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79화>
79화 조건부 (2)
바벨 가문.
흑천 일가와 마찬가지로 용의 혈통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혈통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용심혈(龍心血)
어째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가 하면 그들의 혈통은 용(龍)이 아니라 드래곤(Dragon)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용의 힘이 여의주에서 비롯된다면 드래곤의 힘은 심장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그 이름도 유명한 드래곤하트(DragonHeart)다.
용심혈을 소유한 이도 심장이 드래곤하트로 변질된다.
물론, 진짜 드래곤 하트와는 거리가 있다.
혈통에 따라 열화된 드래곤하트를 얻게 되며, 순혈이라 할지라도 진짜 드래곤 하트에는 한참 못 미친다.
<‘???’가 ‘용심혈(龍心血)’을 감지합니다.> 바벨 가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권한울은 반드시 이 혈통을 얻고자 했다.
용심혈을 가지고 있어도 진짜 드래곤하트를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권한울은 어떤 혈통이든 진혈(眞血)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진(眞) 용심혈이면 진짜 드래곤하트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용심혈을 얻고자 하였으나…….
<‘???’가 혈통의 습득을 보류합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사용자의 그릇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새로운 혈통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그릇을 확장시켜야 합니다.> 권한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무수한 혈통들을 습득해 왔지만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란은 잠시뿐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금방 냉정해질 수 있었다.
‘안 된다는 게 아니다. 그릇이 한계에 달했을 뿐.’
그릇을 확장시키면 또 다시 혈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릇이 무엇인지는 굳이 추론할 필요도 없었다.
육신, 즉 능력치다.
능력치를 상승시켜서 육체를 성장시킨다면 ‘???’가 말하는 그릇이 확장되리라.
“권한울 님?”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권한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티븐 바벨이 보였다.
“죄송하지만 이제 그만 손을 놓아주시겠습니까?”
그제야 권한울은 자신이 여태 스티븐 바벨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권한울은 냉큼 손을 놓았다.
“하하핫, 바벨 가문의 혈족을 처음 보셔서 놀라셨나 봅니다.”
압둘 라사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권선우가 반응했다.
“신기할 법도 하지. 바벨 가문의, 그것도 가주의 직속친위대를 만났으니.”
그 말에 순간, 압둘 라사드와 스티븐 바벨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로 조율사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친위대까지 보낼 정도면 보통 중요한 사안이 아닌 모양이지?”
“그게…….”
“걱정 말게 압둘. 자세히 물을 생각은 없으니.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중립을 지키는 게 라사드 가문의 절대규칙이 아닌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압둘 라사드는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스티븐 바벨 역시 허리를 숙였다.
“그럼 소개도 끝났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권선우의 말에 압둘 라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리 준비해놓은 태블릿피씨를 둘 앞에 내놓았다.
커다란 화면 속에 한 장의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어제 오후 2시쯤에 태평양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바다 위에 둥근 원반이 떠 있었다.
원반의 위에는 그보다 작은 원반이, 그 위에는 또 작은 원반이.
그런 식으로 열 개가 넘는 원반이 순차적으로 하늘에 떠 있었다.
“천공투기장이 5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말에 권한울은 몸이 확 달아올랐다.
천공투기장.
권한울도 익히 알고 있다. 아니, 전 세계 사람들 중에서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불규칙적인 주기로 갑자기 지구상에 나타나며 입장조건만 만족하면 누구나 입장할 수 있다.
층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참가자들끼리 경쟁을 하거나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한다.
높이 올라갈 수 록 순위가 높아지며, 더 좋은 보상을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천공투기장에 참가하는 진짜 목적은 따로 있지.’
명성.
기이하게도 천공투기장은 외부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렇기에 천공투기장이 나타날 때마다 수많은 방송사들이 앞 다투어 영상을 찍어서 방송을 했다.
세계적인 유망주들이 모여서 경쟁하는 모습이 재미가 없을 리가 없다.
때문에 천공투기장이 열리면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명성을 높이기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5년이라……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은 처음인 것 같군.”
“맞습니다. 본래 아무리 짧아도 10년이었는데. 무척 이례적인 경우입니다.”
“흐음.”
권선우는 사진 속 천공투기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립군. 한때 나도 저곳에 올랐거늘.”
“그리고 우승하셨죠. 이후에는 권혁 님과 권찬성 님께서 연달아 우승을 거머쥐셨고요.”
그 말에 권한울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헌터로 일할 당시. 흑천 일가의 신진고수가 압도적인 실력으로 천공투기장에서 우승했다고 들었다.
그게 권찬성이었을 줄은 몰랐다.
