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주군...]
데판은 고개를 조아린 채 단탈리온을 불렀다.
샤락.
단탈리온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책을 넘겼다.
[왜 그러느냐?]
데판은 잠시 입을 닫은 채 단탈리온이 그를 보기를 기다렸다.
[...왜 그렇게 저 하찮은 마계인들을 기꺼워하시는 것입니까?]
[네 눈엔 저것들이 하찮아 보이더냐?]
탁.
단탈리온은 책을 덮었다.
[왜 저들을 하찮게 보는 것이냐?]
[그야, 힘도 뭣도 없는 족속들이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다면 하찮은 것이냐? 그럼 나는 가장 쓸모없는 마왕이더냐?]
[그건...!!!]
단탈리온은 데판의 반응에 웃음을 흘겼다.
[땅이 없으면 하늘 또한 없다.]
[허나...]
[무엇이 그리 문제인 것이냐?]
데판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피를 탐하지 않는 존재를 어찌 악마라 할 수 있겠습니까?]
데판은 고개를 살짝 들어 단탈리온을 보았다.
단탈리온 역시 턱을 괸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흠칫, 데판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단탈리온 한참 동안 데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선 땅이 필요하고, 날아가는 새가 쉬어가기 위해선 나무가 필요한 법이다. 무릇 씨앗만이 홀로 존재한다면 어찌 나무가 되고, 하늘을 유영하는 새만이 홀로 존재한다면 어찌 날 수 있겠느냐? 편협한 생각은 결국 네 발목을 잡는 돌부리가 될 게다.]
데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아린 채 있었을 뿐이었다.
* * *
저 멀리 두꺼운 공기층을 뚫고 날아든 가시가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폐허 속에서 죽음을 피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마계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힘이 없기에 떨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누군가에 기대 목숨을 보존하는 것밖에.
그렇기에 그들은 그저 거북이처럼 목을 등딱지 속에 숨겼다.
그리고 기다렸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곁엔 누구도 없었다.
그들을 지켜줄 무기도, 힘을 가진 이들도.
박율은 힘이 없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등을 맡기고 있던 세 사람을 뿌리쳤다.
[신속]
[척후]
두 다리에 힘을 집중시켰다.
피어나는 권능은 발가락 끝에서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그리고 그 힘이 하반신을 잡아먹으려 하는 순간.
폭발시킨다.
땅바닥에 새겨진 작은 그림이 그의 발자취를 남기고.
쏟아지는 태양 빛이 땅에 닿기 전에 그의 몸은 마계인들의 앞에 도착하지만.
날카로운 가시는 이미 그들의 목전까지 들이닥쳤다.
신속이 끝난다면 그들은 죽는다.
허나 박율이 그들을 떨어뜨려 놓는다면 그들은 살아남는다.
그 대가는 박율의 목숨이었다.
“...”
더 이상 그의 머리를 거치고 나오는 행동은 없었다.
그저 몸이 움직이기에 머리는 그것을 뒤따라 생각하는 것에 불과했다.
찰나의 순간 마계인들을 전부 밀쳐내고 나서야 박율의 머리는 작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가시는 그의 가슴팍을 후벼파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 가시는 그의 숨통을 끊겠지.
저항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순리를 따를 뿐이었다.
“씨...발...”
죽음이라는 것에 한 발자국 다가가던 순간.
누군가의 몸이 그를 밀치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콰당탕!!!
신속이 끝남과 동시에 박율은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마계인들 역시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박율이 마계인들을 벗어나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눈을 돌렸을 때, 그곳엔 데판이라 불리우는 남자가 복부를 꿰뚫은 가시를 움켜쥐고 있었다.
“...!!!”
푸왁!
데판의 입에서 역류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기...기사님...!!! 저희 때문에...!!!]
[빨리 숨거라...]
데판은 말을 내뱉는 그 순간까지 기세를 잃지 않았다.
마계인들은 자리에 굳어 가시를 타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주군의 의지가 아니었다.
[빨리. 사라져라!]
데판의 버럭 울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들은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나마 부서진 건물 사이 작은 구멍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인간.]
데판의 두 눈은 네파림에게 놔둔 채 박율을 불렀다.
[...]
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허나 그 뒷말은 그 무엇보다 명확했다.
도움, 그리고 협력.
박율은 귀를 의심했다.
악마가, 그것도 한 영역의 군단장이라는 존재가 인간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박율을 불렀다.
그것은 하늘을 나는 새가 되기 위해서였고, 땅을 지키는 나무가 되기 위해서였다.
비록 말을 끝맺지 않아도 박율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기회를 만들겠다.]
파스스.
데판의 복부를 꿰뚫은 가시가 흩날려 사라졌다.
가시가 있던 자리 너머로 허공에 떠 있는 네파림이 보였다.
그는 비소를 한껏 품은 채 데판을 보고 있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검은 핏줄기는 네파림을 비추던 구멍을 가렸다.
그리고 데판은 사라졌다.
아니, 네파림을 향해 날아갔다.
쾅!!!
그의 주먹이 네파림과 부딪히며 또 다시 허공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박율은 코어를 땅 깊이 꽂은 채 충격을 버텼다.
“기회를 만들겠다니...”
기회를 만든다한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박율은 주먹을 쥔 채 두 악마를 보았다.
감히 그가 범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하지 않는다면.
[사...살려줘...!!!]
[무서워요...]
