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16화>
116. 산체스 가문 (6)
“그렇다고 지금 당장 너한테 시킬 일은 없고…….”
마리아 산체스가 가문 내에서 굉장히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은 알겠다.
이를 잘 이용하면 분명 굉장한 이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를 지배한 이유는 초인혈의 금제 때문이다.
“돌려보내 주지. 혹시 산체스 가문이나 판데모니엄에서 수상한 짓을 벌이려고 하면 나한테 연락해.”
권한울은 명함을 꺼내서 그녀에게 건넸다. 마리아 산체스는 명함을 받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끝이야?”
“끝이야.”
“나, 날 이용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텐데…….”
스스로 말하고도 마리아 산체스는 당황했다.
지금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산체스 가문을 멸문시킬 수도 있을 거고…… 아니면 가문의 보물을…….”
“워…… 가문에 불만이 굉장히 많았나 봐? 메이홍이랑 죽이 잘 맞겠는데.”
그 말에 마리아 산체스는 발끈했다. 지금 남이 말을 하고 있는데. 저런 식으로 비꼬다니.
“다 구미가 당기는 소리긴 한데…… 전부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 할 거 아니야.”
흑천 일가를 봐서 잘 알고 있다. 유명한 가문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되고, 지켜지는지 말이다.
기껏해야 배신자 몇 명으로 어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그 배신자가 마리아 산체스라 하더라도 말이야.
“무엇보다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이제 곧 있을 천공투기장을 준비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메이 가문의 잔당들에 대해서 대비해야 했다.
“그러니 이 정도가 딱 좋은 거 같다.”
그리 말한 뒤, 권한울은 마리아 산체스를 남겨놓고 떠났다. 주하연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권한울 님!”
마르코스 산체스가 권한울을 보고 반색했다.
“전부 지켜봤습니다! 마리아 누님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정말 권한울 님은…….”
“아, 그래.”
바닥에 엎드려서 신발이라도 핥은 기세였다.
“너도 이제 돌아가라.”
그 말에 마르코스 산체스는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는 곁에서 권한울 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안 돼. 당장 돌아가.”
권한울의 단호한 태도에 마르코스 산체스는 어쩔 수 없이 마리아 산체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쉬움이 남는지. 돌아가는 내내 몇 번이고 권한울을 뒤돌아봤다.
그런 마르코스 산체스를 보며 권한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마르코스 산체스는 이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행동하는데. 마리아 산체스는 어째서 달랐던 것인가.
“거참 이상하네.”
* * *
“누님.”
“닥쳐. 그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마리아 산체스가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진짜 마르코스 산체스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이번 일을 용서해 주라고 권한울이 명령을 내리고 갔기 때문이다.
“우선 애들한테 퇴각 명령 내려. 칸 산체스 어르신한테도.”
“알겠습니다!”
마르코스 산체스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권한울에게 머리를 붙잡히고 난 다음부터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게 됐다.
더 기분이 나쁜 것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지……?”
기분 나쁜 척 했던 것은 연기였을 뿐이다.
사실 마리아 산체스는 권한울의 명령을 듣는 것이 기뻤다.
실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말도 안 돼. 미쳤어. 진짜 미쳤어.”
문득 마리아 산체스는 권한울이 마지막에 했던 물음이 떠올랐다.
가주까지 될 수 있냐던 그 말.
막상 권한울은 가주가 되라는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냥 가문과 판데모니엄의 동향만 살피라고 했을 뿐.
하지만…….
“……가주가 되면 그분께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겠지?”
어느새 마리아 산체스는 권한욿을 그 분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권속혈의 무서운 점이 이것이었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인에게 몸과 마음이 모두 종속이 되는 것.
“……그래, 그럴 거야.”
그녀가 목표를 세운 그 순간, 불꽃 하나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펑 터졌다.
마르코스 산체스가 피워 올린 퇴각신호였다.
* * *
현재 권후돈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을 맞이했다.
“이걸 어떻게 한담…….”
권후돈의 앞에는 한 여성이 기절한 체 널브러져 있었다.
라리사 산체스.
권후돈과 싸웠던 산체스 가문의 혈족이었다.
“진짜 어떻게 하지.”
