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박율을 따라 새하얀 문을 넘어온 이들은 고개를 들었다.
어디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커다란 숲.
포탈을 넘어 들어선 곳은 별안간 울창한 숲속이었다.
방금 전까지 있던 폐허가 된 도시와는 정반대의 푸름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먼저 넘어와 있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탈을 넘어오는 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린다.
“오셨다...!”
박율 일행을 본 이들이 소리쳤다.
그들은 한껏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로 일행에게로 달려가려 하지만 선두에 서 있던 외팔의 남자가 사람들을 막아세웠다.
그리고 허리춤에 있던 칼을 꺼내 들었다.
“누구십니까.”
무신 한명련.
팔 한쪽을 잃기 전, 한때 한국의 영웅 중 한명이었던 남자였다.
중후한 외모의 펄럭이는 소매가 돋보였다.
그는 살기 서린 얼굴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아, 이 사람은 율씨가 찾은...”
“그 사람 말고 당신.”
한명련의 검날 가리킨 이는 다름 아닌 박율이었다.
무섭도록 날카로운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박율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한명련의 행동에 모여있던 이들이 모두 놀란 얼굴을 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박석훈이 나서서 그를 말리려 했지만, 한명련의 칼날은 되려 그를 향했다.
“느껴지지 않습니까.”
“네...?”
한명련의 칼날이 다시 박율을 향하며 다른 이들의 시선 역시 그를 향했다.
“마기.”
그리고 그 한마디에 모두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옆에 서 있던 박석훈과 서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전까지 마기로 가득 들어찬 공간에 있었던 나머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기를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내가 설명할게요.”
박율이 모두 이해한다는 얼굴로 발을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차악!
한명련의 검기가 박율의 발 앞에 떨어졌다.
“...한 발자국 더 오면 죽습니다.”
그리고 말했다.
그의 살의는 진심이었다.
그마저도 곁에 다른 이들이 있기에 조금은 누그러뜨린 듯한 살기였다.
하지만 박율은 오히려 안심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돌아왔구나.”
한명련의 눈빛에서 이곳이 꿈이나 다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실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희도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율 씨라는 건 확실해요.”
“그만.”
한명련의 경고.
“제가 물어본 건 당신입니다. 석훈 씨가 아니라.”
“오케이.”
박율은 알겠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설명할게요.”
“...”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자각했던 순간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누구를 만나던 이해를 시켜야 할 필요성을 말이다.
아무것도 없던 남자가 하루 사이 너무나도 달라져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처음부터 설명하는 게 낫겠죠? 저한테는 오래전 일이지만, 여러분들한테는 고작 어제 일일 거에요.”
박율은 설명을 시작했다.
그가 죽었던 순간부터 과거로 돌아가 모든 것을 처음 시작 했던 때를 거쳐 안드라스와 플로우로스를 죽이던 그때까지.
모든 순간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설명했다.
박율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다고 설명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박율이 설명을 마치자 모든 이들의 눈에서 불신이 쏟아졌다.
“그 말을 믿으라고?”
한명련의 옆에 서 있던 작은 사내가 말했다.
이름은 배중탁.
매사에 의심이 많고, 심심하면 딴지를 거는 어린 녀석이었다.
꼬인 성격 탓에 박율과 마찰이 잦기도 했지만, 뭐, 그 성격 덕에 아직까지 별 문제없이 살아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와 함께 박율과 거리를 두고 있던 사람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경계를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달려들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아니, 이미 뒤쪽에서는 벌써 박율을 포박하기 위해 돌아가는 이들도 보였다.
“...믿기 힘들겠지만, 진짜예요.”
누구도 답을 하지 않았다.
개중에 그나마 박율을 믿는 박석훈이 한 발자국 걸어나왔다.
“저도 믿기는 힘들지만, 율 씨 맞아요.”
“나도 믿기는 힘들었지만, 박 율 맞는거 같아.”
