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후...”
할 수 있다.
박율은 심호흡 후 움직였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장신과 단신의 남자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박율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적이 아니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넌 뭐지...? 입구는 막혀 있을텐데.”
장신의 남자가 말했다.
그의 총신이 박율을 향했다.
박율은 애써 표정을 숨겼다.
“주군께 계시를 받았다.”
“뭐?”
단신의 남자였다.
박율은 왼손을 들어 검은 불꽃을 피워낸다.
그를 보는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어떻게 주군의 힘을...?”
“어떻게겠어?”
두 남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 너희들 같은 하급 악마들은 모를 수도 있겠군.”
“하급?”
단신의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대충 속아가는 분위기인 듯 하자 박율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난 주군의 뜻을 이어받은 마인이다.”
그리고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 말을 내뱉으며 함께 악마의 검을 소환했다.
검은 불꽃 속에서 꽃피듯 나타나는 검의 향연은 더더욱 그를 악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두 남자는 검과 박율을 번갈아보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치였지만, 두 남자는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그에게서 악마가 아닌 주군의 힘이 느껴졌다.
마인이라고 밖에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율은 두 남자를 지나쳐 황자총통 쪽으로 걸어갔다.
“잠깐.”
단신의 남자가 박율을 멈춰 세웠다.
박율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 멈춰 섰다.
‘설마 들켰나? 연기 좋았는데...!’
그리고는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돌렸다.
“뭐지?”
박율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긴 채 말했다.
“주군께 어떤 계시를 받은 거지?”
박율은 속으로 살았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알아서 뭐하려고?”
“본국으로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은 건 우리다. 그정도는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그래서라니?”
“내가 너희들한테 계시를 알려줄 의무는 없는데.”
“허.”
단신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주군의 힘을 받았다고 뭐라도 된 줄 아나본데.”
그의 눈빛에 살기가 맴돌았다.
동시에 그의 이마에 뿔이 솟아나고 검은 형체의 무언가가 퍼져나간다.
악마화.
동화를 완벽히 끝냈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난 마인을 썩 좋아하지 않아.”
박율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칠뻔했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똑같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뭐 어떻게 싸울래?”
어차피 싸워선 이길 수 없다.
그래도 약하게 보여선 안 된다.
박율은 오기로 그에게 맞섰다.
맞부딪히던 살기가 터지려 할 때 쯤.
“그만.”
당장에라도 싸울 듯 치솟던 살기가 장신의 남자가 내뱉은 한 마디로 사그라들었다.
다행히 장신의 남자는 비교적 이성적인듯했다.
박율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장신의 남자는 단신의 남자를 변호하듯 말을 이었다.
“우리 하급 악마들은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면 우리가 난처해져서 말이지. 본국으로 돌아갈 때 변명할 거리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말해야지.”
박율은 찌릿 단신의 남자를 보았다.
“마왕과 계약을 했다. 나의 소망이 이뤄주는 대신 나의 몸을 내어주기로 했지.”
“뭐라고?”
“귀가 먹은건가?”
갑작스레 두 남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주군께서 화신체를 택했다고?”
‘이게 아닌가?’
박율은 눈동자를 굴렸다.
분명 마신 안드라스는 화신체를 이용해 인간계에 현현한다.
뭐 그 이후에 화신체를 버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아무튼.
하지만 박율의 이야기를 들은 두 남자의 표정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건가?”
이런 상황에선 굽히면 진다.
박율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 무기는 역겹고, 더러운 이 세상에 나의 뜻을 전할 첫 번째 발걸음이다.”
“...계획이 바뀌신 건가?”
“하긴 이대로면 너무 늦어지긴 할 테지.”
다행히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렸다.
“너무 늦어져?”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박율은 제도 모르게 입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두 남자가 박율을 보았다.
“아, 넌 모르겠지. 지금 일련의 계획에 초를 치는 놈들이 나타나서 말이야.”
“심연을 닫고, 악마들을 죽이는 놈 말이지.”
박율은 순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이 말하는 ‘그 놈들’ 중 하나는 자신이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겠군. 가져가라.”
장신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은 더 자세하게 묻고 싶었지만, 더 이상 깊이 파고드는 건 위험했다.
그는 조용히 전시품을 막던 유리를 깨고 황자총통을 들었다.
그리곤 발을 돌린다.
“후...”
연기가 제법 잘 먹힌 듯했다.
두 사람은 전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대로 나가기만 한다면 성공이다.
박율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쿠당탕!
두 남자의 시야의 끝에 성공이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박율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문에서 네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몸을 던지며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 보이는 하얀 불꽃.
신의 사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은 분명히 기억한다.
신의 철퇴 박석훈.
“와 씨...”
타이밍이 이게 뭐야.
그들은 황자총통을 가진 박율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두 악마를 향한다.
“하이고...”
잘 풀린다 싶었다.
“야! 저거! 저 새끼 잡아!”
네 명의 사자는 밑도 끝도 없이 박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잠깐...!”
네 명의 사자가 그에게 달려드는 순간 두 명의 악마가 그들을 막았다.
“이것들은 우리가 막지.”
두 악마는 마치 든든한 지원군인양 입을 놀렸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다니! 같은 인간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두 악마를 넘어 박석훈이 소리쳤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변명이라도 하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뭐라 말하기가 애매했다.
“저거야! 저거! 잠든 성유물! 저거 뺏기지 말라고 했어!”
네 명의 사자가 소리쳤다,
이대로 도망쳐도 될까?
박석훈이 강력한 권능을 가진 사자이긴 했지만, 당장에 그리 강한 녀석은 아니었다.
나중에 잠든 성유물을 얻고 나서야 주름을 잡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떡하지...”
