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박율은 서둘러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그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는 확신했다.
불현듯 나타난 킹콩이라는 마수와 그것의 등에 붙은 청석.
그리고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뒤따른 서희와의 만남.
작은 퍼즐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율 씨!”
박율은 박석훈의 부름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움직였다.
“빨리 따라와요. 어딘지 알고 있으니까.”
서희의 그림은 미래를 점지한다.
대상을 쫓는다면 대상에게 닿기 위한 길을 보여주고, 미래를 쫓는다면 그 미래를 위한 초석을 제공한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같은 것을 겨냥하고 있었다.
킹콩을 만났던 그 산.
그곳에 단탈리온을 만나기 위한 길이 있다.
* * *
미친 듯이 달려 도착한 산마루, 그 앞에서 박율은 킹콩이 나타났던 그곳을 쫓아 눈을 옮겼다.
역시나 심연의 골짜기는 없었다.
“율 씨...! 천천히...조금만 천천히 좀 가요...!”
그의 뒤를 쫓아 올라온 박석훈은 온몸을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뒤따라오는 두 사람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나이도 젊은 양반들이 고작 이정도 가지고 힘들어하면 우짭니까.”
“당신이...당신이 이상한 거에요...”
김진목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만도 한 게 4시간 코스를 30분도 안되는 시간으로 주파하고 있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쳐 쓰러질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박율은 조금 숨이 찬 듯 보였지만, 그리 힘든 기색은 없었다.
“안 힘들어요...?”
차영훈의 질문에 박율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도 굴러다니다보니 지구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게 아닐까 싶었다.
“자, 거의 다 왔어요.”
그리고 이내 도착한 정상.
그를 쫓아온 세 사람은 결국 흙바닥에 몸을 뉘었다.
박율은 숨을 고르는 세 사람을 뒤로 고개를 들어 상공을 보았다.
보이는 건 푸른 하늘뿐.
하지만 이곳에 마기가 잔류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단탈리온, 미래를 보는 대공작이여.”
쿠구궁!
이곳에 단탈리온에게로 향하는 문이 있다.
겨우 박율을 쫓아 올라온 세 사람은 지진이 인 듯 흔들리는 진동에 각기 나무를 잡고 몸을 지탱했다.
“율 씨...! 지...지진...!”
“문이에요.”
박율은 박석훈의 말을 가볍게 받아쳤다.
함께 허공에서 벌어지는 커다란 균열.
박율을 제외한 세 사람은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그 균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진동 속에서 각기 성유물을 꺼내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그럴만도 한 게 저 균열은 악마들이 나타나는 심연의 골짜기였으니.
하지만 박율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경계 안 해도 돼요.”
박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균열이 전부 벌어지고 나서야 진동은 잠잠해졌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요.”
하지만 벌써부터 세 사람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찾을 인물은 단탈리온, 미래를 보는 대공작. 마계의 마왕 중 하나죠.”
“예!?”
“그 악마가 우릴 여기로 초대한 거에요.”
“초...초대요!?”
그의 말에 박석훈은 기겁을 하며 소리를 냈다.
“아...악마가...그것도 마왕이...!?”
박율은 세 사람을 향해 발을 돌렸다.
“아 맞다. 그리고 이 악마는 맨몸으로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에요. 조건이 있어요.”
“무슨...?”
“제물.”
“제물...이요!?”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흠칫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저는 길을 안내해야 해서 불가능하고... 그럼 누가 제물이 되셔야 하는데?”
박율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세 사람은 당장에라도 도망칠 듯 물러섰다.
“어디가요?”
“제...제물이라뇨...”
“석훈 씨가?”
“아뇨!!! 저 죽기 싫어요!!!”
“그럼 영훈 씨? 아니면 진목 씨?”
이름을 호명하는 그의 표정은 몹시 악마같았다.
게다가 그의 뒤로 벌어져 있는 심연의 골짜기는 마치 배경같이 그를 더욱 부각 시켜 주고 있었다.