함께 있던 서희가 가세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배중탁이 딴지를 걸었다.
“너 뒤질래?”
서희는 배중탁의 딴지에 버럭 화를 냈다.
배중탁은 흠칫 어깨를 떨었지만, 아닌 척 고개를 돌렸다.
“10년을 넘게 함께했던 분이에요. 모를 수가 없죠.”
“10년 동안 저놈이 저런 거 본 적 있어?”
“그게...”
“봐봐! 없잖아!”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아요...!”
“너, 우리가 거짓말이라도 친다는 거야? 진짜 나한테 뒤지고 싶냐?”
“그리고 그 말이 맞다쳐도 악마를 흡수했다는 건 이제 저놈도 마인이라는 거 아니야!?”
배중탁의 날카로운 시선이 박율에게로 던져졌다.
박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평소에도 그렇게 깐족대던 놈이 아주 활개를 치는구나.
근데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악마들의 언어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마기를 사용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거봐!”
배중탁을 따라 관중들의 경계가 더욱 거세졌다.
이대로 가면 완전 마인으로 찍혀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율이 기세를 꺾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꼽냐?”
“저것 봐! 이제는 도발까지 한다!!!”
“율 씨...! 뭐하는 거에요...!”
박율의 반응에 박석훈은 답답하다는 듯 그를 말렸다.
“안 믿는데 어떡해요.”
“아니, 그럼 설득을 시켜야지. 그렇다고...”
“저것 봐! 악마 맞다니까!”
박율은 딱히 반박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빠져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쓸데없이 기세등등한 저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다.
“만약 그렇다쳐도 난 악마를 싫어해. 아니 혐오하지. 다들 저 아시잖아요. 그렇게 개처럼 굴러다녔는데, 설마 악마가 될까? 죽은 이유도 악마가 싫어서였는데.”
그렇지만 더 이상 사람들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박율을 악마로 기정사실화하여 달려들 준비를 하는 모양세였다.
아주 잠시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누가 먼저 달려들지 서로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탁!
와중에 한명련의 검이 칼집을 찾아 들어갔다.
배중탁과 다른 이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양 미소를 지었다.
“뭐하는 거에요!? 저걸 믿는다고!?”
“말하는 내내 목소리 톤이 일정했고, 눈동자가 진실을 말하더군요.”
한명련은 여전히 박율을 응시하며 말했다.
평소에는 저 무섭도록 날카로운 감각이 소름이 끼치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저 감각을 믿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의 감각은 박율의 편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보통 목소리 톤과 눈이 떨리거든요. 하지만 율 씨는 아니었어요. 거짓말을 하는 모습이 아니었죠.”
“아니, 그래도...!”
“돌아오셔서 반갑습니다. 율 씨. 뭐 저한테는 고작 하루지만요.”
한명련은 배중탁의 만류에도 천천히 걸어가 박율에게 손을 내밀었다.
박율은 그의 손을 잡았다.
누가 들어도 믿기 힘든 이야기를 어떻게 저리 쉽게 믿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름의 융통성이 그가 가진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하루 만에 만난 분에게 오랜만이라는 말을 들으니 괜히 낯 간지럽네요.”
“어우, 저는 너무 반가워서 뽀뽀라도 하고 싶은데요?”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그땐 정말로 벨지도 모르거든요.”
“살벌하네요.”
하하호호 떠드는 대화 속에 사뭇 살기가 어려있었다.
박율은 허허 웃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보았다.
여전히 경계심이 느껴졌지만, 한명련의 행보로 대부분 마음을 놓은 듯했다.
그만큼 그의 감각이 날카롭기도 했다.
그제서야 보이는 익숙한 이들의 얼굴.
얼마 전까지 보았던 이들의 얼굴은 대부분 사라진 후였다.
반가움과 서글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박율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난 아직 못 믿어.”
“그러던가.”
배중탁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박율은 그를 무시하고 옆에 있던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옆에 있는 분들은 누구십니까?”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옮긴 한명련이 물었다.
