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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사자 망치를 들다-95화 (95/183)

95화

백봉기는 손에 항아리를 쥔 채 침대 위 기우를 보고 있었다.

새근새근 잠을 청하는 아이의 볼에 손을 얹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차마 아이에게 손을 가져가지 못했다.

그의 손은 이미 젖었다.

이제는 살색을 볼 수 없을 만큼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너무나 가엽군.]

불길한 이의 목소리였다.

백봉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소리만 들어서도 그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대신 살기를 내뿜었다.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의 의미이기도 했다.

“...”

불길한 기운은 흐느적거리는 뱀마냥 기우에게로 기어갔다.

턱.

백봉기는 뼛조각을 소환해 불길한 기운 쪽으로 날을 뻗었다.

“...”

흐물거리며 다가오던 기운은 뼛조각 앞에서 멈춰섰다.

[까칠하긴.]

불길한 기운이 다시 기우에게서 멀어졌다.

그제야 백봉기는 뼛조각을 거두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네가 말한 대로 항아리도 가져왔는데.”

[네가 할 일은 끝났어.]

“그럼 당장 살려.”

[그건 힘들지.]

“...”

백봉기의 관자놀이에 선 핏줄이 파르르 떨렸다.

“...뭐가 문제야.”

[문제는 없어.]

“그럼...!!!”

치솟는 울분과 분노를 내뱉으려던 백봉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겨우 진정시켰다.

“...그래서 어떡하라는 건데.”

[기다려.]

“...뭐?”

[그날까지.]

그리고 불길한 기운은 사라졌다.

바람결에 사라지는 창틀의 먼지처럼 흩어졌다.

백봉기는 한숨을 내뱉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걸까.

백봉기는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자조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씨발...”

이미 너무나 멀리 걸어왔다.

돌아갈 수도 없을 만큼 멀리.

그리고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었다.

길 끝에 무엇이 존재할지 알 수 없지만, 이젠 멈출 수조차 없다.

백봉기는 고개를 들어 기우를 보았다.

“어떻게든...”

기필코 살리겠노라.

흙탕물을 구르더라도, 겨를 온몸에 뒤집어 쓰더라도, 어떻게든.

백봉기는 저도 모르게 항아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철컥.

그의 뒤로 문이 열렸다.

백봉기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항아리를 숨겼다.

* * *

소장석에게서 계약서를 얻어낸 박율은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날숨을 내뱉었다.

“이제 진짜 끝인거에요?”

“당장 해야 할 일들은 끝이에요.”

박율은 박석훈의 물음에 답을 하곤 계약서를 품속에 고이 넣었다.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모조리 끝낸 상황이었다.

역사가 개변된만큼 언제 악마들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율이 할 수 있는 건, 뿔뿔이 흩어진 사자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맞는 옷을 입혀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소장석을 마지막으로 안드라스와 플라우로스를 맞닥뜨릴 준비가 끝이 났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

박율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다들 좀 쉬어요.”

박율은 고개를 돌려 같은 자리에 있던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박율 만큼이나 피곤에 절은 얼굴이었다.

특히 한지원은 더더욱 그랬다.

통상적으로 타인의 회복력을 끌어 올려주는 그녀의 능력을 하늘이를 위해 자신의 회복력까지 끌어썼으니 말이다.

한지원은 땀에 절어 당장 눈을 뜨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괜찮아요?”

“네...네...”

한지원은 괜찮다며 손을 들어 보였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만 들어가 보겠다며 발을 돌렸지만, 비틀 중심을 잃었다.

박율은 재빨리 그녀를 받쳐주었다.

“아...감사합니다..”

“괜찮겠어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조금만 쉬어야겠어요.”

한지원은 결국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하늘이를 치료했던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몇 번은 더 치료를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제가 뭐 어떻게 업어드려요?”

박율은 등을 돌려 턱으로 가리켰다.

한지원은 됐다며 손사레를 쳤다.

“네가 왜 업어줘?”

답을 한 이는 다름아닌 서희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한껏 짜증을 내비치는 얼굴로 서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박율은 자신을 싸늘하게 쳐다보는 서희의 시선에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서희는 자리에 굳은 채 박율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요?”

“내 차 있으니, 타고 가.”

“뭐 그러시던지.”

서희는 콧방귀를 뀌며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발을 돌렸다.

“저 사람 왜 저래요?”

“그러게요?”

박석훈 역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끔보면 진짜 미친 거 같다니까?”

“야.”

박율의 말에 서희가 고개를 돌렸다.

아주 짜증이 넘실거리는 게 한 마디만 더했다가는 죽탱이를 날리겠다는 결연한 얼굴이었다.

“귀는 또 밝아.”

서희는 흥 하며 고개를 팍 돌리더니 다시 발을 옮겼다.

한지원은 박율의 어깨를 빌려 서희의 뒤를 쫓았다.

드문드문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보는 서희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박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내 서희의 차에 도착한 박율은 한지원을 뒷좌석에 눕혀주었다.

“조심히 들어가요.”

“감사해요.”

한지원은 뒷좌석에 벌렁 드러누워 말했다.

“안 타?”

서희가 물었다.

박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누구? 나요?”

“그럼 너 말고 누구겠어?”

“내가 왜 타요?”

“데려다준다니까?”

“필요없는데.”

“...”

서희는 아주 얄미워죽겠다는 얼굴로 박율을 잠시 보더니 이내 흥 하고 차에 올라탔다.