전투가 시작된 직후, 권후돈의 주먹 한 번에 라리사 산체스는 기절했다.
문제는 거기부터였다.
적이니 죽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렇게 기절한 상대를 죽이려 하니 선뜻 손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아…… 처음 때릴 때, 힘을 더 줬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일격에 죽었을 테고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게 아닌가.
“으으음.”
권후돈은 라리사를 보며 계속 망설였다.
그때, 하늘에서 폭죽이 펑 터지는 게 보였다.
“저게 뭐지?”
권후돈이 의아하게 생각하던 찰나, 라리사 산체스의 몸이 꿈틀거렸다.
“으, 으윽 머리야…….”
깨어난 라리사 산체스를 보며 권후돈을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절한 사람을 죽이는 게 망설여졌는데. 이제 라리사 산체스가 깨어났으니 고민이 해결됐다.
라리사 산체스가 다시 덤비면 이번에야 말로…….
“……절 살려 주셨군요.”
권후돈의 생각이 순간 멈췄다. 방금 뭐라고 했지?
“저는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데…… 당신은 이렇게까지…….”
라리사 산체스의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 맺혔다.
아무래도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지금 상황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했다.
“퇴각신호가 떨어졌네요.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게요.”
리리사 산체스가 땅을 박차며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권후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냥 미리 죽일 걸.”
* * *
“살려 주라.”
격전 끝에 목을 베려던 찰나였다.
대뜸 카롤리나 산체스가 말했다.
“뭔 개소리에요.”
“죽기 싫으니까 살려 달라구.”
그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카롤리나 산체스는 목숨을 구걸하는데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었다.
“어차피 네가 이겼잖아. 그러니 그 정도 자비는 베풀어 줄 수 있지 않아?”
카탈리나 산체스와의 전투는 쉽지 않았다.
대형 무기를 깃털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그녀의 맹공에 메이홍은 몇 번이고 위험한 순간에 몰렸다.
하지만 결국 승리한 사람은 메이홍이었다.
“그러니 살려 주라.”
“당신을 살려 두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요. 후환은 미리미리 없애 두는 게 낫잖아요.”
“그 말도 일리가 있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날 살려 주면 언젠가 꼭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메이홍의 눈동자가 게슴츠레해졌다.
“전 당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요.”
“이 세상에 ‘절대’란 없는 법이야. 혹시 알아? 언젠가 내가 널 도와줄지.”
메이홍은 칼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더 이상 이 헛소리를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메이 가문의 동향이 궁금하지 않아?”
하지만 그 말에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어요?”
“지금 당장은 몰라. 하지만 메이 가문이 너희 흑천을 공격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뒷 세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지.”
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메이홍의 눈동자에 핏줄이 섰다.
“아는 것도 없이 나한테 메이 가문을 협상 재료로 내미시겠다?”
카롤리나 산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지.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이런 불확실한 정보에 매달려야할 정도로 아는 게 없잖아.”
그 순간, 메이홍이 쥔 칼이 번쩍였다. 카롤리나 산체스의 목덜미에 옅은 검상이 그어졌다.
“……꺼져요. 약속은 잊지 말고.”
“고마워.”
카롤리나 산체스는 망설임 없이 도망쳤다.
메이홍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봤다.
* * *
“잡았다!”
브루노 산체스가 양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산체스 가문에서 가장 튼튼하다는 평가에 맞지 않게 브루노 산체스의 몸은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이런 굴욕도 이제 끝이다 적을 붙잡기만 하면 이 두 손으로 비틀어서 죽여 버릴…….
그때, 가엘 가르시안이 허공을 움켜잡았다.
악마의 마력이 모여들며 참수용 도끼를 만들어 냈다. 그것을 본 브루노 산체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야! 그건 반칙……!”
검은 도끼가 수직으로 떨어진다. 브루노 산체스의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검은 선이 그어졌다.
검은 선에서 이윽고 피가 터져 나왔다. 브루노 산체스의 눈동자가 뒤집히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가엘 가르시안은 브루노 산체스의 머리를 움켜잡고 높게 쳐들었다. 사망을 확인한 뒤에야 악마화를 해제했다.
“크으…… 역시 자주 사용할 기술은 아니군.”
악마의 힘을 불러내면 막대한 힘을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부담이 컸다.
