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22화>
122. 블라가 가문 (2)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가능한 빨리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공투기장에 참가해야 하는데. 골치 아프게 됐군.”
천공투기장이 시작될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여유를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카탈리나 블라가에게 붙잡혀 있을 수 없었다.
“이봐.”
권한울은 옆에 있던 벤 블라가를 불렀다. 벤 블라가는 재빨리 대답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이 배에서 도망칠 방법이 있나?”
바다 위라고 하지만 권한울의 실력이라면 바다 위를 달려서 내륙까지 도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없습니다.”
그러나 벤 블라가는 고민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권한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이 배는 보통 배가 아닙니다. 권한울 님께서는 현재 카탈리나 블라가 님께서 지배하고 있는 몬스터의 등 위에 탑승하고 계십니다.”
“몬스터라고?”
“블루아이즈라 불리는 가오리 형태의 해양 몬스터입니다. S급이라 판정받았을 정도로 위험한 몬스터입니다. 바다에서 블루아이즈의 감각을 속이고 도망치는 건 불가능합니다.”
몬스터를 지배한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S급이라니.
만약 카탈리나 블라가가 아니었다면 헛소리라며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이곳에는 카발리에리 움브라(Cavalieri umbra)가 두 분이나 계십니다. 아무리 권한울 님이라 해도 그분들을 뿌리치는 것은 힘드실 겁니다.”
“카발리에리 움브라?”
“카탈리나 블라가 님의 권속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분들만 모아 놓은 기사단입니다. 트로이 님도 카발리에르 움브라이십니다.”
권한울은 방금 전 겪어 봤던 트로이의 기세를 떠올렸다.
그런 실력자가 한 명이 더 있다니. 배에서 도망치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블라가 가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인데…….”
흑천 일가만큼은 아니지만 블라가 가문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가문이다. 그런 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카탈리나 블라가가 권한울을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아니지 차라리 블라가 가문에 들어가는 게 나으려나?”
하위 권속혈은 상위 권속혈을 거스를 수 없다.
권한울이 보유하고 권속혈은 진혈. 어지간한 블라가 가문의 혈족들은 권한울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다.
다만, 모든 혈족들을 지배할 수는 없다.
현재 권한울의 수준으로는 카탈리나 블라가처럼 너무 강력한 혈족은 지배할 수 없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카탈리나 블라가 급만 아니라면 다 지배할 수 있다는 거지.”
대다수의 블라가 혈족들은 권한울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을 이용하면 가문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정리됐다.”
블라가 가문으로 가서 다수 혈족들을 지배하고 탈출경로를 찾아낸다.
그 뒤, 흑천 일가에 카탈리나 블라가의 만행을 알리고 자신은 천공투기장에 참가하면 된다.
권한울이 생각을 끝마쳤을 때였다.
다시금 문이 벌컥 열렸다. 이번에는 또 다른 블라가 가문의 혈족이 안으로 들어갔다.
“벤, 뭐 하느라고 이렇게 늦게 와?”
이번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여자 혈족은 권한울을 보자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탈리나 님을 그렇게 애타게 만든 남자가 누군가 했더니. 생각보다 되게 젊네.”
대뜸 여자 혈족이 권한울의 턱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외모는 괜찮네. 근데 이해가 안 돼. 카탈리나 님은 이보다 좀 더 중후한 외모를 좋아하셨…….”
“네 이년!”
벤 블라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여자 혈족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깜짝이야! 당신 미쳤어?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감히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알고!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거냐! 당장 무릎 꿇고 사과를 드려라!”
여자 혈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권속 따위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당신 진짜 미쳤지?”
“이년이 그래도!”
벤 블라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 권한울이 손을 들어서 벤 블라가를 막았다.
“뭐 하러 싸우고 그래. 어차피 지금부터 두 사람 다 날 도와야 하는데.”
“무슨 정신나간 소리…….”
권한울은 여자 혈족을 바라보며 권속혈의 권능을 사용했다.
권능을 발현하자마자 여자의 얼굴이 몽롱하게 변했다. 이윽고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권한울의 앞에 엎드렸다.
“이거 되게 쉽네.”
카탈리나 블라가 급만 아니라면 블라가 혈족은 반항조차 못하고 권한울에게 복종했다.
아니, 이걸 복종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예 종속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순(純) 권속혈을 복종시키셨습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반(半) 구현화 조건이 개방됩니다.>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을 만족할시 뱀파이어 로드의 반 화신체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권한울은 메시지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잠시 후,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오호?”
* * *
“꺄아!”
개인실에 들어오자마자 카탈리나 블라가는 환호성을 지르며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넓직한 킹 사이즈 침대 위를 마구 뒹굴거리면서 연신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권한울을 데려왔다! 데려왔어!”
