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23화>
123. 블라가 가문 (3)
주전자의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주하연은 유리병에 담긴 찻잎을 적절하게 덜어서 주전자 안에 넣었다. 그런 뒤, 다른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만드레이크 말린 잎을 1g 덜어 넣고…… 월향초 잎사귀를 두 개를 넣고…….”
특이하게도 주하연은 한 종류의 찻잎만 쓰지 않았다. 여러 종류의 찻잎을 동시에 사용했다.
주하연이 끓은 차를 맛본 사람들마다 호평을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주하연은 오랜 세월 동안 독초와 약초를 가리지 않고 맛을 보며 조합법을 연구해 왔다. 덕분에 최고의 차를 끓이는 조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충분히 우러나온 차를 찻잔에 따른 뒤, 주방 밖으로 나왔다.
전용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주하연은 망설임 없이 권한울에게 다가갔다.
주하연이 가까이 다가올 동안 권한울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길게 하십니까?”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제야 권한울은 주하연이 가까이 온 것을 눈치챘다.
“천공투기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권한울 님 수준이라면 걱정하실 거 없을 겁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권한울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한 뒤, 차를 마셨다. 두 눈동자가 확 커지는 게 보였다.
“하연 씨가 끓여 주는 차는 언제 마셔도…….”
순간, 말이 끊어졌다. 권한울의 움직임도 멈췄다.
“권한울 님?”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연 씨가 끌여 주는 차는 언제 마셔도 최고네요.”
권한울의 칭찬에 말에 주하연도 미소를 지었다.
차를 잘 끓인다는 칭찬은 많이 들어봤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 해도 권한울이 말을 해 주면 느낌이 달랐다.
“흑천의 정보부에서 파악한 참가자들의 정보를 확인해 봤습니다만 권한울 님과 맞설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화를 좀 더 길게 끌어가고 싶은 마음에 주하연은 미리 조사해온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딱 한 명, 위험한 참가자가 있기는 합니다. 드래곤슬레이어의 직계 제자가 참가를 한다고 하더군요. 아마 권한울 님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들어본 적 있어요.”
드래곤 슬레이어.
용종 몬스터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헌터다.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용종 몬스터를 약화시키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골치 아픈 점은 그 힘이 흑천의 혈족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것.
“다른 사람은 몰라도 드래곤 슬레이어에 대한 대비는 철저하게 하셔야 할 겁니다.”
“명심할게요.”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대처법을 알려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문득, 주하연은 깨달았다.
대화가 어쩐지 이상하다. 대화가 계속 단답형으로만 이어지고 있다.
위화감을 깨달은 순간, 감각이 되살아났다.
별안간 주하연이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러나 주하연의 손은 권한울의 머리를 그대로 통과했다.
그 직후, 권한울의 몸이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주하연은 한참 동안 텅 비어 버린 자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권한울 님?”
* * *
어느새 배가 블라가 가문에 도착했다.
“리틀드래곤! 드디어 도착했어요!”
배가 도착하자마자 카탈리나 블라가는 권한울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밖으로 나오자 권한울은 비로소 자신이 타고 있던 블루아이즈의 전신을 볼 수 있었다.
“진짜 가오리랑 똑같잖아?”
S급 몬스터는 처음 보는 것이기에 조금 더 관찰하고 싶었다.
그때,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자마자 잘못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블루아이즈가 정박한 항구에 붉은 옷을 입은 악단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붉은 옷을 입은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으며 옥상에서는 사람들이 꽃잎을 뿌리고 있었다.
마치 작은 축제에 도착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카탈리나 블라가 님!
곳곳에 있던 사람들이 카탈리나 블라가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마치 세계적인 스타를 맞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블라가 가문에 온 걸 환영해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양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저게 우리가 타고 갈 마차예요.”
조금 떨어진 곳에 지붕 없이 개방되어 있는 마차가 보였다.
마차의 선두에 있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코끼리를 닮은 모습을 한 몬스터였다.
“자, 그럼 이제 이동해보죠?”
카탈리나 블라가가 권한울의 손을 잡아끌었다. 권한울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따라서 마차 위에 올라탔다.
-뿌우.
몬스터가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권한울은 자리에 앉은 채로 블라가 가문을 둘러봤다.
흑천 일가와 마찬가지로 블라가 가문 역시 광활한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가문에 오는 내내 고민을 했어요.”
이동하는 동안 카탈리나 블라가가 말했다. 그 말에 권한울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지금이라도 절 풀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닐 테구요.”
“아하핫, 농담도 참 잘하네요.”
혹시나 싶어서 물었으나 역시나였다.
“어떻게 하면 리틀드래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제 권속으로 삼을 수 있을까. 과연 무엇을 좋아할까.”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을 텐데요.”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딱 한 가지 괜찮은 게 생각이 나더라고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손을 뻗어 권한울의 옷자락을 매만졌다.
“제가 보내 준 옷을 입고 계셨네요?”
그 말에 권한울은 조금 당황했다.
그녀의 말대로 권한울이 입고 있는 옷은 블랙베리 세트였다.
정장과 같은 모습이라 평상시에 입기도 좋고 성능은 말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해요. 헌터라면 누구나 좋은 장비를 원하는 법이니까요. 그러니까…….”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마차가 멈췄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아주 오래 된 고성이었다.
“자, 제 손을 잡으세요.”
