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41화>
141. 초대장 (1)
서태평양.
평소라면 바다와 구름, 비행기만이 목격되는 그곳에 커다란 원판이 하나 떠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거대한 물체가 하늘을 가로막고 있음에도 햇빛은 문제없이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빛이 원판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
-자, 보이십니까? 눈앞에 보이는 원형 물체가 천공투기장입니다!
검은 헬기 한 대가 원판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헬기 안에서는 여성 리포터가 마이크를 든 채 열심히 말을 하고 있었다.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으시겠지만 천공투기장 주변에는 결계가 쳐져 있습니다. 외부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서죠.
사실 리포터가 말하는 정보들은 어지간하며 다들 알고 있을 정도로 흔해 빠진 것이었다.
그 정도로 천공투기장은 유명하며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대형 행사였기 때문이다.
-저 밑에 선박들이 보이십니까? 저 안에는 모두 헌터들이 탑승하고 있습니다. 모두 천공투기장에 참가하기 위해서 모여든 헌터들입니다.
사실 모든 선박에 헌터들이 탑승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공투기장을 관람하기 위한 관중들을 태우고 있는 유람선도 더러 존재했다.
-대형 길드와 가문의 문양이 많이 보이네요. 역시 천공투기장답습니다.
규모가 큰 가문이나 길드에서는 개별적으로 선박을 이끌고 왔으나 그렇지 못한 헌터들은 여행사에서 따로 운영하는 유람선의 배편을 구입해야 했다.
-아, 저기! 저쪽!
그때, 리포터가 선박 하나를 가리켰다. 카메라맨이 급히 초점을 옮겼다.
-흑천 그룹의 배입니다! 최근에 메이 가문과 남미의 카르텔을 모두 몰살시킨 걸로 화제가 되었죠.
흑천 그룹의 배는 특히나 규모가 컸다. 그 탓에 존재감이 무척 강했다.
-게다가 흑천에서 참가가 결정된 권한울이라는 혈족은 믿기 힘든 전적들로…….
* * *
“한울이는 무사할까…….”
흑천의 배. 그 안에 있는 응접실에서 권후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한울이 사라진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대체 지금쯤 어떤 고생을 하고 있을지 상상할 때마다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회장님은 그냥 대기하라는 말만 하고 있고…….”
권한울이 사라지자마자 본가에 연락했다. 당연히 권한울을 구출하는데 자신들도 참가할 줄 알았으나.
-천공투기장이 열리는 장소에 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권선우의 명령은 달랐다. 권한울의 부재가 외부에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면서 일행들을 대기시킨 것이다.
그 결과 일행들은 권한울이 납치된 지 일주일이 넘도록 이 배에서만 머물고 있었다.
“하아…….”
권후돈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주하연과 메이홍에게 시선이 옮겨갔다. 두 여인은 탁자 앞에 모여서 무언가를 열심히 상의하고 있었다.
“제가 따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흑천의 정보부에서는 블라가 가문이 납치한 것으로 확정을 지은 모양입니다.”
“블라가 가문이라고요? 사람을 속여먹는 것밖에 못하는 놈들이 그딴 짓을 저질렀다고요?”
“문제는 회장님께서 구출 명령을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찬성이에요. 그런데 블라가 가문의 위치는 아무도 모르지 않나요?”
“제가 따로 정보를 모은 바로는…….”
“저기…….”
권후돈이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권후돈을 돌아봤다.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지금 뭘 상의하고 있는 거야……?”
“권한울 님을 구하러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맞아요.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어요.”
두 여자의 대답에 권후돈은 침을 꿀꺽 삼켰다.
“회, 회장님께서는 대기하라고 하셨잖아.”
“블라가 가문이 흉수라는 게 밝혀졌는데도 회장님께서는 따로 움직이질 않고 계십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대장님이 갇혀 계시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권후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다. 하지만 회장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몹시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가, 가엘은 어떻게 생각해?”
권후돈은 가엘 가르시안을 쳐다봤다. 가엘 가르시안은 카펫 위에 앉은 채 명상을 하고 있었다.
권후돈의 물음에 가엘 가르시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주하연 님과 메이홍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회, 회장님께서 화를 내실지도 모르는데…….”
“제가 모시는 분은 권한울 님입니다.”
가엘 가르시안은 딱 잘라 말했다. 그 모습에 권후돈은 큰 감명을 받았다.
“……네 말이 맞아.”
권후돈의 얼굴에도 결심이 섰다. 사실 권한울을 구하러 가고 싶었다.
다만, 결심이 제대로 서지 않았을 뿐.
“한울이를 구하러 가자.”
권후돈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무언가가 선박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자마자 갑자기 경보음이 울렸다.
“침입자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주하연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눈동자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권한울이 납치당한 이후로 주하연은 항상 가시가 돋인 모습이었다.
“감히 누가 흑천의 영역을 침범했는지 모르겠지만…… 본보기를 보여야겠군요.”
선박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있었지만 주하연은 직접 처리하기 위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리는 저한테 맡겨 주세요.”
메이홍 역시 검을 챙겼다. 살기등등한 두 여인을 보며 권후돈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때였다.
시끄럽게 울리던 경보음이 잠잠해졌다. 모두가 의아함을 느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후…… 힘들다.”
문을 연 사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별 일 없었죠?”
심지어 태연하게 인사까지 했다. 그리고 정수기에서 물을 따른 뒤 벌컥벌컥 마셨다.
일행은 입을 벌린 채 침입자를 쳐다봤다. 한동안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침입자는 물을 다 마신 뒤에야 시선을 알아차렸다.
