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19화>
119. 이름 (3)
권한울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권명우는 자신의 깨달음 권한울에게 전수해 주려 하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흑천제일권이라 불리는 절대자가 말이다.
“……잊지 않고 꼭 나가겠습니다.”
권한울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권명우는 기대하라는 듯 씩 웃었다.
“그럼 이만 우리도 해산할까? 다들 지쳤을 테니 푹 쉬면서…….”
권명우가 말끝을 흐렸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이 잡힌 정장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올백 머리.
흑천 그룹의 부회장 권혁이었다.
“작은아버지,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권혁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격식이 느껴지는 인사를 받고도 권명우는 뚱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네가 웬일로 날 찾아온 게냐.”
“하하핫, 가족끼리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아무 일도 없이 찾아올 놈이 아니지 않느냐.”
“역시 숙부님께서는 저를 잘 아시는군요.”
권혁이 실없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사실은 우리 조카를 만나러 왔습니다. 이번에 유명대로 승급이 결정됐다고 들어서요.”
권혁의 시선이 권한울에게 옮겨갔다. 얼굴에는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승급이 된 걸 축하한다. 이제 너도 정식으로 흑천의 헌터로 인정을 받게 됐구나.”
“감사합니다.”
권한울이 짧게 대답했다.
“부대명은 뭐지?”
“흑암대입니다.”
“오호, 흑암대라. 천이가 받기로 했던 이름을 네가 물려받게 됐구나.”
권혁은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손으로는 권한울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렇게 단기간에 유명대로 승급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만약 천이가 네 모습을 보았더라면 크게 기뻐했을 거다.”
표정과 태도만 놓고 보면 권혁은 순수하게 권한울의 성공을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권한울은 권혁에 대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처음 이 남자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을 보는 것처럼 본능적인 혐오와 불안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널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별안간 권혁의 어조가 바뀌었다.
“아들이라는 녀석이 자신을 죽인 흑천 그룹에서 호의호식하는 모습을…….”
“이놈!”
권명우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장 그 입을 다물지 못할까!”
“숙부님. 왜 이렇게 화를 내십니까. 제가 마냥 근거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놈이 그래도!”
권명우가 살기를 일으켰다. 피부를 태울 듯한 기운이 권혁에게 집중되었다.
놀랍게도 권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기운을 모두 받아냇다.
“한울아, 그거 아느냐? 너는 네 아버지가 가문을 배반했다고만 알고 있겠지. 하지만 진실은 조금 다르단다. 네 아버지는 사실 회장님이…….”
“닥치라고 했다!”
권명우가 분노를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권혁의 멱살을 움켜쥐려 했다.
두 손이 섬광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권혁에 의해 허공에서 붙잡혔다.
“숙부님. 진정하시죠.”
모두가 놀랐다.
흑천제일권이라 불리는 권명우의 두 손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심지어 권혁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조카의 승급을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감히 네놈이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
권명우의 이마에 혈관이 돋아났다. 눈동자 안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때, 권한울의 한 마디가 두 사람의 귓가에 꽂혔다.
권명우와 권혁은 동시에 권한울을 돌아봤다.
“회장님께서 먼저 제 아버지께 사형을 명하셨고 아버지께서는 사형을 피하기 위해서 가문을 도망쳤죠. 그래서 배반자로 몰리지 않았습니까.”
“너, 너 그걸 어떻게……..”
권명우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그에 비해 권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걸 어디서 알았지?”
권혁의 물음에 권한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죠. 안 그렇습니까?”
권혁은 권명우의 손을 놓았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권한울에게 말했다.
“그럼 회장님께서 네 아버지에게 왜 사형을 명했는지는 알고 있느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권한울의 대답에 권혁의 입 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그럼 내가 충고 하나만 해 주마.”
별안간 권혁이 거리를 좁혔다. 권한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회장님을 너무 믿지 마라. 지금은 너에게 우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네가 조금이라도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바로 버릴 테니까.”
다시 거리를 벌리며 권혁이 덧붙였다.
“네 아버지처럼 말이다.”
권한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게 퍽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권혁은 걸음을 옮겼다.
“저 빌어먹을 놈이.”
멀어지는 권혁을 향해 권명우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여간 사람 기분만 잡치게 하는 놈이야. 한울이 너도 욕봤구나.”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냐. 젠장…….”
권명우는 바닥에 침을 퉤 뱉은 뒤 말했다.
“기분 나쁜 일은 잊고 이제 진짜로 해산하자. 가서 푹 쉬도록 해라!”
* * *
권혁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더 이상 남아 있다가는 분노한 권명우에게 한 대 얻어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고생하셨습니다.”
어느 순간, 한 청년이 권혁의 뒤에 따라붙었다. 권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대화만 나누고 왔는데. 고생이랄 게 있나.”
“작은할아버지의 살기를 견뎌내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건 좀 힘들었지.”
청년, 권찬성의 말에 권혁이 동의했다.
“숙부님께서도 늙으셨어. 옛날 같으면 기세를 받아내는 건 고사하고 쳐다보기도 힘들었을 텐데.”
