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괜찮아요...!?”
달려온 한지원이 박율의 상태를 보고는 말했다.
그리고는 두 손에 하얀 불꽃을 피워 박율의 몸을 감쌌다.
차가워 보이는 하얀 불꽃이 박율의 몸에 닿자 따스한 봄바람이 불 듯 그의 몸을 부드럽게 채웠다.
벌어진 상처는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잎이 나풀거리듯 천천히 아구를 다물었다.
“후... 고마워요.”
박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어떻게 저놈의 까마귀는 볼때마다 세지는 거 같냐.
“다친 사람은 없죠?”
치료를 끝낸 박율은 고개를 들어 달려온 일행들을 살폈다.
남산타워부터 동고동락해온 세 사람과 킹콩을 대동한 이세진, 최지호와 하세원까지.
물론 옆에서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서희까지 포함해서.
다행히 모두가 무사한 듯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럼...”
박율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까마귀와 곰을 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일행들의 눈 역시 그들을 향했다.
“도망칩시다.”
“네!?”
박율의 말에 일행들의 시선이 다시 박율을 향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맹한 얼굴이었다.
“왜요? 더 싸우고 싶어요?”
“그런 건 아닌데...”
이제 슬슬 스페인 쪽 사자들은 물론이고 경찰들이나 군인들이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괜히 일이 커지기 전에 도망치는 게 더 편할 터였다.
“이제 우리가 관여할 시간은 끝났어요. 필요한 성유물들 다 챙겼고, 시끄러워지기 전에 도망가야해요.”
그의 말에 일행들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석훈 씨.”
“네...?”
“선물이에요.”
박율은 팔에 부착된 팔찌를 벗어 그에게 전해주었다.
“이게...”
“선홍빛 갑주라는 성유물이에요.”
박석훈이라는 남자가 신의 방패이자, 신의 철퇴라는 이름을 갖게 만드는 무기였다.
박석훈은 얼떨떨한 얼굴로 팔찌를 받았다.
팔찌를 착용한 박석훈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무기였으니.
하지만 그러던 중 박석훈의 시선이 박율 너머를 향했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는 듯 경악스러운 얼굴이었다.
“...근데 율씨.”
“왜요. 석훈 씨?”
“저건 뭐죠?”
“뭘...?”
박율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가 가리킨 곳에 있는 것은 해골무리들이었다.
새하얀 뼈다귀로 이루어진 해골들이 새카만 기운을 물씬 풍기며 그들의 뒤를 장식했다.
“...!!!”
그리고 그 사이에 보이는 두 사람.
늑대 가면을 쓴 누군가와 뱀 가면을 쓴 여자.
박율은 입을 열지 못했다.
늑대 가면 역시 박율을 마주한 채 자리에 굳었다.
박율은 눈을 의심했다.
눈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봉기 형?”
박율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는 저 남자를 알고 있었다.
한때 백봉기라 부르던 남자였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비록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는 백봉기라고.
“거기서 뭐 하는 거야...?”
“...”
“형....! 형...!!!”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형이 왜...!!! 왜 거기 있는 건데!!!”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높이 들어 마치 시야를 가리기라도 하듯 해골들을 소환했다.
땅에서 기어 올라오는 해골들은 순식간에 박율 일행을 포위했다.
“빼앗아라.”
늑대의 말이었다.
그의 말에 해골들은 먹이를 마주한 짐승들마냥 달려들었다.
동시에 박율 일행들 역시 반사적으로 발을 굴렀다.
“형!!!”
박율은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말은 허공에 흩날리는 메아리처럼 사라졌다.
박율은 움직이지 못했다.
좌절과 혼란, 그리고 충격이었다.
그 모든 것이 한데겹쳐 그의 두 발에 족쇄를 채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해골들은 달려들었고, 일행들은 달려드는 해골들에 맞춰 무기를 휘둘렀다.
킹콩의 주먹이 수십의 해골들을 날리고, 하세원의 활이 정면의 모든 해골들의 흔적을 지웠으며 야차화된 서희가 해골들을 짓이겼다.
차영훈과 김진목, 그리고 박석훈의 협동 역시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완벽했다.
해골에게 먹히지 않는 정신계 능력을 가진 최지호는 열심히 도망치는 중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해골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말 그대로 떨어지는 폭포수를 베어가른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데다가 그 수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일행들은 그럼에도 달려드는 해골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박율은 아니었다.
충격에 휩쌓인 얼굴로 해골들 너머 그것들을 조종하는 늑대를 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왜 그러는 건데...!”
박율은 소리쳤다.
허나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것처럼.
그는 해골들을 지휘했다.
“도대체 왜...”
무언가 잘못되었다.
왜 저 형이 저기에서 악사회인 것마냥 진두지휘를 하냔 말이다.
“형이 거기서 왜 그러고 있는건데...!”
“...”
박율은 한때 백봉기를 보며 말했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사람이라고.
그만큼 백봉기는 선하게 살아왔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손사레를 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저기에서 늑대 가면을 쓰고...
“...율아.”
늑대는, 아니 백봉기는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메마르지 않았다.
목소리를 젖게 한 것은 수분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절망이자 좌절이었다.
그리고 아득한 슬픔.
가면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메마른 가면은 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그 이유가 어찌됐든 그는 슬픔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
“왜...”
도대체, 왜.
“뭐가 문제인 건데...”
