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박율은 신속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챙!
하지만 날아드는 일본도는 박율의 검을 부서트리곤 박율에게로 쇄도했다.
한상호의 검은 가슴을 가로질러 골반까지 커다란 생채기를 만들어내고, 커다란 생채기를 따라 형용할 수 없는 격통이 진동했다.
“아악...!!!”
부서진 검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 조각으로 나뉜 부러진 검은 불꽃에 휩쌓여 사라지기 시작했다.
박율은 죽을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도 한상호를 노려보았다.
그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검에 묻은 피를 털고 발을 돌렸다.
여전히 그는 박율의 목숨을 끊지 않았다.
“그만 포기해라.”
“아직 안 끝났어...!”
박율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망치를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나 망치는 한상호에게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상호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검날을 세웠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의 인기척이 나타남과 동시에 박율은 세상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박율은 그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힐 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털썩.
박율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함께 끓어오르는 고통이 아래에서부터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고통을 따라 눈을 옮기자 저 멀리 그의 발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분명 몸에 붙어 있어야 할 발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다리에서 터져 나오는 피가 바닥을 적셨다.
“악...!!!”
“후...”
한상호는 숨을 몰아쉬며 일본도를 검집에 넣고는 까마귀 가면을 꺼내 썼다.
더 이상 박율을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었다.
“...다음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야!!! 아직 안 끝났어!!!”
박율은 멀어져가는 그를 잡으려 기어갔지만, 그에게 닿지 못했다.
“왜 쫄리냐!!! 야이 개새꺄!!!”
하지만 이내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씨발...!!!”
박율은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결국 놓치고 말았다.
희대의 악귀가 될 한상호를 죽이지 못했다.
오늘 놓친 그는 또다시 사자들을 죽이고 역사를 반복하게 만들겠지.
너무 성급했다.
온전히 그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율 씨...!”
그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박석훈이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왔다.
그는 박율의 상태를 보더니 경악스러운 얼굴을 했다.
“다...다리가...!!!”
그는 얼른 상의를 찢어 박율의 잘린 부위를 감쌌다.
피가 너무나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율은 이를 꽉 물었다.
고통 섞인 비명을 터트렸다간 그대로 혼절할 것 같았다.
쿵!
거인이 땅을 부수는 것 같은 소음이 들려온다.
저 멀리 심연의 골짜기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토머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손짓 한 방에 숲이 파괴되고, 건물이 무너졌다.
“후...”
박율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주먹을 떨리도록 꽉 쥐었다.
좌절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한상호는 놓쳤지만, 눈앞에 저 악마만큼은 잡아야 했다.
“꺄악...!!!”
흠칫 박율이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드디어 도착했다.
한지원.
그리고 박율과 함께 악마들에 맞섰던 사자들이 토머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한지원은 남산타워 아래에서 벌어진 참사를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드디어 왔네요. 다들.”
박율이 말했다.
“지금 오면 뭐해요...! 벌써 전부...”
“아뇨. 끝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미 충분히 많은 역사가 변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토머가 지금쯤 차지해야 했을 보석 역시 남산타워가 무너진 탓에 아직 손에 넣지 못했다.
아니 차지하지 못하겠지.
“이제 끝낼 시간이에요.”
박율이 박석훈을 본다.
그는 박석훈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한쪽 다리밖에 없기에 거동이 심각하게 불편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치 않았다.
박석훈은 박율을 부축했다.
“움직이면 안 돼요...!”
뒤이어 달려온 한지원이 말했다.
하지만 박율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피가...!”
“괜찮아요.”
박율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저쪽까지 저 좀 옮겨주실래요?”
박율이 저 멀리 무너진 남산타워를 가리켰다.
그 끝엔 투명한 빛을 내는 보석이 있었다.
저 악마가 찾고 있는 그 물건이었다.
박석훈과 한지원은 안된다며 소리쳤지만, 박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목숨을 내놓고 신념을 관철하는 이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망설이던 박석훈은 이를 까득 깨물더니 박율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움직였다.
“움직이면...!!!”
한지원이 입을 열였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더 이상 그에게 가망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의 몸은 검붉은 피에 온통 젖어 살색이라곤 보이지 않았고, 한쪽 팔은 검게 변했고, 다리 하나는 사라진 상태였다.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이었다.
[우어어어어!!!]
토머가 비명을 지른다.
귀청이 찢어질 것 같았다.
이내 핑 하며 귀가 먹먹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토머의 비명은 멎었지만, 박율의 귀는 작동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다.
박석훈이 입을 움직였고, 한지원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젠 귀까지 제 기능을 상실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토머를 향해 온갖 공격이 날아들었다.
커다란 불기둥이 그것을 덮치고, 날아든 참격이 그것을 때린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것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그것의 온몸엔 뚫을 수 없는 두꺼운 방어막이 둘러있었다.
그리고 박율의 목표는 그 방어막을 깨는 것이었다.
그 방벽만 깬다면 토머를 잡을 수 있다.
어느새 박율의 몸뚱이는 무너진 남산타워의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저쪽으로.”
박율이 끝에 있는 보석을 가리켰다.