“왜 다들 그런 눈빛으로…….”
“한울아?”
“권한울 님?”
“대장님?”
“오셨군요!”
각자 큰소리로 권한울을 불렀다. 권한울은 깜짝 놀랐다.
“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이야기해 주세요!”
“하, 한울아. 몸은 괜찮아?”
네 사람 모두 권한울에게 달라붙어서 질문을 퍼부었다.
“일단 진정하고…….”
권한울은 당황한 얼굴로 일행을 달랬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 * *
“……이렇게 된 거죠.”
권한울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했다.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권한울이 혈통을 복수로 소유하고 있다는 건 팀원들에게도 비밀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권한울은 카탈리나 블라가의 시나리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카탈리나 블라가가 미쳤군요. 감히 흑천의 혈족을……그것도 진혈인 권한울 님께 손을 대다니.”
주하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주하연이 진짜로 분노한 부분은 거기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권찬성 님은 권한울 님을 죽이려 하셨다고요? 보나마나 권혁 님의 명령이셨겠죠.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흑천의 혈족이 같은 혈족을 죽이려 했다. 그것도 부회장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
흑천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주하연으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크, 큰일인 거 아니야……? 크, 큰아버지가 너, 너를 죽이려 한다니…….”
권후돈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흑천의 3인자가 권한울을 대놓고 죽이려고 했다.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아, 아니지. 이 일을 회장님이 아시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야. 그럼 아무리 큰아버지라 해도…….”
권후돈의 목소리가 차츰 작아졌다. 주하연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아시면 회장님께서는 당연히 벌을 내리실 겁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흑천에 봉사해 온 주하연은 알고 있다
권혁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용의주도한지. 그리고 얼마나 교활한지.
“권혁 님께서는 언제나 일을 계획하실 때, 대비책을 세워놓으시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저도 하연 씨랑 같은 생각이에요.”
권한울이 동의를 했다. 천공투기장으로 떠날 때, 카탈리나 블라가도 경고를 했다.
권혁이라면 분명히 쉽게 당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 그럼…….”
권후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메이홍이 입을 열었다.
“후돈 오빠,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대장님은 결국 살아서 돌아오셨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카탈리나 블라가가 있어서…….”
“어쨌든 멀쩡하시잖아요. 그럼 된 거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대장님께서는 악운에 강하시죠.”
가엘 가르시안도 고개를 끄덕엿다. 두 사람이 이렇게 나오자 권후돈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모두 다시 보게 돼서 기쁩니다.”
권한울이 웃으며 말했다. 한점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블라가 가문에 갇혀 있을 때, 가장 많이 생각 났던 사람들이 팀원들이었다.
“나, 나도 기뻐 한울아.”
“무사히 오셔서 다행이에요.”
“안심입니다.”
다들 한 마디씩 했다. 괜히 낯이 부끄러워진 탓에 권한울은 볼을 긁적였다.
“아, 권한울 님. 부재 중이실 때, 이런 게 왔습니다.”
마침 주하연이 새로운 화젯거리를 꺼냈다. 아공간을 열어서 편지를 한 통 꺼냈다.
“이게 웬 편지인가요?”
권한울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편지를 받았다.
SNS가 활성화된 요즘 시기에 편지라니. 그것도 굉장히 밀랍으로 봉인까지 되어 있었다.
“바벨 가문에서 보내온 파티 초대장입니다.”
그러나 바벨이라는 이름이 들리지 마자 권한울은 더 이상 편지를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바벨 가문.
전 세계에서 흑천 일가와 맞수를 이루는 몇 안 되는 대가문.
흑천 일가가 용(龍)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면 바벨 가문은 드래곤의 혈통을 지니고 있는 곳이었다.
“천공투기장의 참가자들끼리 친분을 쌓자는 뜻에서 파티를 준비하겠다더군요.”
권한울은 편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실제로는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아마 천공투기장의 참가자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파악하기 위함은 아닐까.
“어쩌시겠습니까? 거절하시겠습니까?”
권한울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바벨 가문에게 실력을 가늠당하는 것은 기분이 나빴지만 역으로 권한울 역시 다른 참가자들과 바벨 가문의 수준을 엿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궁금했다. 다른 가문과 길드의 유망주들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지.
‘용심혈(龍心血) 얻을 기회이기도 하지.’
바벨 가문이 주최한 파티다. 당연히 바벨의 혈족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혈통인 용심혈을 얻을 수 있다.
‘용심혈은 용이 아니라 드래곤의 혈통이다.’
바벨의 혈족들은 용심혈 덕분에 전원이 드래곤하트를 소유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진짜 드래곤하트는 아니다. 잡혈과 열혈이라면 불완전한 드래곤하트를 얻게 되며 순혈이라 할지라도 원본에는 못 미친다.
그러나 권한울이 얻게 될 용심혈은 진혈. 그렇다면 진짜 드래곤하트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이 초대는…….”
문득 권한울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권후돈과 가엘 가르시안의 시선을 눈치챘다.
두 사람 모두 굉장히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그, 그게 말이야…….”
권후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호, 혹시 한울이 네가 가면 나도 따라갈 수 있을까 해서…… 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유명한 헌터들이 다 모일 거 아니야.”
다른 헌터들을 직접 만나보는 게 목적인 듯했다. 권후돈은 유명한 헌터들을 우상화 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엘은요?”
“저는…… 파티라는 게 처음이라…….”
가엘 가르시안은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호기심이 많은 그로서는 대가문이 주최하는 파티가 어떨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권한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나오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요. 다 같이 참가하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