“율 씨, 왜 그래요...! 갑자기... 이상해요...!”
박석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박율은 주머니에서 구슬을 하나 꺼냈다.
박석훈은 저 구슬을 알고 있었다.
“포...폭탄이다...!!!”
“뭐요!?”
“여러분들...”
박율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쩌적!
이윽고 구슬에서 작은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으아아악!!!”
낌새를 눈치챈 차영훈은 도망치려 발을 돌리지만, 발을 헛디뎌 그대로 넘어졌다.
다른 두 사람은 이미 박율과 거리를 벌린 이후였다.
박율은 천천히, 넘어진 그를 향해 다가갔다.
“살려...”
“그럼 영훈 씨가 제물인 거네요?”
쩌적!
구슬의 균열이 더 커진다.
함께 차영훈의 동공 역시 더욱 확장되었다.
그리고 구슬이 전부 깨지는 순간.
“아아악!!!”
차영훈의 단말마가 울려퍼진다.
“아아아...악...?”
차영훈의 비명와 함께 그의 시선은 부서진 구슬을 향했다.
폭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 그의 손에는 케이크가 있었다.
그것도 청담동에서 가장 맛있다는 케이크가.
박율은 터질듯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를 보았다.
“단탈리온이 디저트를 좋아하거든요.”
“예?”
“이게 제물이에요.”
박율은 결국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에 세 사람은 벙찐 표정을 했다.
“장난친거에요. 장난.”
박율은 배꼽은 잡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무슨 이런 장난을...”
“제가 무슨 말을 했어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뒈?”
박율은 뻔뻔한 표정을 지은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탁!
김진목의 톤파가 박율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악!”
“당신은 좀 맞아야해.”
* * *
네 사람은 나름대로 준비를 끝내고 심연의 골짜기 아래에 섰다.
“준비됐죠? 우리가 마주하게 될 건 총 세 가지 시련.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박율의 말에 세 사람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균열 너머는 마계였다.
방심은 곧 죽음이라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암만 인간에 우호적인 존재라한들 그들이 마주하러 가는 존재는 악마, 그것도 72마왕 중 하나인 단탈리온이었다.
박율은 그들을 잠시 보더니 이내 코어를 밧줄 형태로 만들어 심연의 골짜기에 던졌다.
그리고 단단히 고정된 것을 확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을 불렀다.
세 사람이 모두 밧줄을 잡자 박율은 코어를 원래 크기로 줄인다.
그러자 확 하고 네 사람의 몸이 심연의 골짜기를 향해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 * *
검은 대지와 삭막한 공기, 우중충한 하늘이 네 사람을 반겼다.
그들이 사는 지상과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사방에 깔린 마기는 분명히 달랐다.
숨을 쉬는 것조차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 불편하고 탁한 공기가 네 사람의 코를 스친다.
“여기가...”
“마계에요.”
박율은 익숙한 친척집이라도 온 듯 평온한 투로 말했다.
그에 반해 그를 제외한 세 사람은 공포와 경외가 깔린 눈으로 마계를 둘러보고 있었다.
박율은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발을 옮겼다.
멍하니 마계를 구경하던 세 사람은 흠칫 그를 쫓았다.
“마계라고 해서 엄청 막 위험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네요?”
“여기도 뭐 마계인들이 사는 곳이니까.”
박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발을 옮겼다.
“그리고 아무거나 막 만지진 마요. 여기 있는 동식물들은 마기를 먹고 자라서 방어기제가 특출나게 발달 됐거든요.”
“악!”
착!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식물 하나에 손을 가져가던 박석훈이 소리를 질렀다.
고슴도치 마냥 가시를 세운 식물은 가까이 다가간 손이 사라지자 다시 가시를 숨겼다.
“그렇네요.”
박석훈은 가시에 찔린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다시 박율을 쫓았다.
그리고 숲을 벗어나자 보이는 마을 하나.
중세시대를 연상케하는 마을이 눈앞에 있었다.
“와...”
