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파티장과 경매장 사방에 설치해놓은 폭탄들.
원래 계획은 건물을 무너뜨려 마인들과 악마들은 가둔 뒤 가시로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만, 악사회의 등장 및 일련의 이유로 맥거핀이 될 뻔했던 함정이었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해골들과 악사회들에게 둘러쌓인 박율과 일행을 탈출시킬 유일한 도구가 된 셈이었다.
“세원 씨.”
박율은 흘깃 하세원을 보았다.
손바닥을 펼쳐 하얀 불꽃으로 만들어진 활로 해골들을 불태우고 있던 하세원이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멀리 활을 쏴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세게.”
“어디로요...!?”
“아무 곳이나. 어디든 괜찮아요.”
박율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하세원 역시 같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활을 높이 들어 힘껏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핑!
그녀의 손을 벗어난 새하얀 화살은 상공을 꿰뚫고 저 멀리 사라졌다.
“나쁘지 않아요.”
박율이 날아가는 화살을 보며 말했다.
그는 이미 척후를 사용한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한국과 연결된 통로를 만들고 싶지만, 그녀의 능력은 한 번 통로를 만든 흔적은 두 번 쓸 수 없었다.
흔적이 바래져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보군.]
데판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래도 나름 군단장이라고 까마귀를 상대로 적당히 여유가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이기거나 하는 건 또 아니었다.
“자, 그럼. 계획 설명할게요. 싸우면서 들어요. 저놈들을 유인할 거에요. 그리고 이전에 폭탄 설치했던 거 터트려서 저 건물을 완전히 함몰시킬 겁니다.”
“안에 악마가...”
“맞아요. 그럼 악마가 저기서 나올 거에요. 그러니까 도박이에요.”
“뭐...?”
서희가 인상을 팍 구기며 말했다.
무너진 건물에 가시를 박아야 했다만, 이미 건물에 가시를 박아놨기에 폭탄을 터트려 건물을 붕괴시키면 악마를 봉쇄한 가시들까지 무너질 확률이 높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한다.
건물이 무너지면 무조건 가시까지 무너진다.
그렇기에 도박인 셈이었다.
“건물이 무너지면 안에 봉인된 악마가 풀릴 거고 그러면 혼란이 생길 거에요. 스페인 쪽 사자들도 하나둘 나타나고 있으니, 우리는 그 혼란을 틈타 도망치는 겁니다.
박율은 망치를 소환해 서희를 지나쳐 달려드는 해골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그리고는 사람 모양의 항아리를 꺼냈다.
“파티장 입구 쪽으로 갑시다.”
항아리에서 연기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화산이 폭발하듯 항아리의 아구에서 역류하는 연기는 세상을 가득 채울 듯 쏟아졌다.
이윽고 그 연기들은 수십 개로 나뉘어 각기 박율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박율 일행은 물론이고 그를 노리던 악사회 역시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분명 눈앞에 있었던 박율이 이젠 그들이 볼 수 있는 모든 방향에서 나타났으니 말이다.
“달려요!!!”
박율이 소리쳤다.
아니, 박율들이 소리쳤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일행들은 달렸다.
마치 천군만마가 전장을 가로지르듯 억겁의 박율들이 스페인의 한 등지를 온통 차지했다.
“장난질을 치다니...”
까마귀는 자신에게 달려들던 박율 여러명을 베어가르며 말했다.
그것들은 반으로 나뉘어 허공에 흩어졌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곰 역시 주먹을 움켜쥐며 쏟아지는 박율 무리를 내려찍지만, 그것들 역시 먼지처럼 사라질 뿐이었다.
뱀이 쏟아낸 아나콘다를 닮은 거대한 뱀은 꼬리를 휘저으며 박율을 쓸어내리지만, 그 어느것도 진짜 박율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상을 바꾼다.”
까마귀의 말이었다.
