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77화>
77화 역발산 (4)
모두가 권한울의 승리에 기뻐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져, 졌어요!”
고리키 나나는 페르드랑스가 죽은 것을 보고 경기를 일으킬 것처럼 겁에 질렸다.
타카미네 료코를 배신한 지금, 페르드랑스만이 그녀의 활로였다. 그런데 그 활로가 지금 막 닫혀버렸다.
“어, 어떻게 하죠?”
타카미네 료코는 노무라 마사타카에게 물었다.
혼란에 빠져 있는 그녀와 달리 노무라 마사타카는 냉정하게 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네.”
“예? 도, 도망이라고?”
“그래, 여기서 잡히면 그때는 정말 끝이야. 도망을 쳐야지 뭐라고 할 수 있어.”
“하, 하지만…… 헌터들한테 어떻게 도망을…….”
노무라 마사타카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여자였다.
“지금 저 권한울이라는 놈한테 모두 정신이 팔려 있잖나. 지금 몰래 도망치면 모를 거야.”
기껏 설명해줬음에도 고리키 나나는 썩 내키는 얼굴이 아니었다.
노무라 마사타카는 그녀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먼저 움직였다.
“가, 같이 가요!”
고리키 나나는 황급히 노무라 마사타카를 쫓아갔다. 둘은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입구로 향했다.
다행히 천운이 따라줬는지. 두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사, 살았어요!”
“쉿! 조용히!”
노무라 마사타카는 핀잔을 준 뒤, 입구를 쳐다봤다.
권한울이 들어올 때, 모조리 부숴버린 탓에 계단까지 박살이 나 있었다.
다행히 잔해가 울퉁불퉁하게 쌓여 있어서 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 듯 했다.
“여기만 올라가면 돼!”
노무라 마사타카는 잔해를 밟고 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아직 그에게는 많은 지인들이 있다. 그들의 손을 빌리면 상황을 뒤집을 수…….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노무라 마사타카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앞에 주하연이 서 있었다.
“…….”
노무라 마사타카는 전신의 근육이 빳빳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지금 아래는 어떤 상황이죠?”
주하연의 물음에 노무라 마사타카는 한줄기의 광명을 보았다.
아직 그녀는 자신들이 배신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마침 잘 만났네! 자네의 대장이…… 권한울이 페르드랑스를 이겼다네!”
노무라 마사타카는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료코 아가씨께서 이 소식을 빨리 저택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하시더군! 그래야 다들 불안감을 잊을 테니까.”
“그렇군요.”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노무라 마사타카와 고리키 나나는 주하연을 지나치려 했다.
그때였다.
주하연의 마법이 두 사람의 몸을 꽉 조였다. 두 사람은 도망치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이렇게 수상한 티를 내는데. 제가 순순히 넘어가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주하연이 손짓을 하자 두 사람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무슨 사정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같이 내려가시죠.”
두 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 * *
은신처에 도착한 주하연은 두 사람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도망치려던 걸 잡아왔습니다.”
“고마워요.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요.”
권한울의 말에 주하연이 눈을 흘겼다.
“제가 오는 걸 알고 일부러 풀어주신 게 아니고요?”
“어떻게 아셨대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타카미네 료코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 아가씨…….”
고리키 나나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팔다리가 묶여서 움직이기 힘든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타카미네 료코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자, 잘못했어요. 제,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 제, 제발 목숨만큼은…….”
타카미네 료코의 시선이 노무라 마사타카에게 향했다. 노무라 마사타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졌군.”
고리키 나나와 달리 노무라 마사타카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앞으로 처분은 그쪽에게 맡기겠네. 경찰에 넘기든 말든 마음대로 하게.”
노무라 마사타카의 말에 타카미네 료코는 고개를 저었다.
“경찰을 부를 생각은 없어요.”
두 사람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아, 아가씨……!”
고리키 나나는 감격한 얼굴로 소리쳤다.
뭔지는 몰라도 타카미네 료코의 말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이해한 듯 했다.
“이만한 일을 두 분께서만 계획하고 실행하셨을 리가 없죠.”
하지만 타카미네 료코는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었다.
“분명 저택과 병원, 그리고 외부에서도 협력자가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집안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눈에 띄면 그 뒤에는 백 마리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타카미네 료코는 두 사람만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설사 이 둘이 주동자라 하더라도 말이다.