그렇게 한참동안 온몸으로 기쁨을 표출하고 나서야 카탈리나 블라가는 진정을 했다.
침대 위에 앉아서 트로이에게 손짓을 했다.
“트로이. 물 한 잔 주실래요?”
트로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이 담긴 유리잔을 내밀었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물잔을 비운 뒤, 다시 트로이에게 내밀었다.
그때였다.
-카탈리나 님.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대꾸했다.
“K. 무슨 일인가요?”
-흑천 일가의 정보부가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권한울의 전용기에 걸어 놓았던 환영이 해제된 듯합니다.
“벌써요? 그렇게 비싼 유물을 사용했는데? 흑천의 마녀가 타고 있어서 그런가?”
카탈리나 블라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차피 비행기에 걸어 놓은 환영은 권한울을 납치하기 위한 틈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을 벌었으면 좋았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증거는 다 없앴죠?”
-예, 설치된 유물들은 모두 회수하고 현장은 파괴했습니다. 관련된 자들에게는 자살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시 K에요. 아주 훌륭해요.”
-하지만 상대는 흑천입니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여도 결국 꼬리를 찾아낼 겁니다.
K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걱정이 너무 많네요. 흑천이 그렇게 무섭나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흑천의 악명은 카탈리나 블라가를 광신적으로 추종하는 카발리에르 움브라조차 두려워할 정도였으니까.
“진혈을 납치하는 일이에요.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데. 흑천이 모르길 기대하는 건 양심 없는 짓이죠.”
카탈리나 블라가는 침대 옆에 마련된 견과류를 집어들었다.
아작, 입안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흑천에서 선전포고를 하면…….
“그때는 싸워야죠.”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대답에 K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가 기대했던 대답은 권한울을 돌려보내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카탈리나 블라가는 권한울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문에 도착하면 뭐부터 할까요? 어떻게 해야 권한울을 제 권속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네요.”
포기하기는커녕 권한울을 권속으로 만들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페르드랑스와 싸워서 이긴 걸 보면 독도 통하지 않을 거고. 흑천 일가 소속이었으니 재물도 통하지 않을 거고. 역시 이럴 때는 여자 대 남자로. 몸으로 유혹하는 수밖에 없겠죠?”
-……저는 이만 흑천의 동태를 살피러 가보겠습니다.
“아, 대답은 해 주고 가세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다급하게 K를 불렀다. 그러나 이미 K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하는 수 없이 트로이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해야 권한울을 권속으로 삼을 수 있을지 말이에요.”
그 물음에 트로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오랫동안 고민한 뒤, 대답했다.
“복종할 때까지 패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카탈리나 블라가는 대놓고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트로이에게 기대한 제가 바보죠.”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근골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최대한 많은 고통을…….”
“됐네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할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카탈리나 블라가는 다시 침대를 뒹굴거리며 고민을 시작했다.
누군가를 권속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마음이 완전히 카탈리나 블라가에게 넘어와야 한다.
환영을 써도 좋고, 재물로 유혹해도 좋다. 어쨌든 그럴 마음만 들게 하면 된다.
문제는 권한울에게는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그냥 곱게 넘어 와 주면 참 좋을 텐데.”
말과 달리 카탈리나 블라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 * *
이상하다.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며 트로이는 생각했다.
카탈리나 블라가가 남자에게 관심을 가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새로운 권속을 들일 때마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 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단순히 애정을 품는 정도가 아니라 집착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탈리나 블라가가 권한울에게 종속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동지들에게 알려야 할지도 모르겠군.’
카탈리나 블라가의 권속들 사이에는 한 가지 특이한 규칙이 있었다.
누군가 딱히 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는 규칙.
카탈리나 블라가가 특정 권속에게 과도한 관심을 가지면 그것을 막는다. 필요하다면 그 권속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를 카탈리나 블라가가 좋아할 리가 없다.
하지만 딱히 제제를 한 적은 없었다. 권속을 죽인 권속들 역시 카탈리나 블라가의 애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원하고 계실지도 모르지.’
카탈리나 블라가는 더없이 아름답지만,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내면이 비틀려 있다.
그녀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권속들 역시 인정할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카탈리나 블라가는 권속들이 자신의 총애를 잃고 싶지 않아서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보며 크나큰 만족감을 얻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역시…….
“아, 그렇지. 혹시 모르니까 미리 말해 둘게요.”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난 카탈리나 블라가가 트로이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권한울에게 손대지 마세요.”
카탈리나 블라가의 명령을 듣는 순간, 트로이의 내면은 요동쳤다.
“어떤 경우든.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로 권한울을 건드리지 마세요. 그랬다가는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요.”
왜? 어째서? 그 남자만?
수많은 의문이 요동쳤다. 하지만 그보다 권속으로서의 충성심이 앞섰다.
“명심하겠습니다.”
트로이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