박석훈과 한지원이 뭐라고 하는 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박석훈은 보석까지 도착해서야 박율을 내려놓았다.
박율은 보석에 손을 가져다댔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이른 탓인지 크기가 완전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충분했다.
박율은 왼손에서 활을 꺼냈다.
전쟁 기념관에서 가져온 무기.
겉으로 보기엔 다 녹슬어 별 볼일 없는 활이었다.
툭.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부상이 큰 탓일까.
활을 잡으려 애써도 활은 손에서 떨어졌다.
박석훈와 한지원은 당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무기를 쥐어주지만, 손은 활을 잡지 못했다.
“한지원 씨. 이거랑 제 왼손이랑 꿰어줄래요?”
그의 말에 한지원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굳었다.
“힘이 없어서 못 잡겠어요.”
‘그걸 제가 어떻게...!’
한지원의 입모양이었다.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손과 활을 이어달라고 하는 부탁을 어찌 쉽게 들을까.
생살을 꿰뚫어야 하는 일이었다.
“마지막 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그 한마디에 한지원의 눈물이 글썽였다.
이윽고 그녀는 성유물인 바늘과 실을 꺼내 박율의 손에 찔러넣었다.
생살을 꿰뚫는 일이었지만, 그리 아프진 않았다.
이미 다른 곳곳이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그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도 않았다.
박율이 손을 본다.
활과 하나가 된 손은 그야말로 기괴했다.
살을 파고드는 하얀 실이 손을 가득 채웠다.
박율은 만족스런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 망치를 소환해 꺼내 든다.
“석훈 씨. 나 좀 받쳐줄래요? 다리가 이래서 중심이 영 안 잡히네.”
그가 박율을 본다.
그는 박율의 말에 멈칫 그를 보더니 이내 입을 꾹 닫고 그의 어깨를 받쳐줬다.
“고마워요.”
그리고 시위에 망치를 끼웠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수년 동안 고민하던 문제였다.
왜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고통을 감수해가면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그것은 그의 고집이고 아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의 철학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이 다수의 행복이 가능하다면 나 하나 정도 버릴 수 있다는 철학이었다.
별볼 일 없는 그의 철학이 그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의 철학이 그의 살가죽을 찢었고, 다리를 절단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철학을 고수했다.
“한지원 씨는 이제 멀리 떨어져서 사람들 좀 치료해줘요. 토머가 여기로 올 거에요.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머의 시선이 박율 일행을 향했다.
그것의 표정이 살벌하게 변했다.
당장에라도 다 죽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박석훈 씨는 제 뒤에서 멀어지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죽어요. 무조건 제 뒤에 있어야 해요.”
‘그럼 율 씨는...!!!’
입모양 만으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전 안 죽어요.”
박율이 말한다.
하지만 박석훈은 그의 말을 믿지 못했다.
“제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진짜에요.”
박석훈이 고개를 처박는다.
숙인 고개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빛에 반사되었다.
“고마웠어요.”
망치의 크기가 커지기 시작한다.
손망치였던 망치는 장도리가 되고, 오함마가 되었다.
하얀 불꽃으로 만들어진 망치는 어느새 팔뚝만 한 크기의 망치로 변해 있었다.
박율은 시위를 당긴다.
팽팽하게 늘어나는 시위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함께 보석을 깨운다.
운석만한 보석에 균열이 벌어진다.
그를 보던 토머가 소리를 지른다.
박석훈은 귀를 틀어막지만, 박율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막이 터진 탓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좋네...”
벌어진 균열에서 빠져나오는 푸른 증기가 활을 감싸기 시작했다.
별 볼일 없던 활의 녹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증기에 휩쌓인 활의 형상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활은 형태를 잃고 하얀 빛줄기로 변한다.
이 활의 진짜 이름은 코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무기.
토머가 달려온다.
쿵!!!
쿵!!!
토머의 발이 땅을 내딛을 때마다 지반이 흔들리고, 세상이 개벽했다.
이내 토머의 입에서 커다란 마기가 뭉쳤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터져 나올 준비를 한다.
“박석훈 씨. 제가 다음에 터트릴 땐 미리 말해준다고 그랬죠?”
토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기가 하나의 줄기가 되어 박율을 향해 쇄도했다.
동시에 활은 보석의 푸른 증기를 모두 흡수하고 완벽한 빛의 가닥이 되었다.
[탐색]
마지막 권능을 사용한다.
목표는 토머의 왼쪽 허파.
그의 방벽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수많은 사자의 희생으로 알게 된 그것의 약점.
이번 역사에서는 그 누구의 희생도 없이 약점을 찾을 수 있다.
박율은 더욱 세게 시위를 당겼다.
폭발하는 하얀 불꽃과 검은 불꽃이 그의 근육을 팽창시켰다.
핏줄이 터지고, 힘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더 이상 무리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박율은 시위를 놓았다.
팽팽하게 늘어난 시위가 엄청난 힘을 내뿜으며 원상태로 돌아간다.
시위에 걸쳐있던 망치가 그 힘을 받고 앞으로 나아간다.
검은 마기의 줄기를 꿰뚫으며.
“지금이에요.”
박율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