“어쩌면 아버지께서 강해지셔서 그런 걸지도 모르죠.”
권찬성의 아부 섞인 말에 권혁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권한울이 저 녀석이 자기 아버지에 대한 것을 제법 많이 알고 있군. 예상외야.”
“정보의 출처를 한 번 알아볼까요?”
“됐다. 뭐 하러 굳이 그런 짓을 하느냐. 어차피 곧 사리질 녀석인데.”
별안간 권찬성이 입을 다물었다. 불만이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우리 아들. 할 말이 많은 거 같구나. 네 손으로 권한울을 끝내지 못해서 그러는 거냐?”
“아닙니다. 다 제가 부족한 잘못이죠.”
“부족하긴 했지.”
그 순간, 권찬성은 오한을 느꼈다.
“내가 몇 번이고 강조를 했거늘. 결국 권한울 저놈을 처리하지 못하지 않았더냐.”
권찬성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권혁은 한 번 실망한 사람에게는 두 번 다시 중책을 맡기지 않았다.
물론 권찬성은 자식이고, 가문 내외로 명성이 높으니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혁의 성격을 생각하면 또 모를 일이었다.
“기껏 카탈리나 블라가까지 소개시켜 줬거늘…… 이게 대체 뭐냐.”
“면목 없습니다.”
“뭐, 따지고 보면 내 잘못도 있지. 카탈리나 블라가가 그렇게 어려운 여자일 줄은 몰랐거든.”
첫 거래 이후, 카탈리나 블라가는 더 이상 권찬성을 상대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권찬성 같은 애송이와 더 이상 나눌 이야기는 없다는 것.
그 때문에 권혁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일은 모두 그 여자가 알아서 해 줄 것이야.”
“하지만 아버지. 저는 아직도 걱정입니다. 그 여자가 과연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지…….”
아들의 걱정에 권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아들. 걱정도 많구나. 그래서 이 아비가 카탈리나 블라가에게 미리 밝히지 않았더냐. 권한울이 진혈이라고 말이다.”
권한울이 진혈이라는 것을 알게 된 카탈리나 블라가는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소유욕을 내비쳤다.
인간수집가라 불리는 그녀에게 진혈은 실로 엄청난 가치가 있을 터.
“게다가 회장님께서 그 사실을 이번 천공투기장에서 공개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해 줬잖느냐.”
권한울이 진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럼 권한울을 납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천공투기장이 시작되기 전에 권한울을 납치하려 할 거다.”
그럼 눈엣가시 하나가 사라지게 되겠지.
그리 말하며 권혁은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아버지 그렇게 되면…….”
권찬성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블라가 가문에 진혈을 빼앗기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진혈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진혈이란 혈통의 근원.
만약 블라가 가문이 권한울을 확보한 이후, 흑룡혈을 양산하려 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흑천 일가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아들의 물음에 권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대로 권한울, 그놈이 계속 성장한다면 언젠가 가문의 정점에 다다를 거다.”
흑천의 혈족은 결국 강한 자를 따르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회장님께서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지.”
대다수가 모르고 있지만 권혁은 알고 있다.
회장 권선우가 권한울을 얼마나 애지중지하고 있는지 말이다.
“이대로 손 놓고 지켜보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블라가 가문에게 넘겨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 설사…….”
다음에 이어지는 대답에 권찬성은 섬뜩함을 느꼈다.
“가문이 멸문하는 한이 있더라도.”
* * *
그날 저녁, 권한울은 저택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권명우를 만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부수면 된다고 했지?”
권한울은 찻잔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 찻잔을 깨트리면 초인혈의 시조가 남긴 안배를 얻을 수 있다.
그 안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산체스 가문에서 총전력을 동원해가면서까지 얻으려고 했던 물건이다.
분명히 대단한 물건일 것이다.
“한번 해 볼까.”
권한울은 찻잔을 움켜잡았다. 워낙 작기에 한 손으로도 충분했다.
“흡!”
찻잔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기세로 힘을 주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흐읍!”
아무리 힘을 줘도 찻잔이 깨지질 않았다.
“……이거 왜 이래.”
이번에는 양손으로 쥐었다. 동시에 힘을 주었다.
“흐으으읍!”
마력까지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찻잔은 요지부동이었다.
“……와, 이거 은근히 사람 열받게 만드네.”
권한울은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먹을 쥐었다.
어차피 깨트리기만 하면 되니 주먹을 내려치면…….
“권한울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때, 밖에서 주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한울은 치켜들었던 주먹을 내려놓았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주하연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돌아오신 건가요?”
비서가 주하연을 데려간 이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엄청 길었나 보네요.”
“사정이 좀 있어서요.”
그 말을 끝으로 묘한 침묵이 흘렀다.
둘 다 수다를 즐기는 성향이 아니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만 이런 게 아니었다. 산체스 가문과 전투가 벌어진 이후, 몇 번이고 이런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하연 씨, 혹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주하연이 먼저 말했다.
“권한울 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주하연이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혹시 초인혈을 보유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