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62화>
62화 다 알고 있다
늦은 밤.
김철수는 지하상가에 앉아 저녁식사를 중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컵라면 큰 사발.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만큼 열악한 식사였다. 그럼에도 김철수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런 게 또 별미란 말이지.”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는 생활습관은 물론 식단까지 철저하게 조절했다.
맛이 아니라 영양분을 최우선으로 한 식단들이었기에 재료는 모두 최고급품이었지만 맛은 별로였다.
그래서 이렇게 임무를 나올 때마다 자극적인 음식을 즐기고는 했다.
“3분 다 지났네.”
김철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무젓가락을 뜯고 컵라면에 얹어 놓은 판자를 들려던 찰나였다.
입구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보폭과 무게는 아이언펭의 길드마스터의 것이었다.
흑천 소속으로서의 체면을 생각하면 컵라면을 먹는 모습을 들킬 수는 없었다. 김철수는 한숨을 내쉬며 컵라면을 숨겼다.
“불면 맛없는데…….”
불평을 내뱉은 것도 잠시, 아이언펭의 길드마스터가 안으로 들어오자 김철수는 평소의 태도로 돌아와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제가 부탁드린 대로 잘 하셨으리라 믿습…….”
김철수의 목소리가 툭 끊어졌다.
지하로 들어온 사람은 아이언펭의 길드마스터 한 명이 아니었다.
권한울이 함께 있었다.
“……이거 달갑지 않은 손님께서 같이 오셨네요.”
그리 말하며 김철수는 아이언펭의 길드마스터를 노려봤다.
길드마스터는 겁먹은 기색도 없이 김철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남자입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잠시 위로 올라가 계세요.”
“하지만 권한울 님…… 위험할지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그때 부를 게요.”
길드마스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몇 번이고 권한울과 김철수를 번갈아 바라본 뒤에야 밖으로 나갔다.
“흑천의 정보부 소속 요원 김철수.”
권한울은 김철수 앞에 USB를 툭 던졌다.
“이걸 나한테 주라고 시켰다던데. 맞습니까?”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저 멍청한 남자가 다 실토했군요.”
“묻는 말에나 대답하세요.”
김철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흑천의 혈족께 인사드립니다. 알고 계신 사실이 맞습니다.”
“누가 시켰죠? 목적은 뭡니까. 애초에 정보부 소속이 맞습니까?”
“흑천에 충성하고 있는 몸인 만큼 권한울 님의 명령에 따르는 게 도리입니다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말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공손하지만 벽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권한울은 마력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야겠습니다.”
“그럼 저는 무슨 수를 서서라도 도망쳐보겠습니다.”
김철수가 품에서 단봉을 꺼냈다. 허공에 휘두르자 송곳 같이 얇고 길쭉한 칼날이 돋아났다.
펜싱 선수처럼 두 발을 앞뒤로 높으며 칼자루를 가슴높이까지 끌어올려 권한울을 겨누었다.
“해 보겠다 이거군요.”
“저 따위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말과 달리 칼끝에 살기가 맺혔다.
“그저 도망칠 틈을 만들기 위함일 뿐입니다.”
김철수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범위가 넓어지더니 물살처럼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스킬에 권한울은 김철수의 정체를 깨달았다.
“정보부가 아니라 암살대 소속이었군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주하연에게 들은 적이 있다.
흑천 그룹에서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암살대는 그림자를 다루는 특수한 스킬을 익히고 있다고.
“알아봐주시니 황송합니다.”
“듣자하니 암살대는 몇 수 위의 상대도 죽일 정도로 실력이 출중하다던데.”
“과장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김철수가 칼을 살짝 높이 들며 말했다.
“어디 한 번 경험해 보시겠습니까?”
그 말에 권한울의 입 꼬리가 쓱 올라갔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김철수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 순간, 그림자가 흩어지더니 천장의 전구를 모조리 가렸다.
지하실이 어둠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권한울의 심장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
그런데 손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뒤, 그림자가 사라지고 다시 지하실이 환해졌을 때, 김철수는 이유를 깨달았다.
권한울이 정확히 칼을 내지른 거리만큼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암살대 소속이라 기대했는데. 잔재주밖에 못 부리는 겁니까?”
“……실례했습니다. 이제부터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김철수가 다시 칼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한 번이 아니라 수차례 연달아 공격했다.
권한울은 피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찌르기를 모조리 쳐냈다.
별안간 김철수가 뒤로 빠졌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남아 있던 그림자에서 가시가 돋아났다.
그림자 가시가 비스듬한 각도에서 권한울을 꿰뚫으려 했다.
하지만 가시가 완전히 돋아나기도 전에 소멸하고 말았다.
김철수는 놀란 얼굴로 권한울의 발을 쳐다봤다. 그 짧은 순간, 그림자를 밟아서 오러를 방출하여 스킬을 파괴한 것이다.
“……역시 진혈이십니다.”
김철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암살자가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를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수 싸움에 능하기 때문이다.
돌발 상황을 만들어서 빈틈을 만들거나 혹은 몇 수 더 앞서서 행동하거나.
그런데 권한울은 김철수의 모든 행동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었다.
마치 김철수의 행동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마 제가 수 싸움에서 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김철수의 살기가 강해졌다. 매서운 눈동자로 권한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손대중을 하지 않겠습니다. 죽일 각오로 공격할 겁니다.”
