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어떡해요...!?”
하세원이 박율의 등에 몸을 숨기며 말했다.
최지호를 제압한 사람이나 둘을 노려보는 사람들이 대충 봐도 평범한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온몸이 아주 우락부락한 게 어디 UFC에서나 볼법한 사람들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 전부 경비원들이에요.“
박율은 여전히 우락부락한 남자들을 주시한 채 말했다.
겉보기엔 술집의 손님이었지만, 실상은 손님을 가장한 금고지킴이들이었다.
마치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 아주 고요한 순간처럼 모두가 달려들 준비를 한 채 박율을 노려보고 있었다.
심지어는 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이곳은 스페인의 가장 큰 암시장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억대의 돈이 가볍게 오가는 곳이니만큼 경비는 삼엄할 수 밖에 없었다.
”no te muevas!!!“
“뭐라고 하는 지는 몰라도 대충 움직이지 말라는 거 같은데.”
박율은 몰래 손을 뒤로 빼 놋쇠 그릇을 하나 꺼냈다.
그의 돌발행동에 술집에 있던 이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들이 발을 떼는 순간.
박율은 재빨리 놋쇠 그릇을 높이 들어 손가락으로 툭하고 쳤다.
지잉.
손가락에서 시작된 울림은 놋쇠 그릇을 타고 강 위에 떨어진 물방울 마냥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작은 파문은 커다란 파도가 되어 가게를 집어삼킬 듯 고막을 울렸다.
“성능 좋네.”
울리는 쇳소리에 가게 안 사람들의 움직임이 모두 멎었다.
물론 최지호와 하세원도 마찬가지였다.
박율은 하세원을 툭 하고 쳤다.
”아...아?“
그녀는 벙찐 얼굴로 박율을 보았다.
”울림쇠 라는 성유물이에요. 소리를 듣는 이로 하여금 잠시 멈추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죠. 이렇게 가벼운 터치만 있어도 정신을 차리긴 하는데.“
박율은 설명을 하며 여전히 깔려 있는 최지호를 보았다.
”저놈을 때려죽일 수도 없고...“
어차피 최지호를 깨우면 그를 제압한 저 덩치까지 깨어난다.
어쩔 수 없이 저 덩치 먼저 제압해야 했다.
”에휴...“
박율은 그에게 살며시 다가가 망치를 소환해 높이 들었다.
”원망은 밑에 놈한테나 하슈.“
그리고 콰직!
내려찍힌 망치는 덩치의 턱을 뒤흔들었다.
망치가 닿는 순간 정신을 차린 덩치는 내려찍히는 망치에 대사를 씹힌 채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털썩.
동시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최지호가 일어난 건 덤이었다.
”뭐여!?“
최지호는 잠시 상황을 살피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박율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망치를 든 채 살벌하게 노려보는 게 아주 악마가 따로 없었다.
”...안녕?“
”한 번만 더 트롤짓하면 이 망치가 어디로 갈 거 같아요?“
”...뭐?“
”밥 온전히 씹어먹고 싶으면 조용히 움직입시다.“
”...“
박율의 협박 아닌 협박에 최지호는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일어나슈. 이제 가야지.“
그리고는 박율의 손을 잡아 빠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넵!“
가끔 이런 충격요법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차피 몇 시간만 지나도 다시 망나니로 변하겠지만 말이다.
박율은 고개를 내저으며 바텐더에게 걸어갔다.
바텐더 역시 아직 굳은 채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툭.
박율이 살짝 바텐더의 어깨를 건들자 바텐더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놀란 얼굴을 하더니 주변을 둘러보곤 큰 소리로 뭐라뭐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뭐라고 하는 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박율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감정은 통한다 했던가.
대충 죽여버리겠다, 무슨 짓이냐, 당장 꺼져라 뭐 그런 내용인 듯 싶었다.
”지호 씨, 와서 얼른 권능 좀 써요. 시끄러워 죽겠네.“
”네...넵! 어떻게 합니까요?“
”동굴 속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면 돼요.“
최지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바텐더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바텐더에게 뻗었다.
바텐더는 치우라며 손을 휘저었지만, 이내 최지호의 권능이 스며든 불꽃이 그의 머리를 감싸며 바텐더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최지호를 보다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얼굴로 벽 쪽으로 다가가더니 벽면에 숨겨진 문을 열었다.
쿠구궁.
술들로 진열된 벽은 조개가 아구를 벌리듯 양쪽으로 벌어졌다.
”자 들어갑시다.“
”이대로 두고 가도 되는 거에요...?“
뒤에서 하세원은 동상마냥 굳어있는 이들을 보았다.
”괜찮아요. 어차피 알아서 풀려요.“
박율은 얼른 오라며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 * *
동굴에 발을 들인 박율은 새삼 놀랍다는 얼굴로 동굴을 둘러보았다.
사실 그도 대충 들어보기만 했지 실제로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겨우 사람 둘 정도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은 통로였다.
“진짜 동굴처럼 생겼네.”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높으신 분이니까...”
문득 박율의 뒤에서 하세원이 물었다.
그녀는 마치 상사 앞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신입사원처럼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표님? 대표님 나쁘지 않네.”
“그럼 대표님...”
“그냥 편하게 불러요. 그게 더 익숙해요.”
10년 가까이, 한 식구처럼 봐왔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대표님이니 높으신 분이니 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기왕이면 서희, 그 아줌마한테 들으면 재밌겠거니 했지만, 하세원은 아니었다.
저 순진한 얼굴로 대표님 소리를 듣다간 미안해서 얼굴을 못 볼 것 같았다.
“아, 그럼 율 씨...?”
“뭐 그러세요.”
“어떻게 이런 것들을 다 아시는 거에요...?”
