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실가닥들이 세 사람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박율은 무너지는 결계 아래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력으로 세 사람을 향해 치달았다.
실들이 너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다거나 적은 숫자였다면 대충 쳐내면 그만이지만, 고양이는 마지막 발악에 누구라도 하나 데려가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실들을 그들에게 날렸다.
박율은 실들과 나란히 달리며 머리를 굴렸다.
얼른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실들을 쳐낸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실들을 한 번에 쳐내기는 무리였다.
세 사람을 떨어뜨려놓고 싶어도 속도가 따라잡을 수 있을지 역시 미지수였다.
“쳇...”
방법이 없다.
박율은 더욱 빨리 달렸다.
모두를 살리기 위한 방법은 한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해야 했다.
조금만 더 늦으면 누군가는 위험했다.
박율은 양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실들을 골라 쳐냈다.
그가 택한 방식은 치명상을 피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누군가는 죽게된다.
그렇다면 모두가 죽지 않는 선에서 치명상만을 피하게 하는 방법을 택한다.
어차피 무너지는 결계 너머엔 한지원이 있었다.
그녀의 힘을 빌리면 그정도 상처 정도는 수복이 가능할 터였다.
실들이 일행의 살갗을 꿰뚫고, 실가닥에 뚫린 상처에서 핏방울이 개화하듯 피어올랐다.
대략 열댓 개의 실가닥을 쳐낸 박율은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헉...!!!”
동시에 세 사람의 신음이 터져나왔다.
온몸에 실 가닥으로 만들어진 구멍이 송송 생겨난 채였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그들의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치료가 시급했지만, 박율은 결계 너머에 있을 한지원을 믿고 있었다.
고양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떨어뜨렸다.
고개를 처박은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
유리된 공간이 전부 깨지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저 멀리 있는 데판과 박석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아니 악마 하나와 한 사람을 상대하던 곰과 장화연은 흘깃 상황을 보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너무나 고요했다.
섬뜩한 고요함이 전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이 끝난 전장처럼 적막함이 지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가 없는 사이 악마들을 전부 헤치운 건가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도저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 아니기에 생각을 접었다.
그렇다면 군단장들을 해치우지 못하고 진 건가...?
하지만 그것조차 가능성은 희박했다.
박율을 포함한 핵심 전력이 빠졌다고는 하나 손톱을 소유한 하세원과 서희가 있는 데다 이세진과 킹콩이라는 마수조차 함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백, 수천의 사자들 역시 자리해 있었다.
“그렇다면...”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적막이 내려앉은 전장에 익숙한 이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니, 전부 쓰러져 있었다.
서 있는 존재는 그 무엇도 없었다.
하늘을 바라고 선 나무들 역시 땅에 몸을 뉘운 상태였다.
환각을 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게...!”
[이제야 나왔는가?]
박율은 흠칫 소리를 쫓았다.
그곳엔 익숙하고도 섬뜩한 이가 있었다.
“안드라스...!”
안드라스 만이 홀로 전장에 고개를 들고 늑대를 배게 삼아 반쯤 누워있는 상태였다.
[기다리느라 목빠지는 줄 알았네.]
그는 발을 굴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를 따라 늑대 역시 자리에 섰다.
“이게 지금...”
박율은 안드라스를 경계하며 시간을 살폈다.
아직 30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아직 악마들의 인간계 적응이 절반도 채 되지 않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전황은 그렇지 않았다.
한창 악마들을 상대해야 할 사자들이 전부 쓰러져있고, 악마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보이는 건 홀로 서 있는 안드라스였다.
그렇다는 건 안드라스가 제약을 감수하고 전투에 나섰다는 소리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러는 편이 더 재밌을 거 같아서 말이야.]
“미친...”
단지 재미를 위해서 이런 상황을 벌였다니.
안드라스는 주체할 수 없는 마기를 내뿜으며 박율을 향해 한 발자국 발을 내디뎠다.
제 힘의 절반도 채 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그 위세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박율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게 만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뭘 멍하니 보고 있는가?]
안드라스는 얼른 달려오라는 듯 손을 까딱거렸다.
하지만 박율은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마왕이라는 존재는 으레 그러했다.
존재만으로 기세를 꺾게 만드는 그러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역시 예상한 적은 없었다.
안드라스가 아무리 재미에 미친 악마라한들 제 살까지 깎아가며 전투에 개입을 할 거라는 예상은 전무했다.
[그쪽에서 안 오면 내가 가지.]
한 걸음.
안드라스가 다가온다.
형용할 수 없는 중압감이 그를 짓눌렀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마기가 온몸을 가득채우는 것만 같았다.
“큭...”
그리고 안드라스가 바로 그의 앞까지 다가왔을 때까지도 박율은 움직이지 못했다.
[좀 더 재밌게 만들어보란 말이야.]
안드라스는 말했다.
가까이에서 말 한마디를 듣는 것만으로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박율의 반응에 안드라스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장.]
“율 씨!!!”
안드라스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멀리 떨어진 어귀에서 악마 하나와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안드라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생겨나는 불의 고리.
둥글게 타오르는 불꽃은 이내 박율과 안드라스를 가둔 채 마치 경기장을 연상케하는 결계를 만들었다.