“뭐해? 여긴 우리가 막는다니까?”
단신의 악마는 사자들의 공격을 막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인간의 몸을 탐식한 악마 둘을 사자 넷이서 막을 수 있을까?
실패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그만한 희생이 따르겠지.
박율이 이 상황에 끼어든다면 희생 없이 악마 둘을 이길 순 있을 것이었다.
악마들은 그를 아군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그게 더 희망이 있을 터.
이 상황에선 도망치는 게 제일 편하긴 하지만, 나중에 해명하기도 귀찮고 기왕이면 악마들을 죽여놓는 게 나중에도 편할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저 두 사람을 살리면서 악마들을 해치울 수 있을까.
박율은 머리를 굴려보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지원도 있고 추출도 있는데, 죽이지만 않으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 밖에.
“뭐, 아무렴 어때.”
박율은 발을 돌렸다.
“도망치라니까? 그냥 같이 싸우려고?”
“뭐 그런 셈이지.”
박율은 천천히 그들의 곁으로 가더니 장신의 악마의 등을 짚었다.
“뭐...?”
“미리 사과할게.”
그리고는 악마의 검을 소환한다.
검은 불꽃 속에서 피어난 악마의 검이 장신의 악마의 흉통을 꿰뚫었다.
“커...억...!!!”
“나도 명색이 사자라서 말이야. 혼자 도망치기는 좀 그래.”
박율의 돌발행동에 같은 공간에 있던 모두가 놀란 눈을 했다.
특히 단신의 악마는 더더욱 놀란 얼굴을 했다.
차악!
검이 빠져나가자 검은 피가 흩날리며 남자의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는 상처 부위를 감싼 채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단신의 악마가 소리쳤다.
“뭐냐니 악마 사냥이지.”
“뭐...!?”
박율은 오른손의 하얀 불꽃과 함께 망치를 소환했다.
그리고 발버둥치는 장신의 악마의 정강이를 내려찍는다.
콰직!
“아아악!!!”
“가만히 있으면 안 죽일게. 알겠지? 움직이지마.”
“...!!!”
단신의 악마는 박율의 성유물을 보더니 눈을 의심했다.
악마와 대치를 하던 네 명의 사자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악마와 박율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돼요?”
“나라고...”
“배신인가? 왜?”
“근데 저 사람 저거 우리랑 똑같은 거 아니에요? 저 불꽃...”
“일단 가만히 있자. 자기들끼리 싸우잖아. 이럴 땐 닥치고 있는 게 상책이야.”
소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아저씨들, 이 남자 감시 좀 하고 있어봐요. 혹시라도 악마로 변한다 싶으면 날개 바로 찢어요. 알겠죠?”
박율은 소근대는 이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네 사람은 흠칫 놀라더니 서로를 눈치를 보았다.
날개는 곧 악마의 힘이었다.
날개를 자르면 악마는 힘을 잃는다.
이를테면 공략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박율은 다시 시선을 옮겼다.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이걸 뺏길 순 없어서 말이야.”
그리고는 곧바로 단신의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악마의 검이 단신의 남자를 향해 쇄도한다.
남자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검을 피했다.
박율은 틈도 주지 않고 망치를 휘두른다.
콱!
망치가 남자의 턱을 스쳤다.
남자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 하지만, 재빨리 중심을 되찾고 일어났다.
박율은 그에게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최대한 빨리 그를 처치해야 한다.
검의 날카로운 단면이 남자의 팔뚝을 스치고, 망치가 그의 허리춤을 가격한다.
“큭...!”
박율의 쇄도하는 움직임에 남자는 그저 당할 뿐이었다.
그간 악마들과 싸우며 경험이 쌓인 덕인지, 악마를 때려잡으며 힘이 늘어난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섬광의 영향인지 이전보다 싸우기가 훨씬 수월했다.
죽이려면 당장에라도 죽일 수 있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기왕이면 악마만 죽이고 사람은 살리고 싶었다.
“아악!!!”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에 고개를 돌리자 악마로 변하려던 남자의 날개를 찢은 네 사람이 보였다.
“저기요, 잠깐! 아저씨들! 죽이진 마요! 몸은 사람이란 말야.”
박율은 남자의 목숨을 끊으려는 네 사람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네 사람은 흠칫 고개를 돌리더니 성유물을 거두었다.
“놀래라. 그럼 이제 끝을 내야지.”
박율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이...개새끼...”
단신의 악마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후... 이제 끝내자...”
박율은 마치 영화 속 주인공 마냥 검을 눈앞에 세우며 눈을 치켜떴다.
내심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악마의 앞에서 날카로운 날을 세우는 일 정도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하지 않았던가.
왠지 해보고 싶었다.
“뭔가 사연이 있나봐요.”
“배신이라도 당했던 건가?”
“조용히 해봐. 이제 싸우겠다.”
“우리 안 싸워도 돼요?”
“몰라,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하는데 뭐.”
네 남자는 자기네들끼리 떠들었다.
박율은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검과 망치를 치켜들었다.
“간다...!”
그리고는 달린...
콰당!
한창 분위기를 잡던 박율은 바닥에 묻은 피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아... 실수.”
박율은 주위 시선을 의식하더니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일어났다.
“하... 끝까지 기분 더럽게...”
단신의 남자는 검은 증기를 내뿜었다.
그러더니 그의 몸집이 커지기 시작했다.
검은 뿔이 솟아나고, 날개가 터져나왔다.
박율의 시선은 점차 위로 올라갔다.
“어라라...?”
박율은 입을 떡 벌렸다.
인간의 몸을 빌린 악마가 악마화하는 상황.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그의 형상은 그야말로 악마였다.
괜히 이상한 짓이나 하다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거 좆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