“이번에도 저희 라사드 가문에서는 흑천 일가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중립 가문이라는 특성상 라사드 가문은 천공투기장처럼 세계적인 행사를 주관하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
압둘 라사드가 굳이 흑천 일가에 찾아와서 천공투기장 소식을 알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에는 어느 분께서 참가하실 예정이십니까?”
그 물음에 권선우가 시선을 돌려서 쳐다봤다.
권한울을.
“……예?”
당황한 나머지 권한울은 얼빠진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제가 참가하라고요?”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겠느냐?”
불현듯 권선우가 말했던 조건이 떠올랐다.
“설마 흑천의 명성을 높일 기회라는 게…….”
“그래, 천공투기장에서 우승하면 네가 바라는 대로 모든 약재를 지원해 주마.”
권한울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그래도 천공투기장이라니?
지구상의 모든 가문, 그리고 대형 길드, 유명한 실력자들이 몰려드는 엄청난 자리다.
참여하는 것만으로 어디서든 실력자로 인정받는 그곳에서 우승하라니?
“왜? 자신 없느냐?”
권선우가 도발하듯 물었다. 그제야 비로소 권한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요.”
놀랐던 것은 어릴 때, 동경해 마지않던 천공투기장에 직접 참가하게 됐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흑천의 이름을 우승자의 자리에 올려놓겠습니다.”
권한울의 대답에 압둘 라사드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불가능하겠군요.”
그리고 대뜸 한 마디를 했다.
“권한울 님께서는 자격 미달이라서요.”
아주 충격적인 한 마디를.
* * *
“그러니까 아직은 자격 미달이라는 말입니다.”
압둘 라사드의 말에 권한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공투기장은 5달 뒤에 열립니다. 그때까지 조건을 만족하셔야 합니다.”
압둘 라사드는 뒤 이어 조건을 설명했다.
“천공투기장의 참가 조건은 S급 능력치를 세 개입니다. 초과도, 미달도 안 됩니다.”
“특이한 조건이네요. 딱 S급 능력치 세 개만 가능하다니.”
“천공투기장은 공정한 경쟁을 위한 자리라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추측만 존재할 뿐, 명확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권한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현재 그의 능력치는 체력이 S급, 마력과 근력이 AAA급이고 나머지는 전부 A급이다.
페르드랑스를 쓰러트리고 많은 약재를 얻기는 했지만 그건 전부 능력치와는 상관이 없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그마저도 환골탈태에 써야 하고.
권한울은 슬쩍 권선우는 쳐다봤다. 권선우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꿈도 꾸지 마라.”
예상했던 반응에 권한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직 권미가 남아 있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모처럼 빚을 씌워놨는데. 이런 일로 소모하기는 아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었다.
굳이 천공투기장 때문이 아니더라도 권한울이 새로운 혈통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능력치를 상승시켜야 했다.
게다가 우승을 하면 환골탈태를 살 수 있는 재료까지 얻을 수 있다.
권한울로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잠깐만.’
불현듯 건강혈이라는 이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건강혈은 본래 능력치도 상승시켜주는 혈통이었다. 하지만 권한울의 능력치가 A급이 되면서 그런 일은 없어졌다.
권한울은 건강혈로 올릴 수 있는 능력치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넘겼지만.
‘저번에 배철민이 말했지.’
강철대의 반역자 배철민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떻게 건강혈로 그렇게 강해졌냐고.
그때 배철민은 지옥에 살면 된다는 아리송한 말을 남겼다.
‘극독을 받아들임으로서 건강혈은 만독불침지체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죽을 만큼 고생을 한다면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AAA급인 근력과 마력을 S급으로 올릴 수 있을 지도 몰랐다.
* * *
권한울을 예비 후보자 명단에 올린 뒤, 압둘 라사드는 바벨 가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불만이 많아 보이는군.”
압둘 라사드는 스티븐 바벨을 바라보며 물었다.
돌로 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압둘 라사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꼭 흑천 일가를 들리셔야 하셨습니까?”
“말하지 않았나. 흑천을 방문하는 것은 내 업무 중에서 특히 중요한 일이라고.”
권선우와 친분의 유지하는 것은 압둘 라사드에게, 아니 라사드 가문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권선우의 호감을 사야 한다. 그래서 일부러 천공투기장에 대한 내용을 서류가 아니라 직접 방문해서 알린 것이다.
중립 가문이라는 위치는 고도의 줄타기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니 말이다.
“제 말은 그걸 굳이 바벨 가문에 가는 길에 하셔야 했냐는 말입니다.”
