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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사자 망치를 들다-141화 (141/183)

141화

“...헌데 굳이 그 여인까지 보낼 이유가 있었나?”

타악.

새하얀 공간, 여백의 세계에 체스의 말이 내려앉는 소리가 울린다.

작은 소리가 만들어내는 공명은 여백을 가득 메웠다.

노인은 체스판을 뚫어져라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그녀 역시 마주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단탈리온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타악.

그의 손을 따라 체스의 말이 또 다시 내려앉았다.

“...”

노인은 팔짱을 끼며 관자놀이에 손을 얹었다.

[최후를 위해.]

타악.

고심 끝에 노인은 말을 놓았다.

타악.

단탈리온은 노인이 차례를 끝내기 무섭게 말을 놓았다.

“저 이 씨...”

[...아주 먼 옛날,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미물이 나타난 적이 있었죠.]

* * *

이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오래된 이야기.

* * *

찰싹!

기다란 채찍이 가려한 살결을 몹시 때리는 소리가 좁은 통로를 타고 성내를 울렸다.

찰싹!

채찍을 따라 보드라운 살결에 희미한 상처가 새겨진다.

찰싹!

그럼에도 여인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프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꽉 깨문 채 참혹의 시간을 견뎠다.

여인의 몸뚱이는 어느새 새하얀 여백보다 더 많은 붉으스름한 자국들로 가득했다.

날카로운 채찍질을 서슴없이 휘두르던 남작은 따스한 손길로 여인의 턱을 들었다.

“...아직도 나의 아내가 될 생각은 없느냐?”

여인은 떨었다.

참혹의 시간 중 가장 힘든 시간은 바로 채찍질이 멈추던 때였다.

아주 잠시나마 고통에서 해방되는 그 시간.

여인에게 자유라는 기회가 주어지는 그 시간.

그렇기에 여인은 흔들렸다.

겨울바람에 잎사귀를 흔드는 매화처럼 가녀린 몸을 따라 떨림이 이어졌다.

그 떨림은 너무나 유려해서 보는 이에게 그 고통을 선사할 정도였다.

허나 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찾아올 고통을 견디기 위해 숨을 골랐다.

궁전에는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아픔이 뒤섞여, 검붉은 핏방울이 떨어지는, 슬픔은 그저 사치일 뿐인 숨소리만이 궁전을 가득 채웠다.

“참으로 단단한 아이로구나.”

“...”

남작은 다시 채찍을 들었다.

“그 단단함을 깨는 것마저 나에게는 유흥이구나.”

찰싹!

“그 단단함이 언제까지 가는지 시험해보겠네.”

찰싹!

“마르가리타.”

* * *

아팠다.

박동에 맞춰 울리는 고통을 참으면 그것은 눈물이 되어 얼굴을 적셨고, 눈물을 흘리면 그것은 현실이 되어 그녀의 숨을 옥죄었다.

은빛 족쇄에 묶인 두 발은 그녀에게서 자유라는 것을 앗아갔다.

천정에 자그마하게 난 창은 그녀와 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달...”

반월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마르가리타는 손을 뻗었다.

달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창에서 쏟아지는 하늘이라는 것에 닿고 싶었다.

허나 기껏해야 시선 끝에 걸리는 그녀의 팔은 그곳에 닿을 수 없었다.

그녀는 팔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양 무릎을 감싸 온몸을 웅크렸다.

추위는 버틸 수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유린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고통도 버틸 수 있었다.

슬픔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잘못된 신을 섬겼다는 이유로, 사랑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모든 것을 버텨야 하는 현실은 버틸 수 없었다.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스스로를 믿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잘못된 신을 섬기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싶었다.

하늘을 보며 아득한 존재를 그린다.

허나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저는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그저 흩날리는 먼지가 되어 창틀에 묻혔다.

마르가리타는 다시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쩌적!

문득 저편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스치자 눈물에 젖은 안면이 시렸다.