얼마나 큰 슬픔을 안고 있기에 그런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원치 않는 피를 묻히는 건데.
“형은 그런 사람이...”
“미안하다. 율아.”
그리고 그의 모습은 해골들에 가려져 사라졌다.
박율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그가 알던 백봉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혹은 닿을 수 없는 상공의 구름처럼.
그는 사라졌다.
“하아...”
고통스러웠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에 대한 고통은 참을 수 없이 시큰거렸다.
칼에 베인 상처처럼 절로 아구를 벌리고 피를 토해낸다.
백봉기의 아들, 기우가 살아있었던 이유, 본래의 역사에서 그가 죽었던 이유.
‘미안하다. 율아.’
언제나처럼 사과를 건넸던 이유.
모든 것이 박율을 향해 날아왔다.
이번 역사에서는 그를 지키려했다.
그가 죽지 않게, 기우가 힘들지 않게.
아버지가 되어 주었던 만큼,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던 만큼.
하지만 모든 것이 바람에 쓸려가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잡을 수조차 없었다.
“율 씨...!”
나는...
“율 씨...!”
이제...
“율 씨...!!!”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신 차려요!!!”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그를 등진 채 무언가를 막고 있는 박석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엔 곰이 던진 커다란 돌덩이가 그를 내려찍고 있었다.
그는 팔이 떨리고 있었다.
“율 씨!!!”
“석훈 씨...”
“뭐하는 거에요! 얼른 정신차려요!”
[뭘 멍하니 서 있는 건가...!]
그새 데판 역시 그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박율을 노리던 까마귀의 공격을 막은 참이었다.
마치 악사회의 인물들과 해골들은 박율을 노리듯 그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죽고 싶어 환장한 건가?]
데판이 말했다.
그는 연신 날아드는 까마귀의 검을 막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려줘야 하잖아요...!”
이번엔 박석훈이었다.
그는 그새 선홍빛 갑주의 사용법을 체득한 것인지 내려찍힌 충격을 한데모아 바위를 터트리는 데 사용했다.
쾅!!!
하지만 곰은 부서진 돌조각들을 모로 세워 다시 내리꽂았다.
푹!
돌덩이가 박석훈의 몸을 꿰뚫는 축축한 소리가 났다.
“큭...!”
“석훈 씨...!”
선홍빛 갑주의 힘으로 부상은 없겠지만, 고통은 여전할 터였다.
그럼에도 박석훈은 박율을 등지고 그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고 있을 거면 좀 어디 가서 숨어있을래요!?”
날아드는 뱀들을 베어가르며 김진목이 나타났다.
그는 한 손엔 통파, 나머지 한 손엔 박물관의 추억이 깃든 황자총통을 들고 쉴새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그의 옆에서 차영훈 역시 기다란 봉을 휘두르고 그의 권능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그 외 나머지 일행들 역시 고군분투를 하는 중이었다.
“우오오오!!!”
킹콩이 울부짖었다.
그의 털을 잡고 기어오르는 해골들은 마치 먹이를 발견한 개미들마냥 그를 에워싼 채였다.
킹콩은 커다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곤 하늘 높이 뛰어올라 해골 군중 사이에 뛰어내렸다.
쾅!!!
떨어진 킹콩의 몸뚱이는 돌풍을 일으키며 주변의 해골들을 짓이겼다.
몸에 들러 붙어있던 해골들이 충격에 떨어져 나간 것도 덤이었다.
“야. 일어나.”
어느새 박율의 앞으로 다가온 서희가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도 도도한 목소리였다.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 서희는 찌릿 박율을 노려보았다.
옆에서 달려드는 해골 무더기는 검게 변한 팔로 단숨에 날려버리고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날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멍하니 뭐하는 짓이야?”
아주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듣는 것만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당신은 내가 데려온 적이...”
“됐고.”
서희는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박율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가 내민 손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손을 뻗는다는 것의 의미.
다른 이들에겐 그저 평범한 손일지언정, 박율이 아는 서희에게는 아니었다.
“뭐해?”
어서 잡으라는 닦달.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만큼 누군가에게 손을 뻗는 일은 없던 여자였다.
넘어지더라도 알아서 일어나게 만드는 여자였던 사람이 박율에게 손을 뻗었다.
박율은 저도 모르게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
“빨리.”
서희는 또 다시 달려드는 해골들을 막았다.
짝!
서희의 손이 박율의 뺨을 내리쳤다.
“아야!”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거 보면 이렇게 때리면 정신 차리더라고.”
“아니, 그렇다고 사람을 때려요!?”
“그럼 그러고 있지 말던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저 방법이 나쁘진 않은 듯했다.
확실히 빠져있던 정신이 되돌아온 느낌이다.
박율은 잠시 두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내뱉는 숨에 다시 눈을 떠 전황을 살폈다.
사방에는 해골들이, 가까이에선 박율을 노리는 이들이, 그리고 박율의 주변에는 그를 에워싸 그들을 상대하는 사람들이.
“오케이.”
침착하자.
상황이 어찌됐든 계획이 우선이다.
조용히 도망치긴 그른 것 같지만 말이다.
[척후]
박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시 속에 가둔 악마가 재등장하기까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다.
“다들 전에 경매장 근처에 폭탄 설치한 거 기억나죠?”
박율이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해골들을 상대하던 일행들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 설명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