카탈리나 블라가는 먼저 마차에서 내린 뒤, 권한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여자를 에스코트 하는 모습이었다. 남녀가 바뀌기는 했지만.
권한울은 카탈리나 블라가의 손을 잡지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죠.”
카탈리나 블라가가 앞장섰다.
* * *
고성은 무척 넓고 컸다.
낡은 외형과 달리 내부는 무척 깔끔했다.
“이쪽이에요.”
카탈리나 블라가는 춤추는 듯이 가볍게 복도를 걸었다.
커다란 문 앞에 멈춰서더니 두 손으로 문을 잡고 힘껏 열었다.
권한울은 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넓은 홀이었다.
홀 안에는 수십 개가 넘는 유리관들이 놓여 있었다.
권한울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유리관으로 다가갔다.
목재 탁자 위에 씌워진 유리 뚜껑.
그 안에는 큼직한 흑수정 하나가 담겨 있었다.
<아크리치의 라이프배슬>
-품질 : 레전더리(SSS+)
-설명 : 전설적인 사령술사 아크리치가 보유하고 있던 라이프배슬. 소유한다면 아크리치의 모든 지식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권한울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아크리치.
던전이 나타난 초창기에 인류를 멸망시킬 뻔 했던 악마 중 한 명이다.
인류 연합이 전멸을 각오하고 벌인 토벌 작전으로 간신히 쓰러트렸으나 어떤 유물도 얻을 수 없었다고 들었는데.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권한울의 물음에 카탈리나 블라가는 미소를 지었다.
“겨우 그런 걸로 놀라시면 곤란해요. 제 수집품들 중에서 가장 격이 떨어지는 유물이거든요.”
“수집품이라고요? 설마…….”
권한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홀에 진열된 물건들을 훑어봤다.
그때, 등 뒤에서 카탈리나 블라가가 권한울의 목을 휘감았다.
“리틀드래곤.”
권한울을 꼭 끌어안으며 카탈리나 블라가가 속삭였다.
“내 남자가 되겠다고 맹세해 주세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열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권한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 아니, 블라가 가문에 있는 모든 것을 당신한테 드릴게요.”
* * *
카탈리나 블라가가 권한울에게 수집품을 구경시켜 주고 있을 때였다.
트로이는 고성 밖에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 아저씨!”
그때, 앳된 소리가 들렸다. 트로이가 고개를 돌리자 단발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레빗이로군.”
트로이의 대꾸에 소녀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훈련은 어떻게 하고 여기에 있는 거냐?”
“카탈리나 블라가 님이 오셨다고 해서 몰래 도망쳤죠.”
“이제 막 카발리에르 움브라가 된 녀석이 그렇게 게을러서야 어떻게 하려는 게냐.”
트로이의 말에 레빗은 혀를 삐죽 내밀었다.
“방금 다 봤어요. 카탈리나 님께서 리틀드래곤을 데리고 저 안으로 들어가셨죠?”
“그래.”
트로이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레빗이 슬슬 거리를 좁혀왔다.
“이상하지 않아요? 카탈리나 님께서 권속을 데리고 저 안으로 들어간 건 처음 있는 일이잖아요.”
레빗의 말대로 카탈리나 블라가가 저 안에 누군가를 들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권속에게 한없이 관대한 카탈리나 블라가지만 결코 허락하지 않는 행위가 몇 가지 존재했다.
그 중 하나가 저 고성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금 모든 권속들이 다 난리에요. 이번에 들어온 신입을 대하는 카탈리나 님의 태도가 심상치가 않다면서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가문에 도착한 지 채 1시간이 되지 않았다.
소문이 퍼지기에는 무척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카탈리나 블라가의 권속들은 그녀를 위해 살아가며, 그녀의 사랑만을 갈구한다.
카탈리나 블라가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살피고 있기에 소문이 빨리 퍼질 수밖에 없었다.
“진혈이지 않나. 특별한 권속이니 그만큼 신경을 쓰시는 거지.”
“히힛, 트로이 아저씨. 시치미 떼지 마세요.”
레빗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 성에는 블라가 가문의 시조가 사용하던 물건이 보관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카탈리나 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않으신 거고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던 금지에 발을 들여놓은 자가 있다. 심지어 카탈리나 블라가가 직접 데려갔다.
레빗을 비롯한 권속들이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권속들이 많아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권한울은 내버려 둬라.”
트로이의 목소리에 살기가 담겼다. 레빗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 갑자기 왜 이래요. 언제는 자기가 앞장서더니.”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는 카탈리나 블라가 님의 명령이 있었다.”
“……카탈리나 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요?”
실수했다.
트로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탓했다.
진정시킨다는 게 자신도 모르게 기름을 붓고 말았다.
“역시 이번 일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되겠네요.”
“레빗. 카탈리나 님의 명령을 어길 생각이냐.”
“그럴 수야 없죠. 하지만…….”
레빗의 혓바닥이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카탈리나 블라가 님께서 한 사람에게 푹 빠져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다 차라리 그놈을 죽이고 저도 죽는 게 나을 거 같지 않나요?”
카탈리나 블라가의 권속들은 다른 권속들보다 충성심이 높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애욕으로 이루어진 군신 관계이기에 때때로 이렇게 엇나가는 권속이 존재했다.
“아저씨, 말리지 마세요.”
레빗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런다고 막을 수 없는 거 잘 알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