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세상은 짙은 색 보랏빛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심연은 태양을 가렸고, 겨우 틈새를 찢어 지상에 내리쬐는 태양 빛은 더 이상 밝을 수 없었다.
악마들이 인간을 유린하고, 악한들이 활개를 친다.
그야말로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희망은 없었다.
터벅.
지반을 대신하여 바닥을 짓누르는 침묵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터벅.
소리의 주인은 손에 쥔 검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흩날리는 핏물은 바닥에 떨어져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이미 땅바닥은 검붉은 핏물로 더럽혀졌으니 말이다.
남자는 공포에 떨고 있는 누군가 앞에 멈춰섰다.
누군가의 정체는 중요치 않았다.
“사...살려주세요...!!!”
애원하는 그 소리는 너무도 간절했다.
허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의 목 끝까지 들어찬 악이 그의 귀를 틀어막은 뒤였다.
높이 들어 올린 검날은 보랏빛 세상을 비춘다.
모두가 숨을 죽인 그 세상을.
누군가는 양손을 모은 채 신을 불렀다.
“시...신이시여... 가여운 어린 양을...”
차악!
날카로운 검 끝을 따라 핏물이 만개한다.
이윽고 귀를 찢는 비명도 사라진다.
털썩.
허나 마지막까지도 누군가는 발악했다.
찢어진 살가죽을 틀어막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이미 세상은 더럽혀졌다.
희망이라는 것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무언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자신만을 믿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헛된 망상일 뿐이다.
남자가 마인이 된 것에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쓸데없는 발악은 객기다.”
남자는 말한다.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미 그들은 바닥에 짙게 깔린 흑 속에 스며들었으니 말이다.
남자는 동태같은 눈깔로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누군가를 보았다.
공허한 마음은 한숨으로 흘러나온다.
그는 사체가 된 이의 위에 앉아 가져온 감자를 꺼내먹었다.
텁텁하며 아무맛도 나지 않았다.
남자는 감자를 한입 씹어먹더니 이내 바닥에 버렸다.
가끔은 그가 생각났다.
박율.
뭣도 없으면서 객기만을 가지고 발버둥을 치던 남자.
허나 그는 이미 죽었다.
발악한 만큼 객기를 부렸기에 죽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가 말한 것처럼 희망이라는 것이 실제하는 것일까하고.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날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진해서 마인이 된 이상 다른 이들을 죽여야 하루라도 더 연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짓이겨진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희망의 뿌리를 죽여야 했다.
스스로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남자의 이름은 강진호.
인간을 배신한 마인이었다.
* * *
“...?”
눈을 뜬 박율은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흰 배경 밖에 보이지 않는 백으로 가득 들어찬 공간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공허했다.
박율은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상체를 들었다.
“뭐여...?”
그리고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손으로 가슴 부위을 매만졌다.
눈을 감기 전 분명 뼛조각에 찔렸었지만, 상흔은 없었다.
다른 곳을 만져봐도 상처가 있다거나 하는 건 없다.
“아.”
결국 죽었구나.
박율은 괜히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죽을 것을 각오하고 뛰어든 판이었다만, 막상 죽으니 괜스레 씁쓸한 기분이 머릿속을 꿰찼다.
씁쓸한 기분을 뒤로 박율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렇담 여기는 저승인건가?
근데 저승이라는 곳이 이렇게 새하얗기만 한 곳인가?
그가 아는 저승은 이런 곳은 아니었다.
염라대왕이 있고, 온갖 막 7개의 지옥을 넘어서 마지막에는 환생을 하는, 뭐 어쩌구저쩌구 하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들어온 공간은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뭐가 됐든 보이는 게 없다.
지옥인가?
“근데 내가 지옥에 갈 정도로 나쁜놈은 아니었잖아. 가끔 장난이 도가 지나쳐서 그렇지.”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 살리겠다고 과거로까지 돌아와 그 염병을 떨었는데, 지옥은 말도 안된다.
가끔 장난이 도가 지나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옥에 보낸다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럼 여긴 천국인걸까.
새하얀 배경을 뚫어져라 보던 박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흠... 딱히.”
아무리 봐도 천국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보통 지옥을 검고 붉은색, 천국을 새하얀 색으로 유추를 한다지만, 이렇게 새하얗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 천국 같아 보이진 않았다.
천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마냥 편한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정신병동에 가까우려나.
여하튼.
그럼 죽은 게 아닌 걸까.
그렇다면 왜 내가 여기 있는거지?
박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빠졌다.
분명 마지막 기억은 플라우로스와 함께 백봉기의 뼛조각에 맞아 최후를 맞이한 장면이었다.
그 뒤로는 뿌연 안개가 들어찬 듯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으로 눈을 뜬 곳이 여기였다.
그의 기억상 죽은 건 확실했다.
심장을 뚫리는 고통과 숨이 멎는 감각이 아직도 서늘하게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럼 죽은 건 맞는 거 같은데.
“여기가 저승이 맞다는 건가? 그렇다기엔 너무 없는데.”
없어도 너무 없다.
인기척도,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도, 하다못해 티끌 하나도 없다.
“저승에 와봤어야 알지...”
아니면 누가 천국으로 데려가려나?
영화 같은 걸 봐도 차사라던지 저승사자라던지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망자를 데려가곤 하니까 말이다.
거참, 손님한테 박하구만.
“저기요! 누구 없어요?”
박율은 소리쳤다.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없다.
그의 말은 허공을 떠돌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니, 바닥은 없었다.
모든 것은 빛의 입자로 흩어졌다.
