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기우가 조금 다칠 수도 있어요.”
박율은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백봉기는 입을 꾹 닫은 채 말이 없었다.
“최대한 기우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사실 플라우로스를 상대로 그릇을 헤치지 않고 그를 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년 전 과거에서도 사자들은 플라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온갖 기행을 벌였었지만,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그릇을 헤치지 않고는 상대하는 것을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극단적으로는 그릇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박율은 더더욱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완전 불가능은 아니었다.
“...나 믿어줄 수 있어요? 형?”
“...”
백봉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날숨을 내뱉는다.
너무나 깊었다.
그 안에 담긴 슬픔은 심연과도 같았다.
아득한 그 끝에서 백봉기는 고개를 떨구었다.
박율은 착잡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될 거라고 확신은 못해요.”
“...”
“하지만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할게요.”
“율아.”
“제가 어떻게든...”
백봉기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박율을 보았다.
박율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백봉기는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두 입술을 떨어뜨렸다.
“부탁할게... 우리 기우...”
“...”
박율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벌어진 입은 저절로 닫혔다.
그의 축축한 말이 박율의 입을 틀어막았다.
백봉기는 터지려는 울음을 겨우 참는 듯 입술을 꽉 깨문 채 박율을 보고 있었다.
마치 기우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듯한 그 목소리가 너무나 처연했다.
처음에는 희망이었다.
어떻게든 기우를 볼 수 있다는 작달만한 희망.
벼랑 끝에 매달려 생존을 갈구하는 이의 절박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제야 그는 잘못되었음을 인지했다.
아니, 사실은 그전부터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외면했을 뿐이었다.
아이라는 핑계로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말이다.
그렇기에 백봉기는 차마 그에게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내 욕심 때문에...기우한테 너무 큰 짐을 안겼어...”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리고 눈앞에서 되찾은 아이를 다시 잃어야 하는 그 마음을.
박율은 차오르는 울분을 한숨으로 내뱉었다.
“...형.”
“하...”
“그때 한 말 기억나요?”
“...”
“이번에는 꼭 형이랑 기우 살리겠다고.”
“율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릴 거에요. 그러니까 포기하지마.”
박율의 목소리는 너무나 비장했다.
먼지처럼 허공에 흩날린 희망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백봉기의 눈에서 작은 물방울이 툭하고 떨어졌다.
“미안해...내가...”
“됐어...”
박율은 백봉기의 말을 더 듣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청동거울을 꺼냈다.
“그건...?”
“...이걸로 기우를 살릴 거야.”
백봉기의 시선이 조금은 위로 박율의 눈을 보았다.
박율은 이제부터 설명을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명 청동거울이라 불리는 성유물의 첫 번째 능력.”
박율은 청동거울에 본인을 비춰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만들어냈다.
그의 옆에 생겨난 분신은 박율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복사. 그리고.”
박율은 코어를 단검의 형태로 바꾸고는 그대로 그의 분신의 목을 내찔렀다.
동시에 분신의 목을 베어낸 박율이 인상을 팍 지었다.
아주 잠시 고통에 흠칫 떨던 그는 이내 숨을 고르고 다시 백봉기를 보았다.
“...청동거울의 두 번째 능력, 사기.”
말 그대로 복사된 물체에 임의의 조작을 가하는 사기였다.
물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기를 저지를 때의 그 후유증은 온전히 사용자의 것이었다.
사기의 경중에 따른 고통은 살에 베이는 통증에서 온몸을 불사르는 통증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사기의 기준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복사된 물체의 크기에 따라 경중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다.
이번 사기는 오직 박율의 분신만을 만들어냈기에 살을 찢는 고통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청동거울의 세번째 능력.”
박율의 손에 있던 청동거울의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골동품 같은 형태의 청동거울은 마치 흐물거리는 액체처럼 일렁이더니 이내 짧은 단도로 바뀌었다.
청동거울의 또 다른 이름, 만화경.
청동거울의 마지막 능력은 흡수였다.
어떻게보면 청동거울로써 쓸 수 있는 마지막 능력일수도 있었다.
마왕을 상대로 그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기는 어려우니까.
조금이라도 조절에 실패했다간 성유물이 부서진다.
하지만 박율은 그 능력을 십분 활용해야 했다.
“...이 공간이 사라지는 순간, 분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내 팬이 형을 날릴 거에요. 그리고 형은 플라우로스의 앞으로 날아가서 나를 다시 소환하면 되는 거죠.”
박율의 말에 백봉기는 떨리는 날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해줄 건 딱 하나에요. 시간끌기.”
박율은 나침반을 꺼내 들며 말했다.
* * *
플라우로스의 복부를 꿰뚫은 은빛검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올 줄이야. 놀랍군.”
플라우로스는 복부에 튀어나온 칼날을 보며 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너무나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박율과 백봉기를 보았다.
두 사람을 훑던 그의 눈은 이내 백봉기에게 정착했다.
“이렇게 나온다는 건. 아이를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
백봉기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꽉 진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플라우로스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복부를 꿰뚫은 검날을 보았다.
