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박율은 빠르게 권능을 개방했다.
발바닥에서 시작되어 장딴지를 거쳐 허벅지의 대퇴이두까지 기어오르는 새하얀 불꽃이 그의 다리를 감싼다.
땅을 내디딘 그의 다리에서 솟구치는 힘이 폭발하려고 했다.
허나 바르바토스의 총신 끝에 붙어있던 총탄은 이미 꼬리를 그리며 나선으로 공기를 꿰뚫는 중이었다.
이미 늦었다.
[...죽어라.]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그리고 이를 딱딱 부딪히는 회색 빛의 탄두가 박율을 향해 치닫는 순간이었다.
팍!
그의 앞으로 커다란 덩치의 악마 하나가 달려들었다.
총탄이 악마의 복부를 파고든다.
박율은 미처 권능을 모두 개방하지 못하고 자리에 굳었다.
그의 앞엔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데판이 총탄을 막은 채 서 있었다.
후두둑!
커다란 그의 등판 아래로 핏물이 쏟아졌다.
폭포수마냥 떨어지는 검은 핏물이 바닥에 고인다.
“...!!!”
총탄이 날카로운 이를 까득까득 움직였다.
아구를 벌릴 때마다 데판의 복부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다.
허나 그는 아무런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저 굳건하게 서 있었다.
“데ㅍ...”
[빨리 끝내라!!!]
데판이 소리쳤다.
잠시 벙찐 얼굴로 있던 박율은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
[뭐하고 있느냐!!!]
데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박율은 바르바토스를 보았다.
그 사이 그는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이미 일그러진 온몸은 완벽하게 수복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의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만으로 까득거리는 이를 부딪히는 회색 빛의 총탄을 준비했다.
데판의 말처럼 얼른 끝을 내야 했다.
쓸데없는 연민에 시간을 빼앗기면 그만큼 위험도가 짙어지기 마련이다.
박율은 마음을 다잡았다.
흠칫 데판을 보던 박율은 망치를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조금만 버텨요.”
그리고 다시 발을 뗀다.
이미 힘을 상당히 소진한 터라 제대로 힘이 나오지는 않았다만, 지금 바르바토스의 상태를 봐선 이 정도라도 충분하다.
탕!!!
바르바토스의 엽총에서 총성이 울린다.
그것은 역시나 박율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지금의 박율은 움직이는 피사체.
이미 초주검 상태인 바르바토스의 사격이 그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신속]
총탄이 박율을 스쳐 지나가고, 박율은 곧바로 그에게로 치달았다.
탕!!!
이어 날아오는 총탄.
그것은 아슬아슬하게 박율의 귀를 스친다.
스쳐지나간 궤적을 따라 귀에서 작은 핏물이 뚝 하고 떨어진다.
그리고 핏방울이 바닥에 닿으며.
박율의 망치가 커다란 호를 그리며 몸이 반쯤 남아있던 바르바토스의 몸뚱이를 후려친다.
콰앙!!!
망치에 얻어맞은 그의 몸뚱이가 다시 날아간다.
온몸에 전기가 인 듯 찌릿한 통증이 울렸다.
하지만 박율은 다시 땅에 발을 디뎠다.
[신속]
다리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지만, 박율은 개의치 않았다.
날아가는 바르바토스를 따라잡은 박율은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또 다시 망치를 휘두른다.
콰앙!!!
망치를 따라 바르바토스의 몸뚱이가 활처럼 휘었다.
그의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드는 망치는 이내 그를 반대편으로 내려찍었다.
콰앙!!!
바닥에 처박히는 바르바토스.
박율은 다시 그에게로 달려간다.
두 다리의 감각이 흐려진다.
[신속]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뜨거운 김이 온몸에서 아지랑이를 피웠다.
허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율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찌르는 격통을 꾹 참은 채 바닥에 튕겨 오르는 바르바토스를 붙잡았다.
와중에도 바르바토스는 떨리는 손을 들어 박율의 머리를 겨냥했다.
탕!!!
총성은 울리지만, 그것은 박율의 머리를 꿰뚫지 못했다.
박율은 초인적인 속도로 총을 피했다.
“하아...”
지평선을 가로지를 듯 비대해진 망치를 쥔 박율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그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하나의 파동을 만들며.
그 떨림은 삼두와 이두, 그리고 전완근을 거쳐 손에 쥔 망치로 집중되었다.
이윽고 그 떨림은 역행하는 파동처럼 하나의 점으로 귀결되어 간다.
솟구치는 힘이 얽힌 하나의 점.
다만 오롯이 팔근육의 수축과 이완, 그리고 권능이 지배하는 힘을 아득히 넘어, 그의 전신이 포효하는 그 힘이 망치에 하나로 집약되는 순간.
박율은 망치를 내려찍었다.
“끝이다...!”
콰앙!!!
망치에서 발생하여 바르바토스를 거쳐 바닥에 작용한 굉음이 폭발했다.
망치를 내려찍은 박율의 귀는 일순간 기능을 상실할 정도였다.
게다가 충돌에서 발생한 폭풍은 파동처럼 번져 땅을 점령하던 흙먼지와 안개들을 순식간에 걷어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새겨진 크레이터와 그 중심에 각혈을 토해내는 박율 뿐이었다.
[카학...!!!]
짧은 단말마와 함께 바르바토스의 몸뚱이는 다시 파괴되었다.
[버러지 같은 것이...감히...!!!]
입과 눈이 흐릿하게 남은 파편이 부들부들 떨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고기 반죽이 된 바르바토스의 파편들은 또 다시 수복을 시작하지만, 박율은 더 이상 바르바토스가 회복하지 못하게 파편들을 걷어 찼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아직 나는...]