새침한 게 아주 누가 보면 고양이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데판이랑 잘 맞는건가 싶기도 하고.

박율은 흘깃 발밑의 데판을 보았다.

[뭘 봐?]

“왜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까칠해?”

[스스로의 행실부터 돌아보지.]

데판 역시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뿡이다. 아주.”

박율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볼게요.”

“네, 석훈 씨. 이제 좀 쉬어요. 컨디션 관리가 중요할 거에요.”

“네.”

박석훈의 고개가 하늘 위로 올라갔다.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보다 심연의 크기가 더 커져 있었다.

“...”

심연을 바라보는 박석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산타워 때도, 그 이후로도 저렇게 큰 심연은 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괜찮겠죠...?”

“그럴걸요?”

“...”

박율의 두루뭉술한 말에 박석훈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매번 그래왔듯 잘할 것이라는 믿음으로는 억척같은 공포를 이겨내긴 무리였다.

“그럼 저기서...”

“마왕이 나오겠죠.”

“...단탈리온 때처럼은 안 되겠죠?”

“그 양반은 착한 편이라.”

단탈리온은 인간에 호의적인 편이었다.

아니, 적대적인 쪽이 없다고 하는 게 맞겠지.

그에 반해 얼마 뒤 저 심연을 통해 나타날 악마들은 모든 것에 적대적인 악마들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우리가 괜히 지금까지 생고생을 했겠어요? 괜찮을 거에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여정의 종착점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그건 그렇고, 내일 여기 찾아와야 하는 거 잊지 말고.”

“그럼요.”

박석훈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인에서 가져왔던 선홍빛 갑주를 소장석에게 맡긴 상태였다.

선홍빛 갑주는 그 자체로도 엄청난 유물임은 두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것이 철혈의 대장장이의 손을 거치면 말 그대로 격이 남달라진다.

박율 역시 코어를 소장석에게 맡긴 상태였지만, 워낙 무기를 막 다룬 탓인지 상처가 많아 박석훈의 것보다 시간 조금 더 걸린다고 했다.

“그러면 다음에 봅시다.”

박율이 박석훈을 보았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벌써 14일이 넘게 서울과 인천 상공을 장악한 검은 싱크홀, 이른바 심연의 골짜기로 불리는 균열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가운데...”

그로부터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심연에서는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임계상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고요한 폭풍전야였다.

처음엔 모두가 불안에 떨었다.

상황은 원래의 역사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본래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심연을 눈앞에 두고, 거주하던 지역을 벗어나 안전을 꾀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위치로 되돌아가기 시작해야 했다.

정부에 등지를 둔 협회의 입김 역시 적지 않았다.

민간인들의 안전을 위해 기한다며 평범한 일상 회복을 위해 힘을 쓰고 있다는 둥, 걱정하지 말라는 둥, 미디어를 통해 많은 말을 뱉어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방심했었다.

그리고 사건은 모두가 방심했을 때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

그랬어야 했다.

원래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번 역사에서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는다.

* * *

박율은 눈을 떴다.

익숙하고도 고요한 감각이었다.

서늘한 냉기가 손끝을 타고 심장을 벼려내는 소름 돋는 감각.

그것은 마기였다.

하늘을 뒤덮은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마기.

박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하늘을 장악한 심연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때가 왔군.]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움직임이었다.

박율은 무거운 날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창가에 있던 세계수에서 피어난 이파리 3개를 뜯었다.

이제 어느 것도 예측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감각과 경험에 맡겨야 한다.

박율은 나머지 채비를 끝내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선 박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마기가 잔류하고 있다.

마치 열린 가스 벨브에서 가스가 새어 나오듯 천정을 꿰찬 심연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조금씩 지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박율은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박율은 코어를 소환해 높이 들었다.

그의 손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코어는 황금빛으로 갈무리했다.

[우오오오오!!!]

악마가 토해내는 괴성에 세상이 개벽한다.

지진이 일고, 거센 폭풍이 지상을 휘감았다.

천정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악마.

박율은 저 악마를 익히 알고 있었다.

남사태워에서 그에게 두 번째 죽음을 선사했던, 안드라스 군의 군단장, 토머였다.

“오랜만이다.”

박율의 손에서 황금빛으로 갈무리하던 코어는 어느새 기다란 장궁의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위에 망치를 걸었다.

팔꿈치를 뒤로 시위를 당긴다.

팽팽하게 조여오는 시위는 저 하늘을 장악한 토머를 향했다.

동시에 토머의 눈이 박율을 향했다.

토머는 울부짖었다.

그것의 괴성은 땅에 금을 가게 만들었고, 세상을 연결하던 창들을 깨뜨렸다.

박율 역시 시끄럽다는 듯 인상을 팍 지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토머의 머리를 향했다.

그새 방어막을 다시 만든 모양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남산타워 때 보았던 것보다는 약했다.

그리고 박율은 시위를 놓았다.

길어 늘어진 시위가 다시 원형으로 돌아간다.

그 반동에 하얀 불꽃을 머금어 화살의 형태를 한 망치가 튕겨 날아갔다.

날아가는 망치의 불꽃은 꼬리를 만들었다.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혜성처럼.

그리고 그 혜성은 제 크기보다 수천 배는 큰 행성을 향해 나아간다.

곧이어 두 유체의 충돌은 폭발을 일으킨다.

어느 것 하나가 완전히 사위어질 때까지 말이다.

“전쟁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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