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44화>
44화 질투 (2)
“카탈리나 님!”
갑자기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루인 아스파담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쾅 내려친 것이다.
“방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인, 너무 흥분했네요.”
“제게 상의도 없이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요!”
“루인, 좀 진정하세요.”
“진정 못합니다! 설마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이곳에 찾아온…….”
“루인.”
딱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식당 전체를 으스러트릴 듯이 짓눌렀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루인 아스파담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 불만 가득한 눈동자로 권한울을 노려봤다.
권한울로서는 적잖게 억울한 일이었다.
“그동안 당신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봤어요.”
어느새 카탈리나 블라가의 목소리는 다시 온화하게 변해 있었다.
“가문을 도망친 탈주자의 아들이더군요. 그 때문에 당신은 입지는 굉장히 위태로운데다가 같은 편도 없는 상황이고.”
권한울의 속사정이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흑천제일권이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은 뼛속까지 무인이에요. 당신을 세심하게 보살펴줄 사람이 아니죠.”
외부인이 알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자세한 정보들이었다.
권한울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흑천 일가가 무력적인 면에서 뛰어나다면 우리 블라가 가문은 정보를 다루는데 자신 있어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틀드래곤. 제 손을 잡으세요. 그러면 당신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외부인인 당신이 저를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입니까.”
“방법이야 많죠. 필요한 정보들을 당신에게 제공해 줄 수도 있고, 가문에서 맡긴 의뢰를 해결할 때 힘이 되어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카탈리나 블라가가 손가락을 들어 권한울을 가리켰다.
“당신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원을 해 줄 수도 있죠. 필요하다면 블라가 가문의 창고를 개방해서라도 말이에요.”
실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권한울은 지지 세력이 없기에 물질적인 도움을 받기 힘든 상황이다. 이번만 하더라도 백토를 따로 구할 수 없어서 직접 찾아온 게 아니던가.
흑천 그룹 내에서 지위를 높인다면 해결될 문제지만 지위를 높이는 것 자체가 또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카탈리나 블라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모든 고민이 한 번에 해결된다.
문제는 제안을 한 당사자가 카탈리나 블라가라는 점이었다.
권한울은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물었다.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이미 말했잖아요.”
“말했다고요?”
“당신의 스폰서가 되고 싶다고 말했죠. 그럼 당신한테 원하는 게 뭐겠어요?”
끈적끈적한 시선이 권한울의 몸을 훑으며 지나갔다.
그제야 권한울은 카탈리나 블라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젊고, 혈기왕성하고, 얼굴도 괜찮고, 무엇보다 재능도 실력도 출중하죠. 저는 당신 같은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답니다.”
카탈리나 블라가가 혓바닥을 조금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아, 혹시 흑천 일가의 사람으로 블라가 가문의 도움을 받는 게 걱정되시는 건가요? 걱정 마세요. 우리 관계는 철저히 비밀로 지켜질 테니까.”
정보를 다루는데 능한 만큼, 숨기는 데도 자신이 있을 터였다.
“아니면 혹시 제게 지배를 당하실까봐 망설이시는 건가요?”
카탈리나 블라가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비웃는 듯, 조롱하는 듯, 사람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듯한 눈웃음이었다.
“이거 실망이네요. 그 흑천의 혈족이 저 같은 여자 한 명한테 홀릴 것을 두려워하다니.”
명백한 도발에 권한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저도 침대 위에서는 한낱 여자에 불과하답니다. 남자가 하기에 따라서 비명을 지르고, 이끌리고, 봉사하는 여자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권한울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마치 거미가 다가오듯.
“절 어떻게 다룰지는 당신이 하기 나름이죠. 그런데도 절 거부하실 건가요?”
하얀 손끝이 권한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권한울은 말없이 그 손끝을 바라봤다.
카탈리나 블라가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럼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권한울이 카탈리나 블라가의 손을 다시 밀어냈다.
카탈리나 블라가의 눈동자가 저절로 커졌다.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굳이 블라가 가문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어서요. 게다가…….”
권한울이 카탈리나 블라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딱히 매력적이지 않아서요.”
그 순간, 카탈리나 블라가의 얼굴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게 변했다.
지금까지 계속 속내를 숨기고 있는 그녀였지만 권한울의 말에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권한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주하연이 권한울의 귓가에 속삭였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위험한 상대입니다.”
권한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독이 든 성배와 같았다. 취함으로서 이득이 더 클지. 위험이 더 클지 모를 상황. 그렇다면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권한울과 주하연이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뒤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권한울!”
뒤를 돌아보자 분노로 잔뜩 일그러진 루인 아스파담의 얼굴이 보였다.
“카탈리나 님을 욕보이고 어딜 도망가는 거냐!”
루인 아스파담이 권한울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카탈리나 블라가가 다급히 그를 말렸다.
“루인, 그만하세요.”
하지만 루인 아스파담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마력을 일으켰다. 주위의 사물이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날아갔다.
명성만큼이나 대단한 마력이었다. 하지만 경이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민첩 외에 다른 능력치는 나랑 비슷한 수준이군.’
권한울이 냉정하게 루인 아스파담을 가늠하고 있을 때였다.
“권한울 님, 제 뒤로.”
주하연은 권한울을 보호하려 했다. 권한울은 오히려 그녀를 막았다.
“괜찮아요.”