“저택 경비를 맡길 용병들을 새로 고용할 예정이에요. 살인과 고문에 익숙한 사람들로요.”
그제야 두 사람은 타카미네 료코가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머릿속을 박박 긁어내서라도 모든 것을 말씀하셔야 할 거예요.”
노무라 마사타카조차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고리키 나나는 극심한 공포 때문에 아예 혼절을 했다.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타카미네 료코는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권한울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흑천의 도움에 감사드려요. 권한울 님이 아니셨다면 저와 타카미네 가문은 큰 위험에 빠졌을 거예요.”
“아닙니다. 의뢰받았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말로 넘어가기에는 너무 큰 은혜를 입었어요.”
타카미네 료코가 고개를 들었다.
“권한울 님, 던전 공략 도중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지 타카미네 병원을 찾아와 주세요. 최고의 서비스로 모시겠습니다. 물론 권한울 님의 소개로 온 사람들도요.”
타카미네 헌터종합병원은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의료설비를 갖추고 있다.
유명한 헌터들조차 예약이 꽉 차서 발길을 돌릴 정도.
그런 병원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다.
물론 권한울에게는 초인혈과 건강혈이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찾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권한울의 팀원들 혹은 지인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아뇨, 그렇게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마운 일이었으나 너무 부담스러웠다. 권한울은 어디까지나 임무를 해결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타카미네 료코 역시 자신의 의사를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이건 저를 위한 결정이기도 해요. 앞으로도 계속 권한울 님과 친분을 유지하고 싶거든요.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타카미네 료코가 덧붙였다.
“제 할아버지께서도 권선우 회장님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셨죠. 저희 둘도 그래서 나쁠 건 없잖아요?”
불현듯 권한울은 생각했다.
회장이 갑작스럽게 자신을 임무에 투입시킨 이유가 타카미네 가문과 인맥을 쌓게금 유도하기 위함이 아닐까?
이내 권한울은 고개를 저었다.
그 까다로운 노인네가 그럴 리가 없었다.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권한울은 순순히 타카미네 료코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의 말대로 서로에게 나쁠 건 없으니 말이다.
“아,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요?”
“타카미네 가문에서 환골탈태 시술법을 찾아냈다는 게 정말입니까?”
타카미네 료코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걸 어디서 들으셨나요?”
“저기 저 남자가 저한테 먼저 말을 꺼냈거든요.”
권한울은 노무라 마사타카를 가리켰다.
“알고 계신대로 최근에 환골탈태를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는 시술법을 개발하기는 했습니다만…….”
타카미네 료코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론상으로만 정립된 시술법이라 불확실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시술에 필요한 재료들도 너무 많고요.”
“재료라고 하시면?”
타카미네 료코가 목록을 쭉 말했다. 권한울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거의 국가 1년 치 예산이 필요한데요.”
“그래서 저도 말씀드리지 않은 거예요.”
권한울은 노무라 마사타카를 노려봤다.
분명히 버겁지만 충분히 가능하다는 식으로 말했던 거 같은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즉, 해 줄 마음이 전혀 없는데. 언질만 흘린 것이다.
“날 완전히 호구로 봤네.”
“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권한울이 아쉬움을 접으려 할 때였다.
문득 페르드랑스가 죽기 직전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더 강해지기 위해서 이번 의뢰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미 헌터의 정점에 오른 그를 더 강하게 만들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환골탈태밖에 없었다.
“…….”
권한울은 페르드랑스에게 양도받은 아공간 스킬 ‘탐욕의 보물단지를 열었다.
300kg까지 보관이 가능한 이 아공간은 이미 200kg가 넘게 채워진 상태였다. 전부 페르드랑스의 물건이었다.
“료코 양. 아까 말씀하신 약재들 좀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타카미네 료코는 의아해하면서도 다시 목록을 읊었다.
아공간 물품을 확인하던 권한울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전부는 아니지만 반은 확보됐네요.”
“예?”
“나머지도 확보가 되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타카미네 료코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 게요.”
대화를 마무리 지은 뒤, 권후돈을 찾았다.
따로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후돈아!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수정구슬 안에 눈물을 흘리는 권미의 모습이 비처 보였다.
-너까지 어떻게 됐다면 엄마는…….
“응, 난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 마 엄마.”
