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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사자 망치를 들다-122화 (122/183)

122화

마르가리타의 말을 들은 박율은 자리에 굳어 입을 떡 벌린 채 그녀를 보았다.

“...그렇게 나를 살렸다고요?”

『응.』

“그럼 나는 죽은 게 아니고...?”

『당연하지. 내가 널 어떻게 살렸는데.』

박율은 멍하니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그럼 여긴 어딘데?”

[적어도 마계는 아닌 듯하군.]

데판 역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런 상황을 인간들은 멘붕이라 하던가.]

“조용히 좀 해봐요. 여기서도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나 지금 정리가 안 되거든요?”

후우.

정리를 해보자.

분명 난 심장을 꿰뚫리고 죽었다.

하지만 내 죽음을 가만히 볼 수 없었던 마르가리타 누나는 제 몸을 희생해가며 나를 살렸다.

그렇다면 나는 죽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근데 나는 왜 여기서 눈을 뜬 것인가.

“여기는 어딘데. 도대체!”

저승도 아니고, 이승도 아니고.

게다가 눈앞에 있는 악마와 천사도 이곳을 모른다는 건 마계도 천상계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박율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혼자 입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렸다.

“뭐가 문제야. 도대체...”

[짐작 가는 곳은 없냐?]

“있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요?”

[답도 없는 상황, 답없상이로군.]

“하, 제발 그딴 소리 좀 집어치워요. 아니 도대체 누가 그딴 말을 해요? 줄일 걸 줄여야지. 인터넷 좀 그만보라니까, 이상한 것만 배워왔어.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계속 그렇게 할 거에요?”

[요즘 인터넷에서는 이렇게...]

“집어치워요.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눈동자를 굴리던 마르가리타는 무거운 한숨을 팍 뱉더니 입을 열었다.

『...어딘지 알 거 같아.』

“네?”

[이제 막 한마디 했는데 말을 그렇게까지...]

박율은 의기소침하게 어깨를 축 늘이는 데판을 무시하곤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줄곧 팔짱을 낀 채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천상계와 인간계, 그리고 마계, 그 사이, 어딘가.』

그녀의 대답을 들은 박율은 멈칫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요?”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리고 아까 그건 인터넷에서 본 게 아니라, 내가...]

『세 가지 세계를 연결하는 그즈음 어딘가에 ‘백지의 세계’ 이라는 게 존재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세상.』

“여기가 백지인지 뭐시긴지 그 세상이라는 거에요?”

『아마도.』

“그럼 어떻게 나가요...?”

박율의 눈에 작은 희망이 아른거렸다.

몇 시간이나 이곳에 갇혀있던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며칠일 수도 있었다.

정말 조금만이라도 이곳에 더 체류했다간 사람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뒤이은 마르가리타의 말은 단호했다.

『없어.』

“...에?”

자리에 굳어 그녀를 보는 박율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희망에서 이젠 절망으로.

『말 그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백지의 세계’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문은 물론 길조차 없지.』

“그럼 어떻게... 나갈 방법이 전혀 없는 거에요?”

마르가리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박율은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두 손을 떨어뜨렸다.

기껏 살아남았더니, 여기에 평생 갇혀야 한다니.

수십 시간을 넘게 이곳에 갇혀 깨닫게 된 사실은 이곳에서는 갈증, 식욕, 피로,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다.

다시 말해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건 멈춰진 시간 속에 평생을 갇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연옥.

끝없는 지옥이었다.

[백지의 세계라면 주군께 들은 게 있다만...]

“...여기는 사실 지옥이었구나.”

[내 말은 이제 듣지도 않는군.]

“장난 좀 친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이었나?”

조금 과하긴 했어도, 그게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지옥에 떨어진 거지?

악마를 죽인 것도 죄로 치는 건가.

아니, 악마들 때려죽이라고 여기로 보내놓고 그거 때문에 지옥으로 보내는 거면 양심이 있긴 한 거야?

신이라는 작자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진짜.

박율은 혼자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온갖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헤엄치고 있었다.

마르가리타는 그런 그를 잠시 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푹 떨어진 박율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하지만 마르가리타는 여전히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 세계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다시 말해 안에서는 나갈 수 없다는 말이거든...』

“...?”

『외부세계의 힘이 필요해』

“외부세계의 힘...?”

잠시 생각을 하던 박율은 곧바로 나침반을 꺼냈다.

“바깥에 일단 도움을 청해보면...”

『이곳과 다른 세계는 단절되어 있어서 그거 안 될 거야.』

“에...?”

박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응시한 채로 나침반을 들어 흔들었다.

진짜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흔한 나침반을 손에 쥔 듯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나침반의 추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하염없이 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나가라는 거에요.”

『알면 말해줬지.』

“씨발...”

속절없이 이곳에 갇혀야 한다는 말이었다.

박율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 말을 한 번...]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하나.

일전에 단탈리온이 건넸던 종이 한 장이 떠올랐다.

“...잠깐, 어쩌면 그 외부세계의 힘이라는 거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뭐...?』

박율은 저민 품속에서 그에게 받았던 종이를 꺼냈다.

