 던전이 생성됐습니다.”
“예, 들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들어가시겠다고요?”
“원래 데뷔전을 치르기 전에는 다른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경험도 쌓고, 몸도 좀 풀어야 하거든요.”
데뷔전은 던전을 ‘혼자’ 클리어함으로서 실력을 입증하는 것이다.
흑천의 혈족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데뷔전을 치르기 전에 그보다 급이 낮은 던전을 클리어하며 경험을 쌓는 게 순서였다.
“무,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이언펭도 흑천 그룹의 지침대로 연습용으로 쓰실 던전을 몇 개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지침에는 분명 두 단계 낮은 던전이라고…….”
연습용은 연습용일 뿐이다. 몸에 부담이 가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연습용 던전은 데뷔전을 치를 던전보다 급수가 두 단계 이상 낮아야 했다.
“아, 그러니까 골드 던전은 힘들 거라 이 말이죠?”
“아아, 아뇨. 그럴 리가요! 플래티넘 던전에도 혼자 도전하시는데요! 하지만…… 그런 중요한 앞두고 계신데 괜히 골드급 던전에서 다치기라도 하시면…….”
아이언펭의 과실이 될 터. 그럼 흑천 그룹이 어떻게 나설지는 불 보듯 뻔했다.
좋은 생각이 났는지. 길드마스터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참! 플래티넘 던전을 도전하기 전에 연습용 던전을 미리 확보해 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전 지역에 저희가 확보한 던전이 몇 개 있습니다! 브론즈가 세 개에 실버가 하나…….”
“이러면 용서해 드리기 힘들 거 같은데.”
권한울의 한마디에 아이언펭 길드마스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빨리 안내나 하시죠.”
권한울의 말에 아이언펭의 길드마스터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 * *
“여기입니다…….”
길드마스터가 힘없이 도로 위를 가리켰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고리가 검은 아스팔트 위에 떠 있었다.
권한울은 고리 앞에 서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길드마스터는 안절부절 못했다.
“저, 정말 혼자 들어가시려구요? 저, 저희 측 헌터들을 같이 데려가시는 게…….”
“그럼 이따 보죠.”
권한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냅다 고리 안으로 몸을 던졌다.
‘젠장! 이 애송이 자식이!’
길드마스터는 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었다.
‘플래티넘급에 도전한다고 골드급이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지!’
사자를 잡을 힘이 있다고 해서 하이에나가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골드 던전을 밥 먹듯 공략한 베테랑도 조금만 방심하면 실버 던전에서 죽는 게 이 바닥 생리다.
그런데 준비도 없이 골드급 던전에 도전해?
‘이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우리 아이언펭 길드만 쪽박을 차잖아!’
만약 죽으면? 그 다음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한창 욕설을 내뱉던 길드마스터는 문득 옆에 서 있는 여인을 돌아봤다.
평생 아내만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길드마스터조차 자꾸만 눈길이 갈 정도로 여인은 무척 아름다웠다.
‘근데 이 여자는 걱정도 안 되나, 왜 말리지도 않는 거야.’
길드마스터는 권한울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욕지거리를…….
“생각보다 빨리 나오시는군요.”
별안간 여인이 입을 열었다. 길드마스터는 이게 뭔 소린가 하는 얼굴로 게이트를 쳐다봤다.
황금색 고리가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던전이 클리어됐다는 증거였다.
“어…… 어엇……?”
먼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단 한 명만이 서 있었다.
소형 자동차 크기의 괴물 머리통을 흔들며 권한울이 말했다.
“역시 만만치 않네요.”
길드마스터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지랄도 풍년이다.
길드마스터는 졸도할 뻔한 정신을 간신히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