그때, 하늘 위로 불덩어리가 치솟더니 펑 터졌다. 성대한 불꽃을 만들어냈다.
“이 대낮에 불꽃놀이라고?”
가엘 가르시안은 의아해했지만 곧 의문을 접었다.
“대장한테 합류해야겠어.”
가엘 가르시안은 브루노 산체스를 내버려 둔 채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직후였다.
“끄어어어!”
숨을 오랫동안 참았다 내뱉는 듯한 소리와 함께 브루노 산체스가 고개를 쳐들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누가 들었으면 기겁을 했을 소리였다.
브루노 산체스는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베였다. 두 동강이 난 것은 아니지만 죽어야 마땅한 상처였다.
“다시는 저놈이랑 싸우지 말아야지.”
브루노 산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하늘에 떠오른 불꽃을 쳐다봤다.
“마침 퇴각신호도 떨어졌겠다. 빨리 도망쳐야지.”
* * *
하늘을 뒤덮은 불꽃을 보며 칸 산체스는 당황스러워했다.
퇴각신호라니? 이 시점에서? 마리아 아가씨께서는 무사히 시조의 보물을 손에 넣으신 건가?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불가능.
도망치는 것도 어느 정도 급이 맞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것이다.
흑천제일권, 이 괴물같은 작자를 뿌리치고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산체스 가문은 알아보기 쉬운 퇴각신호를 사용하는군.”
권명우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퉷.”
칸 산체스는 대답 대신 피가 섞인 침을 뱉어냈다. 방금 전, 턱을 얻어맞으면서 입안이 찢어졌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시지.”
“어린놈이 투지 하나는 제법이구나. 이렇게까지 몰리고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다니.”
이미 덴트 데 리오 부대원들은 모두 쓰러졌다. 대다수가 죽었으며 살아 있는 이들도 치명상을 입었다.
칸 산체스는 비교적 멀쩡했으나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때, 권명우가 의외의 행동을 했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은 것이다.
당황한 칸 산체스에게 권명우가 말했다.
“부상자를 데리고 돌아가라.”
칸 산체스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와 부대원들을 살려 주겠다는 뜻인가?”
권명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이 몸을 상대로 버티고, 투지까지 잃지 않은 그대에게 내리는 보상이다.”
그 순간, 칸 산체스는 분노했다.
“대체 우리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냐!”
적에게 상처 한 번 입히지 못하고, 목숨을 동정받기까지 했다.
전사에게 이보다 더한 굴욕이 있겠는가.
“당장 일어나라! 나와 싸우란 말이다!”
칸 산체스의 살의에 권명우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자네는 이제 막 산체스 가문의 최강이라는 자리를 물려받았지. 그 자리는 가문을 대표하는 자리.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 자리를 물려받은 순간부터 시작이라네.”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 막 싹이 자라기 시작한 자네를 지금 짓밟아서야 아쉽지. 나중에 더 강해지면 그때 보도록 합세.”
적의 성장을 기대하겠다니. 지독하리만큼 오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칸 산체스는 감히 그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직접 경험해 본 권명우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남자였으니까.
“……빌어먹을.”
칸 산체스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부대원들을 수습했다.
이미 죽은 부대원들은 아공간에 넣었다. 시신이라도 가져가야 했기 때문이다.
“흑천제일권. 다음번에 만날 때는 지금과는 다를 거다.”
“멀리는 안 가겠네.”
권명우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칸 산체스가 사라지자 권명우는 주먹으로 등을 토닥였다.
“아이구, 허리야. 나도 나이를 먹었나.”
아무리 권명우의 실력이 독보적이라 한들 칸 산체스는 산체스 가문을 대표하는 헌터다.
거기에 산체스 가문의 최고라 불리는 부대까지 합세했으니 권명우라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제법이야.”
만약 칸 산체스가 기대 미만이었다면 권명우는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칸 산체스는 제법 진지하게 싸운 자신을 상대로 버텨냈다.
“형님은 안 좋은 버릇이라고 말했지만 어쩔 수 있나.”
마음에 드는 적을 놔줄 정도로 전투를 즐기기에 권명우는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어디 다른 놈들을 만나러 가 볼까.”
권명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