하지만 냉기를 느끼기도 전에 그녀의 눈은 구석에 숨어있는 정체모를 동물을 보고 있었기에 그녀는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

팔뚝 만한 크기에 제 몸뚱이만한 날개를 가진 이상한 동물이었다.

흡사 그것은 용이었다.

아주 작은 새끼용.

그것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마치 신비한 무언가를 발견한 듯 호기심 어린 얼굴이었다.

마르가리타 역시 같은 표정으로 새끼용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놀란다는 감정을 표출하기에 그녀는 너무나 미약했다.

저 동물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역시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한참동안 새끼용을 보던 마르가리타는 무릎을 감싸고 있던 손을 뻗었다.

[쿠앙!]

그녀의 움직임에 새끼용은 작달만한 불을 내뿜으며 그녀를 위협했다.

하지만 그것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따스함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열기였다.

마르가리타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너도 혼자야?”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성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처참하게 무너진 목소리였다.

[쿠앙!]

새끼용의 경계에 마르가리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을 가져갔다.

미소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련했고, 슬픔이라 하기엔 너무나 따스한 무언가였다.

마르가리타는 다시 공벌레처럼 온몸을 웅크려 실낱같은 온기를 지켰다.

꼬르륵 하며 갈비가 훤히 보이는 뱃가죽에서 소리가 울렸다.

바로 옆에 주먹만한 감자가 있었지만, 그녀는 먹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기도 했고,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방법이기도 했다.

죽음.

그녀는 지옥 같은 감옥에서 죽음을 준비 중이었다.

“...”

꼬르륵.

이번엔 마르가리타에게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흘깃 고개를 돌렸다.

새끼용에게서 난 소리인 듯했다.

마르가리타는 아주 잠시 그것을 보더니 옆에 있던 감자를 건넸다.

새끼용은 여전히도 한껏 경계를 하며 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차였다.

마르가리타는 새끼용이 경계를 풀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감자를 그것의 앞에 던지듯 떨어뜨렸다.

“...너 먹어. 난 안 먹을 거야.”

[쿠앙!]

새끼용은 그것을 공격으로 받아들인 건지 주먹 만한 날개를 펼쳐 위협을 했다.

하지만 이미 죽음 같은 고통 속에서 죽음을 각오한 그녀에게 위협은 아무런 위해가 되지 않았다.

“먹어.”

새끼용은 마르가리타에게서 딱히 살기라던지 위협을 느끼지 못한 듯 이내 날개를 접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감자로 시선을 옮겼다.

기다란 부리같은 입이 툭 하며 감자를 건드린다.

새끼용의 일격에 감자의 형태가 일그러졌다.

감자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새끼용은 감자와 마르가리타를 번갈아보더니 이내 감자로 입을 가져갔다.

[쿠앙?]

와구와구 감자를 물어뜯는 소리가 들렸다.

침에 뒤섞여 축축해졌고, 이내 텁텁하게 감자를 먹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흘깃 돌려 새끼용을 보았다.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허겁지겁 감자를 먹고 있었다.

탁!

어느새 감자를 해치운 새끼용은 감자 부스러기가 남아있는 바닥에 아구를 들이밀었다.

여전히도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새끼용은 조심스레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젠 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해.”

[쿠앙!]

새끼용은 날개를 펴며 불만 섞인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인지 조용히 날개를 접었다.

그리곤 마르가리타를 따라 짧은 두 다리를 모아 날개로 온몸을 덮었다.

“나 따라하는 거야...?”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새끼용을 보았다.

새끼용은 그녀를 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르가리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얼른 나가. 여기 있다간 너도 다칠 거야.”

[쿠앙?]

“난 너를 지켜줄 힘이 없어.”

새끼용은 갸우뚱하며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그녀는 가녀린 손가락으로 창을 가리켰다.

아주 작은 조각 같은 하늘을 볼 수 있는 창을.

“너는 나갈 수 있을 거야.”

새끼용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옮기더니 가볍게 폴짝 뛰어 창에 올라탔다.

“가.”