“...”
뭐 어쩌라는 건지.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박율은 그냥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더니 이내 대자로 바닥에 퍼질러 누웠다.
기다리다 보면 뭔들 나오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자리에 앉아 멍하니 앉아있다보니 쓸데없는 상념들이 하나둘 수면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 복잡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대충 허망하고 허무한 그런 감정들이었다.
어차피 죽을 각오로 몸을 던졌다만, 막상 죽으니 괜히 그랬다.
유명 맛집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곳을 찾아가 몇 시간을 기다려 음식을 먹었더니 그저 그런 맛일 때의 느낌이랄까.
대충 뭐 그렇다는 소리다.
그래도 죽은 뒤에 지옥이던 천국이던, 그게 아니라면 존재가 사라지던 무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새하얀 황무지 말고.
“아, 몰라. 생각하기도 귀찮아.”
박율은 머리를 휘저으며 상념을 날렸다.
길었던 여정이지만, 충분히 할 만큼 했다.
누가봐도 입을 틀어 막게 만들만한 여정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진짜 아무도 안 와?
사람이 죽어서 저승까지 왔는데 레드카펫까지는 아니더라도 에스코트는 와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저승에는 그런 매너가 없는건가.
한참을 앉아 멍하니 있던 박율은 이내 일어났다.
가만히 있는 것보단 움직이는 게 더 나을 듯했다.
마냥 앉아있다가는 미칠 것 같았다.
새하얀 병동에 갇힌 사람들이 미친다는 게 괜히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율은 다시 걸었다.
정처없이 발이 닿는대로 걸었다.
뭐라도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여전히 보이는 건 없다.
“뭐라도 좀 나와라!!!”
한참을 걷던 박율이 소리쳤다.
체감상 몇 시간을 걸은 듯 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진짜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힘이 부치는 것도 아니고, 숨이 차는 것도 아니다.
“하아...”
몇 시간을 걸으며 알게 된 건 여기가 익히 알던 저승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흔히 아는 그런 저승이라면 그래도 이미 죽은 사람들이 먼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굳이 따지자면 무간지옥 정도일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지옥에 갈 정도로 잘못한 건 없다.
따지고 따지다보니 결국 저승으로 와야 할 사람이 이상한 곳으로 빠져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죽은 건 매한가지구나.
이럴 때 옆에서 가끔 쫑알쫑알대며 이상한 이야기나 하는 데판이 그립기도 했다.
아니면 매번 곤란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도와주는 그 누나라던지 말이다.
석훈 씨도 놀리는 맛 좋았는데.
“에라이 씨...”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죽는 건데.
그냥 치킨이나 왕창 먹을 걸.
“거기 신님 있으면 좀 뭐라도 해줘 봐요. 끝까지 해주는 게 없어. 그나마 알려준 로또 번호도 3등이 뭐야. 3등이. 신이라는 작자 심보가 그것 밖에 안 돼요!? 부하직원 데려다 놨으면 적당히 챙겨주기는 해야지! 아니면 나 유배 보낸겁니까!? 해준 것도 없으면서 사람 유배지가 보내고! 에라이, 엿이나 까잡수십쇼!”
아주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쏟아내고 그나마 속이 후련해지던 순간이었다.
지루하고, 공허하며, 참담한 심정이 목 끝까지 차오르던 때, 치솟던 간절함 끝에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
동시에 그의 발 끝의 그림자에서.
물론 그림자는 아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엔 박율을 제외하곤 아주 작은 점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여하튼 그의 발끝의 그림자에서 희끄무리한 무언가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각기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 둥그스름한 무언가는 점차 사람의 형태로, 그리고 악마의 형태로.
알에서 병아리가 태어나듯 익숙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
[...?]
『...?』
세 가지 시선이 교차했다.
박율은 자신이 헛것을 보나 싶어 두 눈을 싹싹 비볐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앞엔 너무나 익숙한 실루엣의 두 사람이 있었다.
데판과 마르가리타의 모습을 한 무언가.
“내가 미쳤나? 이제 하다하다 헛것을 보네.”
온통 흰 병동에 갇힌 사람은 결국 미치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 안 미치고 어떻게 배기겠어.
『난 분명...』
[어떻게 된 일이지?]
“워우 씨, 헛것이 말도 하네.”
그래도 헛것이라도 보이니 반가웠다.
박율이 이 새하얀 곳에서 눈을 뜨고 처음 만난 무언가였으니 말이다.
『율아...』
근데 헛것치곤 너무 생생하다.
진짜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난 분명 네게 흡수당해 죽었는데 이게 무슨...]
『율아...!!!』
마르가리타 누나의 모습을 한 헛것이 달려와 그에게 안긴다.
“컥...”
숨이 막힌다.
내가 단단히 미치긴 했나보다.
이 정도로 실감 나는 헛것이라니.
박율은 힘겹게 마르가리타를 떼어냈다.
“아우 숨 막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몰라도...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니...』
[...무슨 짓을 한거냐. 인간.]
박율은 조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데판과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아무리 헛것이라지만, 이렇게 생생할 수가 있나?
아직 그렇게까지 미친 거 같지는 않은데.
박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뚫어져라 보았다.
두 사람은 너무 적나라하게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부담스러운 듯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설마 진짜에요?”
[우리가 가짜로 보이냐?]
“내가 죽고 이상한 곳에 떨어져서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
『네가 왜 죽어. 내가 너 살리려고 죽었는데.』
“에...예!?”
마르가리타는 박율이 죽음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의 문턱에 올라섰을 때 이후의 상황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