그는 박율의 목을 노리는 대신 그와 가까이 있던 남자에게로 칼을 겨누었다.
그리고 내뻗는다.
푹!
“내가 그것도 생각 못할까봐?”
그의 뒤에서 박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까마귀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엔 박율과 그의 일행들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
까마귀는 팔을 크게 휘둘렀다.
단 한숨에 시야를 장악하는 그림자들을 파쇄했다.
까마귀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수백, 수천 명의 박율과 그의 일행들.
그 사이에서 진짜를 찾아야 한다.
“율 씨!!!”
총을 든 남자가 소리쳤다.
그는 달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박율의 그림자 사이에서 박율의 뒤를 쫓아서 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경매가 시작되었던, 참상이 시작되었던 그 장소로.
“경매장이군.”
까마귀는 말했다.
그들은 경매장으로 가고 있다.
까마귀 역시 발을 옮겼다.
* * *
박율은 흘깃 주변을 살피며 빠르게 달렸다.
악사회들은 아직 진짜 박율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박율들이 향하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속임수에 속았다는 소리였다.
“석훈 씨. 폭탄 위치 알죠. 터트려요.”
박율은 나란히 달리고 있던 박석훈에게 말했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박율과 떨어져 다른 방향으로 뛰었다.
그리고 달리고 달려 도착한 경매장 앞.
역시나 그곳에 까마귀가 나타났다.
박율과 그의 일행의 뒤로는 곰과 뱀까지.
마치 그를 포위하듯 그들은 박율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만.”
그는 칼을 높이 들었다.
곰은 박율을 제압할 듯 주먹을 들었고, 뱀은 손가락을 휘적이며 뱀들을 소환했다.
“용케 다들 나를 찾았네?”
“그만하고 내놓지. 이제? 귀찮은데.”
뱀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곰 역시 상당히 거슬린다는 느낌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
까마귀의 칼을 박율이 쥐고 있는 항아리를 향했다.
“도대체 이게 뭐길래 그렇게 원하는 거냐?”
“...아직 그 유물의 진짜 능력을 모르는군.”
곰은 박율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그니까 뭔데.”
“알 필요 없다.”
“그럼 왜 말한건데?”
까마귀는 달려들었다.
그리고 뱀과 곰마저.
박율 일행은 그들을 막아서지만, 박율은 그들을 말렸다.
“적당히 싸우는 척 빠져요. 제가 고립되게 만들어요.”
“네!?”
“저만 믿어요.”
[척후]
박율은 망치를 높이 들었다.
캉!!!
까마귀의 날은 날카로웠다.
한 손에 유물을 쥔 박율의 약점을 놓치지 않고, 망치를 들지 않은 손을 집중해서 공격했다.
악사회의 다른 일원들을 상대하던 일행들은 박율이 눈으로 슬쩍 신호를 보내자, 그들을 박율에게로 보냈다.
까마귀 뿐만 아니라, 곰과 뱀까지.
다채로운 공격들이 박율을 향해 날아갔다.
“큭...!”
박율은 쏟아지는 공격에 주춤 물러섰다.
반격할 타이밍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반격 따윈 하지 않는다.
악사회의 세 사람은 활로를 찾을 수 없이 고립된 박율을 포위하며 다가갔다.
허나 공간이 너무 협소한 탓에 다수 대 일로 싸우기는 힘들었다.
그렇기에 까마귀가 한 발자국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는 달려들었다.
캉!!!
까마귀의 검을 막은 박율은 그를 보았다.
“내가 너랑 여러 번 붙으면서 느낀 게 하나 있어. 뭔지 알아?”
“...”
캉!!!
“검술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거.”
“...”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박율은 허리를 비틀어 검을 피하고 까마귀를 넘어 그의 뒤로 도약했다.
그리고 날아오는 곰의 공격과 뱀의 날카로운 이빨을 피했다.
[신속]
박율의 신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반쯤 무너진 건물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나타났다.