“저자는 루인 아스파담입니다. 아직은 위험…….”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오기가 생기잖아요.”
권한울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빠른 거 말고는 봐줄 것도 없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성은 아직은 대적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능은 반대로 말했다.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 인간, 아까부터 계속 풋내기니 뭐니 헛소리를 하더라고요.”
원래라면 루인 아스파담은 권한울에게 얼굴을 쳐들어도 안 됐다.
벽력자의 제자라지만 그것도 과거 이야기.
카탈리나 블라가의 권속이라지만 그것도 블라가 가문 내부에서나 높은 지위다.
그런 주제에 권한울을 같잖게 생각하고 있다.
“여자한테 홀려서 스승도 버린 주제에 가소롭단 말이죠.”
권한울의 목소리에 미미한 분노가 담겼다. 주하연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부디 조심하시길.”
“괜찮다니까요.”
권한울은 앞으로 나서서 루인 아스파담을 마주봤다.
“마녀의 뒤로 숨지 않은 건 칭찬해 주지.”
“누구랑 다르게 여자 꽁무니나 뒤쫓는 취미는 없어서.”
권한울의 도발에 루인 아스파담이 미간을 좁혔다.
“우선 네놈의 얼굴부터 짓이겨주마!”
고함 소리와 함께 루인 아스파담이 땅을 박찼다.
권한울은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언제든지 공격을 받아칠 수 있도록 준비했다.
S급 능력치가 얼마나 빠른지는 이미 던전에서 한 번 봤다. 그러니 받아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눈앞에 주먹이 나타났다.
‘……?’
반응할 틈도 없이 얼굴에 주먹이 꽂혔다. 몸이 뒤로 날아갔다. 탁자와 의자를 모조리 부수며 벽에 처박혔다.
권한울이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루인 아스파담이 주먹을 쭉 뻗은 채 서 있었다.
루인 아스파담은 주먹을 거두며 으르렁거렸다.
“카탈리나 블라가 님께 저지른 무례는 이걸로 잊어주마!”
루인 아스파담은 몸을 휙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윽?”
뼈를 쪼개는 듯한 격통이 주먹을 타고 올라왔다. 루인 아스파담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느새 주먹이 퉁퉁 부어 있었다. 뼈가 부러진 것이다.
“이게 대체…….”
루인 아스파담은 재빨리 권한울 쪽을 돌아봤다.
그렇게 강력한 일격을 얻어맞고도 권한울은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검은 갑주가 권한울의 얼굴을 반쯤 뒤덮고 있었다. 그것을 본 루인 아스파담이 얼굴을 구겼다.
“네놈…… 어느 틈에 흑린갑을 사용했지?”
위기의 순간, 권한울은 용린마갑(龍鱗魔鉀)을 펼쳐 얼굴을 보호했다.
본래는 피하려고 했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슬아슬했어.”
용린마갑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오러도 버티는 갑주가 단 일격만으로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루인 아스파담의 일격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흑룡혈(黑龍血)’이 분노합니다!> <‘아수라왕(阿修羅王)’이 적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두 가지 힘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당장 저놈을 무릎 꿇리자며 권한울에게 소리를 쳤다.
권한울은 두 혈통을 억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고삐를 풀었다.
그 순간, 권한울의 기세가 몇 배로 부풀어 올랐다.
루인 아스파담조차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권한울의 기세는 막강했다.
“리틀드래곤. 계속 해볼 생각이냐?”
“먼저 공격한 사람이 할 말이 아니지. 그리고 기왕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하지 않겠나?”
“……좋다.”
루인 아스파담도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번에야 말로 네놈의 얼굴을 박살내주마.”
방금 전보다 훨씬 강맹한 마력이었다. 하지만 권한울은 시시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벽력권은 쓰지 않을 생각인가?”
던전에서부터 방금 전까지 루인 아스파담은 단 한 번도 스킬을 사용한 적이 없다.
순수하게 신체능력과 마력만으로 싸웠을 뿐.
“벽력권? 너 같은 풋내기한테 스킬을 사용할 수야 없지. 그랬다가는 앞으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테니까.”
루인 아스파담은 조소를 지었다.
“너 같은 풋내기는 스킬을 쓰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래? 근데 이쪽은 예전부터 벽력권이 어떤 스킬일지 궁금했거든.”
권한울은 자세를 잡았다.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억지로라도 벽력권을 쓰게 만들어주지.”
루인 아스파담의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럼 나는 네놈이 더 이상 건방을 떨지 못하도록 만들어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인 아스파담의 몸이 사라졌다. 잔상조차 남지 않을 만큼 빨랐다.
이번에도 볼 수 없었다. 감각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흑룡혈(黑龍血)’이 분노합니다.> <진(眞) 흑룡혈 동화율 24% -> 26%> <용의 본능이 더욱 강해집니다.> 흑룡혈이 권한울의 전신을 달궜다. 권한울은 반사적으로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루인 아스파담의 몸이 나타났다. 두 사람의 주먹이 서로 교차했다.
아니, 교차할 뻔했다.
두 주먹 모두 제대로 뻗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멈추지만 않았더라면.
권한울도, 루인 아스파담도 놀란 얼굴로 자신들의 주먹을 쳐다봤다.
두 주먹이 누군가에 의해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둘 다 너무 흥분한 것 같네요.”
카탈리나 블라가.
그녀가 두 사람의 주먹을 붙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