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잔류하는 마기가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이제는 흔적만이 남아있는 자리였지만, 데판은 못내 씁쓸한 눈빛을 지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가 신경을 쓸 일은 아니었다.
그가 몸을 담구었던 마계도 아니었고, 엄밀히 따지면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헌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어쩔 수가 없었다.
데판은 혀끝에서 느껴지는 쓴맛을 느끼며 먼저 자리를 뜬 이들을 따라 포탈로 발을 옮겼다.
박율 말없이 역시 그를 따라 움직였다.
수풀 속 포탈로 들어가자 새하얀 불꽃으로 가득한 경계가 나타나며 이윽고 새로운 장소가 나타났다.
제2 공영 주차장.
겉보기에 그리 특별한 장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도대체 무슨 장소인가 싶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새하얀 풍경에 있는 거라곤 가운데 작은 문 하나.
그리고 그 옆엔 한명련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늦으셨네요.”
“아, 뭘 좀 확인한다는 게.”
“다들 다음 캠프로 넘어갔습니다.”
“그럼 저희도 빨리 넘어가죠.”
한명련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다.
그리고는 문손잡이를 잡고는 힘을 불어넣었다.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나오는 새하얀 불꽃이 문으로 번졌다.
새하얀 문은 잠시 화하고 타오르더니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명련은 문을 열었다.
그 너머로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
이것이 제2 공영 주차장이었다.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포탈의 목적지를 조정하는 문, 포탈을 사용하는 사자들의 능력들을 십분 활용하여 만든 최대 걸작품이었다.
“가시죠.”
한명련은 안쪽으로 들어가라는 듯 손바닥을 내보였다.
박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데판과 함께 포탈을 넘어갔다.
포탈을 넘어서자 보이는 풍경은 다름 아닌 반쯤 허물어진 백화점이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있는 캠프들은 대부분 이러했다.
물자나 자원이 어느정도 있는 마트나 백화점이 대부분이었고, 그것마저도 악마들의 습격으로 반쯤은 폐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악마에게 이미 당해 폐허가 되었다는 점이나 악마들의 시선에서 떨어진 위치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먼저 와 있던 이들은 이미 각자 쉴 장소를 찾아 들어가 있던 와중이었고, 두 사람의 앞에는 배중탁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박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그는 영화 속 범죄자를 소탕하는 검사가 되어 예리한 눈길을 한 채 물었다.
“이상한 짓 같은 거 하고 온 거 아니야? 가령 악마들한테 신호를 보냈다던가...”
하지만 박율의 시선은 그의 질문을 무시하곤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마르가리타를 향했다.
돌아온 박율을 본 마르가리타는 손을 살짝 들며 그를 반겼다.
『왔어?』
“기다리고 계셨나 봐요?”
『뭐 한다고 이렇게 늦었데.』
“뭘 좀 확인할 게 있어서요.”
“얌마! 난 안 보이냐!”
배중탁의 소리가 귀를 스쳤지만, 박율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석훈 씨랑 서희 씨는 쉬고 있어요?”
『부상 때문에 안쪽에 뉘었어.』
“누나도 조금 쉬고 있어요. 정신도 없을 텐데.”
마르가리타는 잠시 박율을 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전에.』
그녀의 표정은 비장했다.
결국엔 마주해야 할 거대한 산을 목전에 둔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어?』
결연한 그 말에 그녀의 감정이 서려있었다.
천사라는 직급에 맞는, 혹은 아이들의 죽음을 넋 놓고 보아야 하는 이의 안타까움과 슬픔이 한데 섞인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박율은 잠시 입을 꾹 닫은 채 그녀를 보더니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차피 언젠가는 말해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이 세계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하게 됐는지 말이야.』
* * *
이곳의 역사는 박율이 다녀간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악마들이 인간계를 습격했고, 인간들은 사자가 되어 악마들에 맞섰다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개변된 역사와는 다르게 이곳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등장한 안드라스와 플라루로스에 의해 한국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서울과 인천을 점령당했고, 그것으로 인간들은 패배했다.
처음으로 맞이한 패배.
허나 참혹의 시간 속에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반격했고, 악마들에 맞섰다.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악마들에 맞서며, 떨어진 꽃잎이 다시 꽃이 되고, 다시 바닥의 양분이 되던 때에 인간은 결국 두 악마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인간이 처음으로 쟁취한 승리였다.
그것을 기점으로 악마들을 목도한 인간들은 악마들을 대적하기 위해 사자들을 양성했고, 영웅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 사자에 대해 영웅심리를 드높이는 전략으로 경쟁심 역시 꾀했다.
사자는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를 잡았고, 간간히 나타나는 악마들을 사냥하며 인간은 승리를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한 건 인간들의 시스템과 체계는 이상적이었고,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그 시기 등장한 바알.
마계의 왕이자 모든 최종국면의 끝에 서 있는 악마.