실시간으로 강해지는 살기가 김철수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해줬다.
그러나 권한울은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
“거짓말이네요.”
“권한울 님께서 흑천의 혈족이라 제가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십니다. 저는 꼭 이 자리를 벗어나서 임무를 완수해야…….”
“죽일 각오로 공격한다고 말하면서 시선을 제 뒤에 두고 있잖아요.”
김철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말로는 절 죽인다 하고 있지만 근육의 긴장도를 보면 도망칠 생각으로 가득한 거 같은데요.”
이 날, 김철수는 살짝 공포를 느꼈다. 마치 마음이 읽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살기는 진짜지만 속마음은 다르다니. 이래서 암살자가 무서운 거군요.”
권한울이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죠. 어디 한 번 도망쳐보세요.”
김철수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살기도 사라졌다.
“마지막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김철수의 그림자가 지하실 바닥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림자에서 수십 개가 넘는 촉수가 올라왔다. 촉수가 권한울의 몸을 옮아 매려 했다.
쉐이드 그립(Shade Grab)
한 번 붙잡히면 1분 동안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속박 스킬.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김철수는 곧바로 문을 향해 달렸다.
<천공비로(天空飛路)를 형성합니다.> <2차로 ‘귀몰(鬼沒)’을 사용합니다.> 촉수에 휘감기기 직전, 권한울의 몸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김철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조여 오는 촉수를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몸만 빠져나갔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저런 식으로 사라질 수는 없다.
그때, 사라졌던 권한울이 김철수의 코앞에 나타났다.
“……아니?”
김철수가 재빨리 몸을 날렸다. 권한울을 뛰어넘어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권한울이 김철수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색욕의 반지’가 대상의 정신을 뒤흔듭니다.> <‘권속혈(眷屬血)’이 대상을 지배합니다.> 권한울이 천천히 손을 떨어트렸다. 김철수가 몽롱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이름과 소속을 말해라.”
“……흑천 그룹의 암살대 소속 박철수라고 합니다.”
본명과 가명이 성씨 하나 차이일 줄은 몰랐다.
“누가 내게 정보를 건네라고 했지?”
“그건…….”
박철수가 멈칫했다. 권한울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말해.”
“……권선우 회장님이십니다.”
권한울이 인상을 쓰며 다시 물었다.
“가주님이라고? 그게 정말인가?”
“틀림없습니다.”
USB에 담긴 자료는 권한울로 하여금 권선우를 증오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 자료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선우가 넘기라고 했단 말인가?
“그 인간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 * *
“그래, 자료는 잘 건넸다고?”
불이 꺼진 방.
권선우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어떤 반응을 보였지?”
-그건 아직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수고했네.”
-아닙니다. 회장님의 명령이시니 당연히 따라야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통화가 끊어지지 않자 권선우가 먼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지?”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하도록 하게.”
-어째서 그런 자료를 건네신 겁니까?
“그런 자료라니?”
-권한울 님께서 그 자료를 보고 회장님께 원한을 가지게 된다면 큰 화근이 될 겁니다.
“그렇겠지. 그 놈은 보통 놈이 아니니 말이야.”
권선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진실이지 않느냐.”
-사실일 뿐, 진실은 아니지 않습니까. 권천 님의 죽음은…….
“그만. 결국 내 판단이고 내 결정이었어.”
권선우는 의자를 빙글 돌렸다.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선택을 하던 그건 그 아이의 마음일세. 내가 바라는 건 그 아이가 아비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그걸 원동력으로 더 빨리 성장하는 것뿐이야.”
-그 과정에서 회장님께 피해가 닥쳐도 말입니까?
“그래.”
권선우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저는 회장님을 지킬 겁니다.
“역시 든든하군.”
-농담이 아닙니다.
“알고 있네. 그러니 내가 자네를 믿고 신임하는 것이지.”
얼마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뒤,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뚝 전화가 끊어졌다.
권선우는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손을 뻗어 책상 맨 밑의 서랍을 열어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사진 안에는 어느 젊은 청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구나.”
권선우는 오랫동안 사진을 바라봤다.
* * *
권한울은 박철수에게 명령했다.
“이번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너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낸 거다.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박철수는 고개를 숙인 뒤, 지하실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겨진 권한울은 USB의 자료를 다시 확인해봤다.
“아무리 봐도 나랑 회장님을 이간질 하려는 자료인데.”
이걸 권선우가 넘기라고 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뭐지?”
생각하면 할 수 록 조금씩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안 그래도 카탈리나 블라가라던지 권천이라던지.
신경 써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권선우마저 끼어들었다.
“이런 식으로 끌려 다니는 건 딱 질색이란 말이지.”
흑천 그룹의 정점에 서겠다는 목표를 세웠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삼류 헌터로 살 때처럼 강자에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쉽게는 안 될 거다.”
권한울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스마트폰이 울리더니 두 개의 메시지가 확인했다.
하나는 박태식 명장에게 온 것이었다.
[무기가 완성 됐다. 가져가라.]
드래곤헤츨링의 송곳니와 가죽으로 만든 글러브가 드디어 완성이 됐다는 내용이었다.
무척 기쁜 소식이었으나 두 번째 메시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주하연이 보낸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황금사과가 열렸습니다.]
권한울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을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줄 물건이 드디어 준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