평소랑 달리 오히려 권후돈이 권미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들의 말에도 권미의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엄마, 미안해. 힘들게 팀을 만들어줬는데. 내가 다 망치고 말았어.”
-그런 말은 하지 마렴! 너만 무사하면 돼! 그리고 그깟 팀은 또 만들면 된단다.
권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다.
-이번에야 말로 절대로 후돈이 널 배신하지 않고,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을 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있으렴.
권미의 말에 권후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권후돈은 볼을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엄마. 그럴 필요 없어.”
-그게 무슨 소리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사람들을 이끌 능력이 안 되는 거 같아.”
-또 그 소리구나. 엄마가 말했지. 사람은 누구나 처음 하는 일은 서툴 수밖에 없어! 이번에는 일이 잘 안 풀렸지만 이걸 경험삼아서 다음번에는…….
“엄마.”
권후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묘한 압박감에 권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건 내 길이 아니야.”
그제야 권미는 눈치 챘다.
그녀의 아들은 평소에도 말을 더듬거나 남의 눈치만 살피던 아이였다.
하지만 아까 전부터 대화하는 내내 그런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니?
“이미 마음을 정했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권미가 놀랐을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권한울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뭘 하나 해서 와봤더니…… 고모님이시네?”
권한울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수정 구슬을 바라봤다.
-너…….
권미는 잠시 침묵하다가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고맙구나.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모님 부탁 때문에 후돈이를 구한 게 아니니까요.”
-아니라고?
권한울은 고개를 돌려 메이홍을 쳐다봤다.
“저 검 보이세요?”
-저건…….
“저번에 와서 우리 팀원한테 아버지의 유품을 돌려줬거든요. 그 보답을 한 것뿐입니다.”
권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래도 고맙다.
“그럼 저는 이만.”
권한울이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권후돈이 다급하게 권한울을 붙잡았다.
“저, 저기 한울아.”
“또 할 말이 있어?”
“그, 그게…… 그러니까…….”
권후돈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그, 그게…… 나, 나 말이지. 그, 그렇게 잘 싸우지도 모, 못하기는 하지만…… 그, 그래도 체력에는 자신이 이, 있거든.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자, 잡일꾼이라도 조, 좋으니까…… 그러니까…….”
권후돈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너, 너의 팀에 바, 받아주면 아, 안 될…….”
“나야 좋지.”
승락이 바로 떨어지다 되레 권후돈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 정말?”
“그래.”
“나, 나는 잘 싸, 싸우지도 못하고…….”
“아까 보니까 잘 싸우던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비록 부상당했다고 하지만 락브레이커는 세계랭커다.
권후돈은 그런 락브레이커의 공격을 견뎌내고, 쓰러트리기까지 했다.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과 달리 흑천의 순혈 중에서도 특출한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권한울이 손을 내밀었다. 권후돈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그 손을 맞잡았다.
* * *
“…….”
흑천 그룹의 업무실.
권미는 수정구슬에 보이는 장면을 보며 눈가를 매만졌다.
실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자식이 성장한 것은 기쁘지만 권한울의 밑으로 들어간 것은 아쉬웠다.
“김 비서.”
“예, 듣고 있습니다.”
“후돈이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젊은 청년은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권미는 그 이유를 눈치 채고 바로 덧붙였다.
“괜찮아요.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어떤 의미죠?”
“권후돈 님께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수장의 자질에 있어서는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하의 거침없는 발언에 권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보셨지 않사옵니까. 권한울 님은…… 저건 이미 천재의 수준이 아닙니다.”
세계랭커에 거론된 적도 없는 풋내기가 판데모니엄의 악인을 이겼다.
하룻강아지가 사자를 죽였다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이만 인정하셔야 하옵니다. 권한울 님은 진혈입니다. 언젠가…… 어쩌면 조만간 흑천 일가 전체가 그분의 아래에 놓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편승하라는 건가요?”
“그렇사옵니다.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낫다는 말이 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용의 꼬리는 그래도 하늘을 날 수 있지 않사옵니까.”
권미는 두 눈을 감았다.
김 비서의 의견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 제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겠네요.”
권후돈은 용의 꼬리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머리가 잘 나가야지 꼬리도 덕을 볼 게 아닌가.
”내가 천이 오라버니의 아들을 편드는 날이 올 줄이야.”
그리 말하며 권미는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