스티븐 바벨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라사드 가문이 비행기가 없어서 쩔쩔매는 가문도 아니고, 바벨 가문에 가는 길에 겸사겸사 방문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심술을 좀 부려봤네.”
압둘 라사드의 발언에 스티븐 바벨은 미간을 살짝 좁아졌다.
하지만 차마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압둘 라사드를 데려오기 위해서 바벨 가문이 부린 억지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 늙은이가 얼마나 바쁜 몸인 줄 알고 있나? 과장 좀 보태서 향후 5년까지 모두 예약이 잡혀 있다네.”
라사드 가문에서도 특급조율사의 숫자는 많지 않다.
특급조율사가 되기 위해서는 순(純) 천재혈 이외에도 많은 재능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압둘 라사드는 그 몇 안 되는 특급조율사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만큼 전 세계에서 그를 찾는 사람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바벨 가문 때문에 이 늙은이의 일정이 전부 어그러졌단 말일세.”
압둘 라사드를 데려오기 위해서 바벨 가문은 막무가내로 행동했다.
라사드 가문에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기도 했고, 케케묵은 은원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결국 라사드 가문은 학을 떼며 압둘 라사드의 모든 일정을 취소시키고 파견을 보낸 것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부디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스티븐 바벨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압둘 라사드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스티븐. 내 한 번 더 당부합세.”
“말씀하시지요.”
“내가 가도 가주를 치료하지 못할 수도 있네.”
스티븐 바벨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럴 리가요. 압둘 라사드 님께서는…….”
“특급조율사지.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하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내가 못 보는 것들도 많은 법이라네.”
스티븐 바벨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만약.”
잠시 후, 스티븐 바벨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압둘 라사드 님조차 가주님을 치료할 수 없다면 남은 방도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물음에 압둘 라사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스티븐 바벨의 얼굴에 깊은 실망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못한다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가주를 낫게 할 수는 없을 걸세.”
마지막으로 압둘 라사드가 덧붙였다.
“진(眞) 천재혈을 가지고 계셨다는 시조님이 살아서 돌아오시면 또 모를까.”
* * *
“꽤 빨리 결정을 내렸구나.”
압둘 라사드와 스티븐 바벨이 떠난 뒤, 권선우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천공투기장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권한울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어릴 적, 고아원에서 자랄 때부터 천공투기장에 대해서 들었다.
TV에서 간간히 틀어주는 천공투기장의 영상을 보며 흥분했다.
전 세계의 강자란 강자가 모두 모이는 그곳에 나도 서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다.
하지만 성인이 됐을 때, 권한울은 천공투기장에 서 기는커녕 삼류 헌터에 불과했다.
그랬던 자신이 천공투기장에 오르게 됐다.
그것도 흑천 일가의 이름을 달고.
“아, 그렇지.”
“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번 천공투기장에서 네가 진혈임을 밝히려고 한다.”
그 말에 권한울의 동공이 커졌다.
지금까지 흑천 일가 내에서는 암묵적으로 권한울이 진혈임을 숨기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진혈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괜히 외부에 알려지는 것보다는 숨기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싶더구나.”
하지만 그건 흑천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 보물이 있으면 도둑맞을까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랑하는 것이 흑천이 아니던가.
“만약 네가 진혈이라는 게 알려지면 아주 볼만한 일이 벌어질 거다.”
모든 가문의 시조들은 진혈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권능을 이용해서 무수한 신화를 이루었다.
그 진혈이 현대에 다시 태어났다,
아마 전 세계의 모든 세력들이 진혈이 끼칠 영향을 계신하느라 한동안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선택을 너한테 맡기고 싶구나.”
권한울은 귀를 의심했다. 이 강압적인 회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이것도 시험이 아닐까 의심부터 들었다. 하지만 회장을 얼굴을 본 순간, 권한울은 깨달았다. 회장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진혈임이 밝혀지면 너는 단숨에 유명인이 될 게다.”
권한울이라는 존재가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될 것이다.
그만큼 위상도, 위치도 격상되리라. 다른 헌터들은 억만금을 들여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네가 짊어질 무게도 커지게 되겠지.”
안 그래도 큰 세력을 자랑하는 흑천 일가가 진혈마저 품었다.
이 소식을 반길 사람은 단언 컨데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선택은 네 자유다.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봐라.”
얄밉게도 권선우는 권한울의 마음에 파문만 일으키고 축객령을 내렸다.
“비고 담당자에게는 이미 말을 해 놨다. 팀원들을 데리고 언제든지 찾아가면 문을 열어줄 게다.”
하지만 비고라는 말에 그런 마음은 싹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방을 나온 권한울은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