저 표정의 이면엔 혹시 직업이 마피아나 야쿠자 같은 특수직업을 가지고 있냐는 질문이 담겨있었다.
“내가 마피아일 거 같아요?”
“아...아뇨!!!”
하세원은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듯 재빨리 손을 휘저었다.
박율은 그녀의 행동에 피식 웃었다.
“맞아요. 마피아.”
“네!?”
“구라치고 있네.”
“거, 최지호 씨, 분위기 망치는 재주 있네. 속일 수 있었는데.”
“속일 걸 속여야지.”
하세원은 조금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박율을 보고 있었다.
“장난이에요. 사실은 세원 씨가 알려줬어요.”
“...제가요!?”
엄밀히 따지면 미래의 하세원이지만.
지금 박율이 그녀를 안쪽으로 데려가는 것처럼 원래의 역사에서도 그녀는 이런 경매나 다른 사건들에 함께했던 일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그녀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뭐 됐고, 거의 다 온 거 같네요.”
동굴처럼 생긴 통로를 모두 지나자 사람 댓명이 지나가도 부족하지 않을 커다란 통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벽면 쪽엔 수많은 유물들이 전시하는 것마냥 유리에 감싸져 있었다.
“와...”
그것들을 본 박율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저절로 입을 떡 벌리고 탄사를 내뱉었다.
누가 보면 박물관이라해도 믿을 비주얼이었다.
솔직히 박율도 감탄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수많은 유물들을 본 건 처음이니까.
대부분은 원래의 역사에서 악마들에게 빼앗기거나 한국이 가지지 못한 유물들이었다.
박율은 통로에 깔린 성유물들을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다.
아직 사라졌다거나 잘못된 성유물이 없는 걸봐선 다행히 늦진 않은 모양이었다.
“우와 이거 봐. 진짜 총 아니야? 이거?”
최지호는 가까이 있던 중세 유럽에서 썼을 법한 총을 가리켰다.
“보는 눈 하고는.”
박율은 혀를 끌끌 찼다.
이렇게 수많은 유물들 중에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걸 고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이거는 뭘까요...?”
이번엔 하세원이었다.
그녀는 그새 조금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한 성유물을 보고 있었다.
박율은 슬그머니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가 보는 성유물을 보았다.
“오, 보는 눈이 있으시네.”
“네?”
“손톱이라고 불리는 잠든 성유물이에요. 스페인어로 우나.”
“손톱이요...?”
그것은 일명 손톱이라 불리우는 성유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하세원이 쓰게 될 물건이었고.
“쉽게 말해서 활이에요.”
“이게 활이라고요!?”
아무리봐도 손톱에 끼우는 장신구 느낌이었지 활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사용해보지 않고는 전혀 알 수 없을 터였다.
“혹시라도 건들 생각이면 당장 손 내려요. 잘못 건들면 사단나요. 아까 그 아저씨들이랑 소꿉놀이하고 싶으면 만져보는 것도 괜찮고.”
겉은 누추해 보이는 동굴일지라도 경보시스템은 확실하다는 하세원의 전언이 있었다.
유리에 손을 가져가던 최지호는 박율의 말에 흠칫 손을 멈췄다.
“구경 다 했으면 다 이리오슈.”
“가져가는 거 아녀?”
“지금 가져갈 건 없고.”
박율은 일전에 제단에서 빌려온 망토를 꺼냈다.
그리고 높이 펼쳐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을 덮었다.
“뭐에요...!?”
“기다려보쇼.”
시야를 덮은 묵색의 망토는 하얀 불꽃에 그을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뭐여?”
“쉿.”
박율은 재빨리 최지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통로의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읍! 읍!”
“안 닥치면 기절시킬 거에요.”
박율은 남은 손으로 망치를 소환했다.
그러자 최지호는 질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저벅저벅.
어두운 통로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봐선 금고를 지키는 경호원 중 한 명이 아닐까 싶었지만, 박율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마인이다.
이전의 역사에서 이 경매를 참가했던 많은 이들이 모조품을 샀더거나 혹은 사고 난 뒤 물건이 사라졌다는 둥, 경매품이 도난당했다는 둥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박율은 무조건 뒤에서 몰래 성행되는 작업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그의 눈 앞에 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지호와 하세원은 흠칫 놀라 도망치려는 듯 움직였지만, 박율은 재빨리 코어를 이용해 두 사람을 못 움직이게 막았다.
“망토 안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를 못 봐요. 그렇다고 움직이면 기시감이 생겨서 들킬 수도 있으니까 움직이지도 말고.”
박율은 마인이 듣지 못할 정도로 소곤소곤 말했다.
두 사람은 그의 말에 한껏 굳은 채 눈빛으로 알겠다며 답했다.
‘어떡해요?’
동상 마냥 자리에 굳어 마인을 보던 하세원은 움직이지도 않은 채 박율을 보았다.
‘기다리쇼.’
박율 역시 말 없이 눈빛으로 답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철컥.
굳게 닫힌 유리가 하나 열렸다.
예상대로 마인은 이곳의 일원이었고, 그는 손쉽게 유물을 꺼낼 수 있는 듯했다.
‘뺏자!’
‘아직 아니라니까, 그러네.’
박율은 최지호의 닦달에 그를 쏘아보았다.
깨갱하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퍽 웃기기도 했다.
“¿Quién es?”
그때 마인이 소리쳤다.
그가 내뱉은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말을 내뱉는 걸봐선 누구냐고 묻는 듯했다.
그의 외침에 박율을 제외한 두 사람은 흠칫 놀랐지만, 박율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저 마인이 보는 대상이 자신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통로의 끝, 검은 그림자 속에서 박율이 기다리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