“정답은 싸우지 않는다야.”
펑!!!
박율의 말과 동시에 지반을 뒤흔드는 굉음이 들려왔다.
까마귀는 흠칫 소리를 쫓아 눈을 옮겼다.
그리고 쾅!!!
폭음이 울렸다.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듯 선율이 이어졌다.
그 폭음은 점차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중에 봐.”
박율은 말했다.
그리고 까마귀의 발아래, 곰과 뱀의 옆에서 새하얀 섬광을 내뿜으며 폭탄이 터졌다.
콰과광!!!
폭탄에 의한 충격으로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함께 건물을 지탱함과 동시에 악마를 봉인하고 있던 가시들마저 형태를 잃고 무너졌다.
쏟아지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깔리고, 이내 건물은 완전히 내려앉았다.
마치 그곳에 폐허가 있었다는 듯,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천장은 이제 눈 앞에 있었다.
쿠구궁!!!
그리고 원치 않던 누군가가 일어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세원 씨!!!”
박율은 소리쳤다.
탈출해야 할 시간이다.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악사회들이 잠시 고립된 이때.
그녀는 박율에 말에 가까운 벽에 활을 쏘았다.
그러자 불타오르는 하얀 불꽃.
불꽃은 커다랗게 변해 마치 커다란 통로처럼 변했다.
“다들 도망쳐요!!!”
박율은 소리쳤다.
그의 말에 일행들은 하나같이 통로를 향해 뛰었다.
가는 도중 해골무리가 그들을 덮치긴 했지만, 이미 그들의 능력은 해골 따위는 우습게 볼 정도였다.
일행의 대부분이 통로를 빠져나가고 이젠 박율의 차례였다.
하지만.
척.
통로를 향해 움직이던 그의 앞에 익숙한 덩치의 남자가 나타났다.
늑대 가면.
“내놔.”
남자는 말했다.
“형.”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
“율아.”
남자는 박율을 보았다.
매정했다.
냉정했고, 차가웠다.
박율은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이래야 하는 거야...?”
“넌...모를 거야...”
“도대체 뭐가 문제인건데?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절박한 사람의 심정을... 너는...”
남자는 박율의 뒤로 해골을 소환했다.
해골의 날카로운 뼈가 박율의 등에 서늘하게 닿았다.
그 날카로움은 박율을 죽이지 못했다.
단단하게 다져온 그의 일련을 꿰뚫기엔 너무나 무딘 날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사무치게 쓰라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정적.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을 감싸고 지나갔다.
마치 두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듯 너무나 차가운 바람이었다.
벌어진 옷가지 사이로 새어든 바람은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율아.”
“...”
“미안하다.”
푹!
축축한 소리였다.
첨예한 날이 기름진 고기의 단면을 찌르는 것만 같은.
하지만 박율의 몸은 아니었다.
남자의 손이 뻗은 곳은 그의 뒤였다.
“유...율 씨...”
김진목의 목소리였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새하얀 뼛조각은 그의 심장이 있어야 할 부위를 꿰뚫었다.
남자는 메마른 얼굴로 다시 박율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진목은 역류하는 피를 토해냈다.
그의 피가 남자의 가면을 적셨다.
피 묻은 늑대의 가면.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박율이 쥔 항아리를 달라는 듯 말이다.
“지...진목 씨...”
“유...율 씨... 너...너무 아프...”
푹!
남자의 손길이었다.
그리고 김진목의 말은 허공에 흩날려 사라졌다.
그의 흰자위가 하늘로 치솟았다.
“다른 이들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박율은 남자를 보았다.
손이 떨렸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더 이상 백봉기가 아니었다.
그는 늑대였다.
“...”
박율은 두 눈을 감고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세계수의 잎을 꺼냈다.
“정말...끝이구나...”
세계수의 잎을 입에 넣는다.
쓰디쓴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동시에 시야가 아득해졌다.
모든 것을 되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