달려오던 데판은 흠칫 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옆으로 박석훈이 달려오지만, 데판은 그를 제지했다.
저 불꽃에 닿으면 죽는다.
데판은 저 불꽃을 알고 있었다.
일명 염화.
대상을 태워 재로 만들고, 그 재들까지 불태워 먼지로 만들고 나서야 꺼진다는 지옥의 불이었다.
데판은 어떻게든 불의 결계를 너머 박율을 도우려 했지만, 불꽃에 가까이 다가서자 불꽃은 마치 솟아오르는 분수마냥 크기를 키웠다.
[쳇...]
데판은 뒤로 물러섰다.
진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저들이 그대로 지켜볼 수도 없었다.
마왕 안드라스를 혼자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 없으니 말이다.
데판은 결계 너머 안드라스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박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기세는 어디 갔지?]
안드라스의 진언이 울려퍼졌다.
박율은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까처럼 나를 즐겁게 해보란 말이다.]
아주 단순한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무게는 억겁과 다름 없었다.
안드라스는 크게 실망한 듯한 얼굴을 했다.
박율이라면 그를 즐겁게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춘 박율은 아니었다.
그저 지레 겁을 먹은 강아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정신 차려라!!!]
저 멀리에서 데판의 진언이 울렸다.
박율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마기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가 일순간 돌아왔다.
박율은 재빨리 정면의 안드라스를 피해 거리를 벌렸다.
[이렇게 격이 형편없을 줄이야.]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안드라스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전혀 상정치도 못한 상황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었다.
박율은 숨을 고르며 안드라스를 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박율을 보고 있었다.
[네게 먼저 선수를 주지.]
안드라스는 팔짱을 풀어 팔을 넓게 펼치며 말했다.
그리곤 그의 몸을 주박하고 있던 모든 방어기제를 제거했다.
“...”
반 절짜리 마왕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만, 그 순간 박율은 그것조차 자만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저 아득한 존재였다.
태양을 바라고 선 나무가 아무리 하늘 높이 자라도 태양에 닿을 수 없듯이 말이다.
이런 상황에 저 존재와 정면에서 싸워야 한다니.
승산이 적다 못해 없는 정도였다.
안드라스는 한참을 기다려도 박율이 움직이지 않자 눈썹을 달싹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뭐하는가?]
“...”
[아직도 부족한 모양이군.]
안드라스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러자 두 사람을 가두던 불꽃이 크기를 벌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불꽃은 결계 밖에서 박율을 지켜보던 데판과 박석훈이 있는 자리까지 지평을 넓혔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박율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데판과 박석훈이 결계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
그리고 피어난 불꽃은 마치 족쇄마냥 데판과 박석훈의 몸을 감쌌다.
[앞으로 나를 실망 시킬 때마다 한 명씩 죽이겠다.]
안드라스는 웃었다.
닥쳐올 즐거움을 미리 만끽하는 표정이었다.
“미친...”
[선수에 머릿수까지 양보했다만, 더 이상은 내 인내심이 버티지 못할 성 싶은데.]
안드라스는 경고아닌 경고를 내뱉었다.
웃는 얼굴 이면엔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는 표정이 돋보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까딱.
어떤 공격이든 받아주겠다는 듯 팔을 벌렸다.
[오거라.]
박율은 머리를 굴렸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유리한 것을 사실이었다.
그의 곁으로 온 데판와 박석훈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율 씨... 어떡하죠...”
“어떡하긴요... 방법이 없잖아요.”
싸워야 한다.
어차피 그래야 하는 일이었다.
상황이 조금 변질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방에 쓰러져 있는 이들의 치료가 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끝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불상사가 벌어지겠지.
박율은 양손의 무기를 들었다.
“할 거에요...!?”
박석훈은 전투를 위한 자세를 잡는 박율을 보며 섬짓한 얼굴을 했다.
“방법이 없잖아요.”
“...”
“한 방에 끝내야 해요. 안드라스는 어차피 우리를 무시하고 있어요. 한방에 죽이지 못할 걸 아니까 저렇게 기고만장한거죠.”
안드라스는 무얼 그리 속닥거리는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틀린 말은 아니죠. 한방에 끝내진 못할 거에요. 공격을 시작으로 총력을 쏟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박율에겐 두 번의 기회가 남아있다.
박율은 흘깃 주머니의 세계수의 잎사귀를 보았다.
할 수 있다.
어차피 이 순간을 위해 지금껏 달려온 게 아니었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데판이 말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에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곳의 누구보다 저 존재의 저력을 잘 아는 이였다.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할 수 없어도 해야죠. 그러려고 여기까지 왔고.”
이곳에서 실패한다면 끔찍한 과거를 반복하게 된다.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박율은 크게 심호흡을 하곤 자세를 잡았다.
오른발을 뒤로 중심축을 잡고, 조금 낮은 자세로 반동에 대비한다.
그의 오른손에 힘을 집중하며, 손망치의 크기가 부풀어오른다.
마치 여우비가 소나기가 되듯이 쏟아지는 힘이 망치에 집중된다.
망치는 이윽고 지평선마저 집어삼킬 듯 커다란 철퇴로 변했다.
망치를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근육이 수축했고, 핏줄이 터질 듯 피부에 도드라졌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