그의 등장으로 모든 국면이 뒤집혔다.
체계화된 시스템과 사자들의 힘만으로는 그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했고, 인간은 또 다시 패배를 맞이했다.
그래도 완전한 패배는 아니었다.
충분히 악마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바알의 군단장들의 절반 이상이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하지만 가장 큰 사건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강진호의 배신.
바알의 악마들에게 대대적인 공습을 준비하던 때, 인류 최강의 사자라 불리던 남자의 변심은 너무나도 극심히 피해를 낳았다.
결정적인 순간 강진호의 칼날은 아군을 향했고, 그 결과 무수히도 많은 사자들이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강진호는 자신만의 신념을 내세웠다.
아니 여전히도 그는 자신만의 신념을 관철하며 일전에 보았던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 *
“...그렇게 된 거에요.”
박율은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끝맺었다.
그의 말을 들은 마르가리타의 표정은 오묘했다.
아니, 오묘하다기보단 텁텁한 과일을 씹기라도 한 듯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참는 듯 보였다.
데판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다른 역사라곤 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세상과 괴리된 곳은 아니었기 때문일까.
두 사람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 이후로 이렇게 도망치는 신세가 된 거고.”
덤덤하게 내뱉는 박율의 말은 무심했기에 너무나 참혹했다.
인간성을 잃은 세상에 합당한 목소리였다.
그들은 한참 동안 입을 꾹 닫은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끔찍하군.]
데판이 던진 한마디는 적막하게 내리깔린 세상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듯 짙게 흩어졌다.
그리고 나지막이 내뱉은 그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했다.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잔잔하다고 정의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파도가 치지 않아 잔잔하다고 그 바다가 잔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신이 없다고...』
신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그 감정이 정적을 타고 마르가리타의 심장을 두드렸다.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눈앞에 둔 이들의 모습이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세 사람의 숨소리가 끝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데? 왜 니들끼리만 속닥거려? 또 무슨 작당 모의를 하는 거야!?”
아 물론 짙은 정적에 빠진 건 세 사람뿐이었다.
옆에서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사태를 관망하는 배중탁은 제외였다.
“뭔데?”
가끔 그의 말을 받아쳐주던 마르가리타 역시 이번에는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배중탁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박율을 보았다.
볕이 들지 않는 구석에 그녀가 서 있기 때문일까.
박율은 어둠 속에 잠겨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두 눈만은 어두운 새벽의 만월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박율은 그 질문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데판을 보았다.
박율의 시선을 의식한 데판이 새침하게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마계로 갈 생각이에요.”
『마계?』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에 단탈리온이 그랬어요. 자신을 찾아오라고. 그건 우리를 이곳으로 보낸 데에 이유가 있다는 소리일 거에요.”
데판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박율은 여전히 주머니에 남아있던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단탈리온은 으레 이유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모든 행동엔 그에 합당한 뜻을 두고 있었다.
심지어 차를 마시는 행위조차 그 뜻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모든 것이 그의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과거에서나 지금에서나 그는 한결같았다.
백지의 세계에 빠지던 때에 그가 건넨 양피지가 힘을 발휘한 것을 보면 그랬다.
그리고 그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만났던 단탈리온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나긴 여행 끝에 다시 자신을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그 순간이 지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데판이 꼬리를 살랑이며 다리를 세우고 일어났다.
[나도 찬성이다. 내가 알 바는 아니다만, 이곳의 마계는 어찌 되었을지 궁금하군.]
그리고 발을 돌려 건물 밖이 보이는 테라스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왜 이곳에 영역을 지키고 있어야 할 녀석이 인형이 되어 있는지도 말이야.]
그가 내뱉는 말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박율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가리타 역시 비슷한 얼굴이었으나 그녀의 시선은 다시 박율에게로 옮겨졌다.
『그래서 어떻게 이동할 생각이야?』
그녀의 질문에 박율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마계가 한둘도 아니고 말이야.』
마르가리타도 아는 바로 마계는 무수히 많았다.
마왕이 지배하는 마계부터 그저 마수들이 살아가는 마계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마계까지.
아무리 많은 심연이 열린다한들 그중 단탈리온의 마계를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차라리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게 수십 배는 더 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맞아요. 지상에 벌어진 수백 아니, 수천개가 넘는 심연들 사이에서 단탈리온의 마계로 넘어가는 심연을 찾는 게 불가능한 건 맞아요.”
박율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마르가리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데? 마계? 단탈리온? 진짜 너네 악마들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배중탁의 표정이 사뭇 어두워졌다.
쓸데없는 상상력이 그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좀 닥쳐봐.”
박율은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그 위치를 찾아줄 사람이 있어요.”
데판은 아는 눈치였다.
그리고 함께 두 사람의 시선이 건물 안쪽을 향했다.
“서희 씨가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