은색빛의 검날이 점점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마기가 검날에 흡수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사뭇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면 볼수록 놀랍군. 그 사이 이런 것들까지 준비하다니.”
그는 역시나 박율을 보며 말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아마 할 수 없을 터였다.
기껏해야 몇 분 정도겠지만, 아무리 강한 마왕이라한들 만화경 상태의 청동거울의 힘을 이기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플라우로스는 전신에서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힘에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건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군.”
그의 눈은 백봉기를 향했다.
“보아하니 이 유물은 온전히 내 힘만을 앗아가는 게 아닌 것 같다만.”
“...뭐?”
“이 몸이 가진 모든 힘을 앗아가고 있다는 말이지.”
백봉기의 시선이 아주 잠시 떨렸다.
“...형, 듣지마요.”
“아마 기우를 구해준다는 명목으로 너를 설득한 것 같다만, 이대로면 함께 아이가 죽게 되겠지.”
“뭐...?”
“형, 그럴 일 없어요...! 거짓말을...”
“농이라 믿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플라우로스의 목소리는 비소에 젖어있었다.
듣기만 해도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주 잠시 플라우로스의 눈빛이 변했다.
검고 탁한 그 눈빛 사이로 너무나 맑고 투명한 빛이 반짝였다.
“아빠...나 너무 아파...”
백봉기의 두 눈이 일순간 굳었다.
기우의 목소리였다.
아이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그는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플라우로스를 향해 움직였다.
아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
머리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고통에 차 발버둥을 치는 듯 간절하게 바뀌고 있었다.
“아빠...”
“기우야...!!!”
“죽기 싫어...!!! 아빠 도와줘...!!!”
백봉기의 동공이 요동쳤다.
박율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기...기우야...”
“형...아니야...!”
“기...기우가 아프데...”
“형...!”
“아빠!!!”
기우의 마지막 외침에 백봉기는 박율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뛰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플라우로스의 복부를 꿰뚫은 은빛의 단도를 향했다.
턱!
하지만 동시에 그를 막은 것은 역시 박율이었다.
“...비켜.”
“형 안돼.”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백봉기의 두 눈에 너무나 가여운 샘물이 고여있었다.
그는 뼛조각 꺼내 높이 들었다.
“...당장 비켜.”
하지만 박율은 굳건했다.
자리에 굳은 채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비키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아주 찰나의 정적 이후, 백봉기는 살의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캉!!!
박율의 망치와 백봉기의 뼛조각이 맞부딪힌다.
“이러면 안 된다니까...!!!”
“넌...몰라...”
백봉기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망설임조차 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달려들었다.
그에 반해 박율은 어떻게든 그를 막으려 안간힘을 썼다.
백봉기는 그의 빈틈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캉!!!
박율은 온몸으로 백봉기를 막았다.
“...이러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박율이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플라우로스를 향했다.
그 눈빛엔 살기가 담겨있었다.
“...!!!”
백봉기와 플라우로스를 보던 박율은 더 늦기 전에 땅을 박차고 플라우로스에게 달려들었다.
캉!!!
하지만 달려든 백봉기의 뼛조각이 박율의 살기를 막는다.
박율은 그를 지나쳐 플라우로스를 공격하려 들었지만, 그럴때마다 백봉기는 뼛조각을 치켜들고 그를 막아세웠다.
“이걸 어쩌나. 내가 또 방해를 한 모양이군.”
플라우로스는 웃었다.
이 모든 일을 그저 하나의 여흥으로 여기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끝을 알고 있다는 듯 너무나 거만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대로 기우를 또 잃을 순 없어...”
“제발...!!!”
두 사람은 서로를 밀쳐내며 어떻게든 플라우로스에 닿기 위해 무기를 휘둘렀다.
같은 대상에게 닿기 위한 두 가지 살의가 충돌한다.
누군가는 살리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는 죽이기 위해.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로군.”
플라우로스가 말한다.
그는 두 사람의 전투를 관망하고 있었다.
누가 달려들든 상관없다는 듯 태평한 투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마르가리타를 향했다.
그녀 역시 당혹스러운 시선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서 보고만 있을 건가?”
『...』
“자네라면 한 아이의 생명과 정의(正義)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나?”
『닥쳐. 이 쓰레기 새끼...』
플라우로스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녀는 선뜻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 망설이는 듯 보였다.
플라우로스는 그저 즐겁다는 듯 미소를 흘겼다.
그러는 사이 그의 옆으로 누군가 달려들었다.
그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는 백봉기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달려드는 박율이 보였다.
“하...”
백봉기의 숨결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플라우로스의 복부를 꿰뚫은 은빛 검을 집었다.
그리고는 뽑는다.
“안돼...!!!”
그의 뒤로 들려오는 박율의 외침.
허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미 백봉기의 손은 검을 뽑은 뒤였다.
“이걸 어쩌나.”
플라우로스의 웃음소리가 귀창을 파고든다.
너무나 불쾌한 그 음성이 마기와 함께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아비의 마음은 어쩔 수 없나보군.”
그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플라우로스에게 달려든 박율은 폭발하는 마기에 그대로 날아갔다.
하지만 날아간 박율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