마르가리타는 말했다.

새끼용은 그녀를 잠시나마 보더니 이내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사라졌다.

마르가리타는 다시 혼자가 된 것을 느끼며 온몸을 웅크렸다.

다음날이 되었다.

역시나 남작은 채찍을 들었고, 마르가리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찰싹!

찰싹!

경쾌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몸의 감각마저 앗아갔다.

마르가리타는 울었다.

허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눈물마저 흘린다면 모든 게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태양이 하늘 저편에서 작은 창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루 중 유일하게 태양이 그녀를 가두는 창을 지나 그녀를 감싸는 시간.

마르가리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온기를 느꼈다.

또 다시 시간이 흐른다.

벌써 닷새를 넘게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눈 앞이 아득하고, 목을 틀어막은 텁텁함에 숨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여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죽는다는 것을.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털썩.

그녀의 몸이 중력에 못 이겨 옆으로 쓰러졌다.

갈증이 느껴졌다.

그 갈증은 수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영양분이 필요한 갈증도 아니었다.

그저.

생(生)에 대한 갈증이었다.

또 다시 볕이 들었다.

차가운 땅바닥과 다르게 따스함이 그녀의 몸을 훑었다.

바람불면 찢어질 듯한 옷가지 사이로 온기가 스며든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녀는 눈을 감았다.

평온함에 몸을 맡긴다.

[...쿠앙?]

익숙한 울음소리였다.

마르가리타는 이제는 벌어지지도 않는 눈꺼풀을 아주 가늘게 열었다.

태양은 이미 그녀를 지나친 이후였다.

그녀의 눈 앞에 네모난 창을 따라 빛이 선연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작은 동물이 서 있었다.

[쿠앙!]

자그마한 감자를 입에 물고서 말이다.

“너는...”

[쿠앙!]

새끼용은 부리같은 주둥이로 감자를 툭 밀었다.

“꿈이...아니었구나...”

마르가리타의 가녀린 손이 새끼용을 향해 다가갔다.

새끼용은 흠칫 경계를 하는 듯 뒤로 물러났지만, 이내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왜...돌아왔어...”

갈라진 목소리도 이제는 나오질 않았다.

모래를 한 움쿰 입에 집어넣은 듯 쉰소리가 흘러나왔다.

새끼용은 더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새끼용에 닿는다.

거친 비늘이 손에 딱딱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거친 비늘은 부드러운 털이되어 그녀의 손을 보드랍게 감쌌다.

[쿠앙!]

새끼용은 온몸을 비비며 애정을 표했다.

“미안해...나는...이제...”

죽을거야.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제...

마르가리타의 온몸이 떨려왔다.

그 떨림은 손을 타고 새끼용에까지 전해졌다.

손의 냉기를 느끼던 새끼용은 잠시 그녀를 보더니 아구를 벌렸다.

그리고 입에서 작달만한 불씨를 뱉었다.

“하...”

따스했다.

냉기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따스했다.

태양의 온기보다 더더욱 따스했다.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려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고마...워...”

[쿠앙!]

마르가리타의 미소에 새끼용은 뿌듯한 듯 날개를 펼쳤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

그녀의 손이 새끼용의 윤곽을 따라 내려갔다.

그것의 허리춤에 검은 액체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상처...”

상처였다.

새끼용은 그녀의 상태를 살피더니 얼른 감자를 물어와 그녀의 앞에 놔두었다.

“이것 때문이야...?”

툭.

그녀의 짙은 눈동자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감자에 스며들었다.

너무나도 작은 그녀의 몸뚱이가 떨렸다.

아팠다.

그 고통은 채찍질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참아도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

여인은 울었다.

처음으로 무너졌다.

매일을 채찍에 맞아가며 버텨온 세월보다 무거운 아픔에 그녀는 무너졌다.

그리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감자를 입에 넣었다.

텁텁했다.

차가웠고.

목이 메였다.

“고마워...”

너무...

“고마워.”

그것이 마르가리타와 새끼용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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