“과거에서 같이 온 분이에요.”
“같이? 그럼 원래는 과거에 사시는 분이라는 겁니까?”
“그렇긴한데, 그때도 평범하진 않았어요.”
“오호.”
마르가리타는 쏟아지는 시선에 쑥스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흘겼다.
“아이들은...?”
“오는 길에 만났는데 둘만 남아있더라고요...”
이상의 말을 잇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충 이정도만 말해도 충분히 그 의미는 전해졌다.
그러한 세계였고, 그러한 현실이었다.
한명련은 입을 꾹 닫으며 씁쓸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군요.”
박율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뒤에 있던 아이들을 향했다.
그리고 동생, 수화의 품에는 데판이 갸르릉 소리를 내며 안겨 있었다.
그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박율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저 고양이는 이분의 소환물이에요.”
“인형을 다루시나 보군요.”
“뭐 그런거죠.”
박율의 말에 데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째릿 눈빛을 보냈지만, 박율은 애써 무시했다.
굳이 그의 정체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괜히 설명을 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그걸 아는 지 데판 역시 짜증 섞인 눈빛만 보낼 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뭐 귀찮으니까 말을 걸지 말라는 것 같기도 했다.
“잠깐...”
아이들을 잠시간 보던 한명련이 무언가 번뜩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
“혹시 너희들 아버지를 찾고 있진 않니?”
“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구석 한켠에 외로이 앉아있는 한 남자를 향했다.
“이석진 씨?”
한명련의 부름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듯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다.
메마른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속을 텁텁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남자의 시선은 한명령과 박율을 향했다.
이어 그의 시선이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썩은 동태 같은 눈에 파도가 치듯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메마른 호숫가에 빗물이 떨어지듯, 차갑게 굳어있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남자가 움직인다.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마냥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남자는 겨우 중심을 되찾고 달려왔다.
“아빠!!!”
“아빠!!!”
옆에서는 아이들의 비명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터졌다.
수화는 품에 있던 데판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두 아이와 남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수화야...!!! 진화야...!!!”
서로를 얼싸안은 남자가 울음을 터트렸고, 아이들이 그 눈물에 화답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남자는 두 아이를 품에 끌어안은 채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난 너희를 잃은 줄만 알고...”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숨이 멎은 듯 입을 닫았다.
“아빠가...아빠가 죽은 줄 알았어...”
“내가 너희를 놔두고 어떻게 죽어...!”
“왜 우리 버리고 사라졌어...”
눈물범벅이 된 수화는 고사리같은 손으로 남자를 때렸다.
남자는 달싹거리는 입을 가만두지 못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버린 거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너희를 버려...!”
“그치만...그치만...”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너무...”
서로를 얼싸안은 아이들과 남자는 한참을 울었다.
희망이라는 것은 한 여름밤의 꿈이라고 치부되던 세상에, 모든 것이 메마른 삭막한 사막같은 세상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물방울은 하나의 바다가 되어 범람했다.
울음소리를 닮은 파도 소리에 모두가 눈물을 흘겼다.
숲속이 전부 울음소리로 채워진다.
박율은 멍한 얼굴로 한명련을 보았다.
“이게 대체...”
“율 씨한테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 심한 부상을 입은 채 도시 한복판에 쓰러져 있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랬었나? 대충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하고...”
“겨우 치료를 하고는 아이들을 찾아야 한다며 난동을 피우기도 하셨죠.”
“아...!”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아이들을 찾아야 한다며 성치도 않은 몸으로 캠프에서 나가려고 했던 남자였다.
하지만 누구라 한들 혼자 도시 밖으로 내보낼 수 없기에, 탐험대와 함께 도시로 나가 아이들을 찾아보긴 했지만, 번번히 실패를 하고 결국은 좌절에 빠져 있었던 남자였다.
“운이 좋았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한명련은 흐뭇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쳇.]
옆에는 수화에게 버려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데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