새하얀 양피지 같은 종이 한 장.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알려줄테니.]

단탈리온이라는 마왕이 그에게 건넸던 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종이는 그저 백지일 뿐이었다.

아니, 가운데에 점이 하나 박혀있는 백지였다.

그리고 그 순간.

백지에 찍혀있던 점은 물속에 번지는 물감처럼 지평을 넓히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번개를 그리듯 백지였던 종이에 기다란 선들이 늘어졌다.

늘어지는 선들은 꿈틀거리는 벌레마냥 교차하고 교차하며 하나의 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윽고 백지였던 종이는 하나의 그림으로.

“지도...?”

지도였다.

그리고 지도의 선들은 마치 그에게 방향을 알려주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박율은 지도가 이끄는 방향을 쫓아 고개를 들었다.

마냥 새하얗던 공백 위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느껴지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 아스팔트 도로 위 아지랑이가 생겨나듯 새하얀 공백 위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저기...”

박율의 말에 데판과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돌렸다.

[저건...]

그리고 본능적으로 일렁이는 무언가를 향해 발을 뻗는다.

『잠깐 ...!』

마르가리타는 겁도 없이 움직이는 박율을 향해 손을 뻗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걸어갔다.

그리고 박율이 일렁이는 무언가를 넘어가자 그대로 사라졌다.

[...!]

데판과 마르가리타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사라졌어...』

[...사라졌군.]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먼저 움직인 쪽은 데판이었다.

[우려하는 게 무언지 알겠지만, 어차피 여기서 가만히 있느니, 저게 뭐든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겠나.]

데판은 그 말을 끝으로 박율이 넘어간 아지랑이를 뒤따라갔다.

마르가리타는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사라진 그 자리를 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곳은 백지의 세계, 그야말로 미지의 공간이었다.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무엇이 있을지, 저 아지랑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는 건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백지의 세계에서 잘못된 길을 찾으면 끝없는 바닥으로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들은 것으로 끝났다면 다행이겠지만 말이다.

『...』

멍하니 아지랑이 너머를 보던 마르가리타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발을 옮겼다.

『몰라 이 씨, 어차피 뒤진 거. 이래 뒤지나 저래 뒤지나.』

지레 겁을 먹고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무서워하는 건 그녀의 성격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게 그녀 아니던가.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지랑이에 손을 뻗었다.

* * *

[드디어 왔는가.]

아지랑이를 넘은 박율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내 흐릿한 시야가 밝아지며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와 똑같은 백지의 세계였다.

허나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박율의 시야 끝에 단탈리온이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노인과 체스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에...?”

[뭘 놀란 얼굴을 하고 있나.]

박율을 본 단탈리온은 체스말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맞은편에 있던 노인은 입을 달싹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창 재밌었는데, 쯔쯔...”

단탈리온은 그런 노인을 무시한 채 박율에게로 걸어갔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무슨 상황이냐니. 딱 보면 모르겠는가?]

“모르니까 물어보죠. 그쪽이 왜 여기에...?”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초대 정도로 생각하지.]

“그럼 그쪽이 나를 여기로 부른...”

[주군...!!!]

뒤에서 데판의 벅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척!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데판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채로 있었다.

단탈리온은 가볍게 손을 휘저어 일어나라는 뜻을 전했다.

[어찌 여행은 즐겁더냐?]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하였더냐.]

단탈리온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뵙고 싶었습니다. 주군...]

“갑자기 초를 쳐서 죄송하긴 한데, 일단 설명을 좀 해주시죠.”

감격의 상봉은 좋다만, 박율은 일단 이 상황의 해석이 우선이었다.

왜 저 마왕이 여기 있는지, 왜 그를 이곳에 부른 건지 말이다.

『뭐야, 너?』

이번엔 마르가리타의 목소리다.

“하이고.”

박율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주인공들이 모두 모였군.]

『율아, 이리와.』

마르가리타는 한껏 경계를 한 목소리로 박율에게 말했다.

“괜찮...”

박율은 괜찮다며 손을 들지만, 마르가리타는 그의 손을 낚아채 자신의 뒤로 숨겼다.

하지만 박율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왔다.

『저거 마왕이야...!』

“괜찮아요. 저 마왕은 나쁜놈 아니라서.”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뭐...?』

“우리를 여기로 부른 악마에요.”

[그대의 행동 역시 이해한다네.]

마르가리타는 박율과 단탈리온의 말에 벙찐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박율은 여전히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있는 그녀에게 손에 쥐고 있던 지도를 보여주었다.

“이거 준 악마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경계할 필요없어요. 그리고 저기 고양이 아저씨 상사이기도 하고.”

[크흠, 고양이 아저씨가 무슨 말이냐.]

데판은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목을 긁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마르가리타는 그제야 조금은 경계를 푼 모습을 했지만, 여전히 여차하면 공격할 듯한 자세는 풀지 않았다.

박율은 안도의 한숨을 팍 뱉더니 다시 단탈리온을 보았다.

“그래서.”

단탈리온은 기다리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를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에요?”

[그리 거창한 이유는 아닐세.]

단탈리온이 말을 잇는다.

[네게 마왕의 자리를 넘겨주려 하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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