“여기가 마계인들이 거주하는 구역이에요.”
다양한 음식들을 파는 상점들과 거기를 오다니는 마계인들.
그곳은 영락없는 마을이었다.
박율을 제외한 세 사람은 마치 원시인이 불을 발견하듯 신기한 눈으로 마을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느 곳에도 악마처럼 보이는 이는 없었다.
마계에 거주하는 인간들, 흔히 마계인들이라 불리는 이들밖에 없었다.
그들이 봐온 악마들처럼 뿔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 아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게 뭐에요?”
[뭐여? 너 인간이야?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이거 먹어봐도 돼요?”
[왜 한 번 먹어볼텨?]
박석훈은 마계인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가 건네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물었다.
“음...! 맛있어요!”
[맛있어? 하나당 동화...]
“막 주워먹지말고 빨리 오세요.”
박율은 아예 가게 앞에 눌러앉을 것 같은 박석훈을 잡고 끌었다.
“다음에 또 올게요!”
“다음에 또 오긴 뭘 또 옵니까. 거기 두 사람도 딴짓하지 말고 따라와요.”
박율은 혀를 내두르며 세 사람을 이끌었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딴짓을 하는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마을의 번화가를 벗어나서야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친화력 한 번 기똥차네요. 다들.”
“신기하네요. 마계라고 해서 엄청 무서울 줄 알았는데.”
“내가 말했잖아요. 여기도 마계인들 사는 곳이라고.”
턱.
문득 박율은 걸음을 멈추고 주먹을 들었다.
“왜요...?”
“쉿!”
박율은 재빨리 근처 나무 가까이로 몸을 숨겼다.
그의 반응에 다른 세 사람 역시 그의 눈치를 보더니 몸을 가릴 것을 찾아 신속하게 움직였다.
네 사람이 전부 몸을 숨기고 나서야 박율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 멀리에서 악마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박율은 악마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괜히 싸움을 했다가 소리를 듣고 다른 악마들이나 마수들이 몰려들면 그것만큼 낭패는 없었다.
“...저기 사람...!”
칫 하며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김진목이 시야 끝에 걸린 길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말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마계인 하나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박율은 괜찮다며 조용히만 하고 있으라 손짓했다.
걸어오던 마계인과 악마가 마주쳤다.
[아...안녕하십니까! 기사님.]
마계인은 그를 마주하자 허리를 곧추세우며 경례를 건넸다.
악마는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그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마계인은 그가 지나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길을 가려하지만, 동시에 그는 살기를 느끼며 굳은 고개를 돌렸다.
[누가 움직여도 된다고 했지?]
[기...기사님...]
차악!
악마의 손이 마계인의 복부를 꿰뚫었다.
[커...커헉...]
마계인의 단말마에 박율을 제외한 세 사람이 흠칫 반응을 했지만, 박율은 재빨리 코어를 변형시켜 그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그리고 악마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코어를 원형태로 바꿨다.
박석훈은 재빨리 쓰러진 마계인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그의 숨은 끊어진 이후였다.
“죽었어요...”
박율은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마계라한들 여기는 단탈리온의 영역이었다.
이 영역은 비교적 타 마계보다 평화로웠다.
이렇게 마계인을 가차 없이 죽일 정도로 악랄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예 이런 일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알고 있는 한 이런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
어차피 이곳은 마계였다.
약하면 죽는 약육강식의 세계.
그에겐 이런 마계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당장에 닥칠 악마들을 생각하기도 벅찼다.
“이것보다 더한 것도 많아요. 그리고 이런 무자비한 족속들이 끊임없이 처들어 올 거에요. 우린 그걸 막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고.”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세 사람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그를 쫓았다.
그리고 이후 네 사람 사이로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마계인의 죽음 이후 그들의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미 그들은 악마라는 존재들을 겪었고, 그들을 가만히 놔두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알고 있었다.
같은 마계에 사는 이들의 목숨조차 하찮게 보는 존재들이었다.
우려하던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다들 준비하세요.”
박율이 말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