[조금만...조금만 버티렴... 기사님이 다 물리쳐 주실거야...]
저들이 죽는다.
폐허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저 약한 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어있는 저들이 죽는다.
박율은 다시 허공의 악마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콰직!
한창 악마들의 전투와 그에 따른 상념에 정신이 팔려있던 사이 그를 노리던 악마의 머리가 터졌다.
그리고 그것의 뒤에는 김진목의 톤파가 있었다.
“율 씨! 괜찮아요!?”
박율은 그제야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역시나 사방에서 악마들이 몰려들던 중이었다.
그리고 측면에서 달려드는 마수 하나.
박율은 재빨리 망치를 치켜들어 마수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콰직!!!
“무슨 일이에요!?”
박석훈은 정면에서 달려들던 악마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예?”
박율은 다시 망치를 휘두르고, 코어를 장검을 형태로 바꿔 악마들을 베어 갈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허공의 악마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데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착각일지 몰라도 데판의 움직임은 투박했다.
사바나의 한 마리 사자처럼, 무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한 마리의 늑대처럼.
하지만 그의 움직임엔 많은 다짐이 있었다.
그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는 지금 목숨을 담보로 기회라는 것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여 박율은 그를 믿기로 했다.
그의 눈빛은 무언가를 각오한 이의 것이었다.
박율은 그 눈빛을 지나칠 수 없었다.
“...잠시만 저 좀 지켜주시겠어요?”
세 사람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하던 그의 행동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세 사람은 박율을 둘러싸고 그를 보호하듯 자리를 잡았다.
박율 역시 그가 말한 기회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후...”
기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기회는 두 번은 오지 않는다.
알 수 없는 그 기회를 위한 준비는 간단했다.
그가 가진 모든 힘을 응축시킨다.
코어와 망치를 하나로 묶어 왼손의 마기와 오른손의 힘을 한 손에 전부.
박율은 허공의 악마들을 보았다.
치열한 공방은 여전히도 계속되고 있었다.
데판의 힘은 강력했다.
주먹 한 방에 산을 지우고, 발길질 한 방에 바다를 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힘은 오로지 지키기 위함이었다.
산을 지울 수 있는 파괴력은 네파림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바다를 가를 수 있는 그의 힘은 마계를 지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악마가 아닌 기사였다.
그렇기에 박율 역시 마냥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왼손에 몰려드는 그 힘은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주체할 수 없이 부풀어 오르는 힘은 점점 그를 잡아먹을 듯 전신으로 침범하고 있었다.
이미 미로를 부수기 위해 한번 썼던 힘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사라 불리는 남자를 돕기 위해 한 번 더 그 힘을 이용하려 했다.
그 반동은 얼마나 클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힘을 응축하는 그 순간마저도 그의 육신은 고통을 토해냈다.
“으...으...윽...!!!”
“율 씨...!? 괜찮아요!?”
박율의 신음에 세 사람은 그의 상태를 물었다.
“괘...괜찮으니까...”
도저히 괜찮은 이의 얼굴은 아니었다.
팔에서부터 돋아난 핏줄은 목부터 다리까지, 심지어는 얼굴에까지 돋아나고 있었다.
당장에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얼굴이었다.
함께 하나로 합쳐진 망치와 코어는 박율을, 아니 마계를,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집어삼킬 듯 몸집을 부풀렸다.
이윽고 그의 힘이 모두 한데 모였을 때.
박율은 덜덜 떨리는 손을 잡은 채 데판을 보았다.
“빨리...!!!”
박율은 소리쳤다.
데판은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몸은 네파림을 향했다.
마치 나방이 불구덩이로 몸을 던지듯, 그는 네파림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의 커다란 주먹은 네파림을 삼킬 듯 그를 향해 날아가지만, 검은 안개에 먹혀 사라진 네파림에게 닿지 않았다.
되려 다시 나타난 네파림은 데판의 등을 노렸다.
푸욱!!!
그의 손이 데판의 복부를 꿰뚫었다.
이미 뚫렸던 그 자리에 또 다시 네파림의 손이 자리를 꿰찼다.
[크아아아악!!!]
데판은 소리를 지른다.
네파림은 비소를 한껏 품은 채 그를 보며 웃었다.
함께 데판은 웃었다.
네파림은 그의 웃음에 인상을 지었다.
그의 움직임은 퍽 박율과 닮아 있었다.
[...잡을 수 없는 상대를 잡는 방법이 뭔지 아는가?]
[지금 뭘...!!!]
[상대방이 나를 잡게 만드는 것이다.]
데판의 등을 점령한 네파림은 그에게서 손을 빼내려 발버둥을 치지만, 굶주린 짐승은 그 손을 놓치지 않았다.
더욱 세게.
도망칠 수 없게.
그는 복부를 찢어발기는 고통을 질렀다
[지금이다!!!]
그리고 고통과 함께 그의 기사도를 소리쳤다.
박율 역시 그의 기사도를 들었다.
코어와 망치를 한데묶은 무기를 날카롭게, 그리고 길게.
세상을 집어삼킬 듯 힘을 머금은 창은 데판에 겹쳐진 네파림을 보았다.
그의 기상과 데판의 기사도는 하나가 된다.
창을 높이 드는 것 마저도 고통에 정신이 혼미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척후]
마지막 남은 힘까지 전부 모든 것을 담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박율은 하나가 된 그의 모든 것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