꿈틀거리던 파편들은 어떻게든 수복을 하려 움직이지만,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것들은 다시 붙지 못했다.
발악한다.
필사적이었다.
허나 남은 것은 허무(虛無)였다.
[혼자는 갈 수 없다...]
바르바토스의 입이 중얼거렸다.
박율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총구만 남아있던 바르바토스의 손 파편이 박율을 향해 뻗은 채였다.
“...!!!”
박율은 반응하지 못했다.
움직일 힘이 없다고 하는 게 맞을 터였다.
파편에 붙은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긴다.
파사삭.
하지만 바르바토스의 총구에서 총성이 들리는 일은 없었다.
꿈틀거리던 파편들이 결국 힘을 잃고 축 늘어지며 이내 먼지처럼 흩어졌다.
“하...”
비로소 바르바토스가 죽었다.
박율은 더이상 다리를 펴고 서 있을 수가 없어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너무 순식간에 힘을 몰아친 탓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가 서 있는 자리 위로 구름이 걷혀 처음으로 태양이 선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계에 내리쬐는 태양이 박율에게로 떨어졌다.
오로지 그에게만 비단결 같은 태양의 줄기가 닿을 수 있었다.
“이겼다...”
이어 반란군의 함성이 쏟아졌다.
바르바토스의 죽음을 따라 되살아난 마수들이 되찾은 원치 않았던 생을 잃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마수들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승리의 순간이었다.
쿵!
그의 뒤로 고룡이 날갯짓을 멈추고 내려앉았다.
박율은 떨리는 손을 들어 그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박율!!!”
서희의 소리가 들려왔다.
박율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덥썩!
저 멀리에서부터 달려온 그녀는 몸을 던지듯 박율에게 안겨들었다.
“아악! 아파요...!!!”
박율은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그간 쉬지 않고 싸우느라 아픔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픔이 한 번에 밀려왔다.
특히 강진호와의 싸움에서 생겼던 생채기들과 고룡에게서 얻은 부상이 온몸에 통증의 격류를 일으켰다.
하지만 서희는 그의 비명에도 아랑곳않고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죽은 줄 알았잖아!!!”
“제가 죽긴 왜 죽어요....!”
박율은 아프다며 그녀를 밀어내려 하지만, 그녀는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얼마나 걱정을...”
“뭐 걱정을 했어요?”
“...!”
서희는 흠칫 자신이 내뱉은 말에 놀라더니 그제야 자신이 박율을 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부리나케 그에서 떨어졌다.
“아니, 그...그러니까...”
서희는 금세 익은 홍당무가 되었다.
박율은 벙찐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니까 괜한 지랄 좀 그만하라고!”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발로 그를 퍽하고 찼다.
“악! 내 갈비뼈!”
일전에 고룡에게 맞아 부서졌던 늑골에 통증이 울렸다.
『율아!!!』
“율 씨!”
마르가리타와 한명련까지 그에게로 달려왔다.
“아니 왜 때리ㄱ...”
달려온 마르가리타 역시 박율을 덥썩 품에 안았다.
“큽...!”
이번에도 전신에서 고통이 울려퍼졌다.
그래도 서희보다는 약하게 안은 탓에 소리를 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를 고깝게 보는 서희 시선은 제쳐두고.
『고생했어...』
마르가리타는 품에 안은 박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박율은 그녀를 떼어내려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그저 순응했다.
“고생은 무슨...”
마르가리타는 박율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뒤에 있던 고룡을 향했다.
[쿠앙!]
고룡은 덩치에 맞지 않는 울음을 내뱉었다.
그를 보는 마르가리타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수백 년이라는 세월에 굳었던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마르가리타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고룡은 무거운 꼬리를 살랑 흔들어 아주 가볍게 가져갔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한명련까지 박율에게로 걸어갔다.
“...저도 안아야 합니까?”
“아뇨, 제발.”
박율은 단호했다.
한명련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박율의 시선은 반대편을 향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저 멀리에 데판이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데판...!!!”
박율은 그의 상태를 보더니 지친 몸을 이끌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괜찮아요!?”
[...이제야 봐주는군.]
데판이 농담조로 말했다.
그의 상태는 당장 죽을 정도로 위중하지는 않았다만, 충분히 위험한 상태였다.
복부에 박힌 회색 빛의 총탄이 아직까지도 그의 복부를 갉아 먹는 중이었다.
박율은 사색이 되어 총탄을 빼내려 하지만, 그럴수록 총탄은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배에 총알이...!!!”
[아름답군.]
데판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흐르는 핏물과는 달리 그는 너무나도 평화로운 얼굴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엔 검은 구름이 개어, 깔리는 붉은 어스름이 마계에 짙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쿨럭!
데판의 입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데판을 둘러싸고 그를 보는 이들의 눈에 걱정이 서렸다.
“아니, 상태가...!!!”
데판은 고개를 돌려 박율을 보았다.
“빨리 치료를 해야겠습니다!”
한명련이 소리치자, 뒤이어 마르가리타가 다가와 그의 복부에 손을 얹었다.
『조금만 참아...!』
마르가리타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갈무리된 빛이 데판의 복부를 감쌌다.
데판의 시선은 여전히 박율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결정할 시간이 왔다.]
“뭐요...?”
[마계의 주인을 결정해야 한다. 허나 지금 이 몸의 상태를 봐선 나로써는 불가능할 듯 하군.]
데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범하게 말을 내뱉었다.
“예...!?”
[주군께서 말씀하셨다지 않느냐. 새로운 태양이 도래할 것이라고.]
이어 움직이는 데판의 시선은 박율을 내리쬐는 태양을 향했다.
검은 대지에 유일한 빛줄기였다.
[주군께서는 너를 택하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