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피 웅덩이 위에서 데판은 하늘 저편을 응시했다.
하늘을 뒤덮던 검은 구름이 순풍을 따라 걷히고 있었다.
선연히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검은 대지와 섞여 청록색 어스름을 만들어냈다.
박율은 데판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다. 주군께서는 너를 이곳의 왕으로 점지하신 것이다.]
박율은 그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죽어가는 데판을 살릴 방법을 찾았다.
마르가리타가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의 복부를 수복하려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죽었음에도 그의 복부에 박힌 탄알의 움직임은 멎지 않았다.
대상을 죽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그렇다고 빼내려 하면 더 깊숙이 파고들어 어쩔 방도가 없었다.
“도려냅시다.”
한명련이 첨예한 검을 높이 들고 말했다.
탄환을 빼낼 수 없다면 탄환이 박힌 부위 자체를 도려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탄환이 박힌 부위를 도려내기엔 너무 깊숙이 파고든 것이다.
데판을 둘러싼 이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거야...?”
서희의 물음에 답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르가리타가 어떻게든 처치를 하고 있는 덕에 진행 속도는 늦출 수 있었지만, 결국은 시간문제였다.
데판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던 차였다.
마르가리타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버텨봐!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됐다.]
하지만 데판은 마르가리타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녀의 손이 데판의 배에서 떨어지자 복부를 갉아먹는 탄환의 속도가 빨라졌다.
마르가리타는 다급하게 다시 그의 배에 손을 가져가지만, 역시나 데판은 거부했다.
[그렇게까지 처절하고 싶진 않군.]
콰득!
검은 피가 그칠 새를 모르고 쏟아진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자책을 한다한들 변하는 것은 없다.
[기사님!!! 드디어 승리를...]
반란군들 마저 데판에게로 모이고 있었다.
축포를 불며 환성을 지르던 그들은 데판의 상태를 보곤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들은 화들짝 놀라 데판에게로 몰려들었다.
[...기사님!!!]
[이게 무슨...!!!]
그들은 자신의 피웅덩이에 빠져 죽음을 기다리는 데판을 보며 떨리는 소리를 뱉었다.
[시끄럽다.]
데판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뱉었다.
허나 사방에서 울리는 데판을 부르짖는 목소리.
울부짖으며 떨리는 수십 개의 목소리가 얽히고설켜 너울을 만든다.
너울은 이윽고 전장을 곡소리로 가득하게 만드려 했다.
[모두 그만.]
데판이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납게 울렁이던 너울이 그의 한마디에 잔잔하게 내려앉았다.
모두가 그에게 집중했다.
[...이로써 두 번째로군.]
박율은 입을 꾹 닫은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두 번째 죽음.
데판은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후련한 듯 웃음을 흘겼다.
[두 번째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천천히 올라가는 그의 손은 검은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드러난 석양이 짙게 깔려 붉어진 하늘을 향했다.
[이리도 아름다운 풍이 눈앞에 있으니 말이야.]
너무나도 오랜만에 마주하는 완연한 하늘이었다.
털썩 늘어지는 데판의 팔엔 더이상 힘이 없었다.
“...그만 말해.”
데판은 아주 조금의 움직임으로 박율을 보았다.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군.]
“...”
[네가 나타나고 지금에 이르는 그 모든 순간들은.]
심연까지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무거웠다.
허나 새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은 그저 평온에 잠겨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부탁한다. 박율.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다만.]
그의 시선엔 오롯이 신뢰뿐이었다.
그리고 생사를 넘나든 동료에 대한 절대적인 전우애였다.
모두가 침음성을 뱉었다.
쉭쉭 대는 숨소리, 낮게 울어대는 소리도 짙게 내려앉은 적막을 깨지 못했다.
데판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
그의 온기가 흩어진다.
움직임마저 사라진다.
찾아온 죽음이라는 너울에 데판은 그저 몸을 맡겼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터벅.
[...그리된 것이구나.]
하나의 목소리.
늙은 이의 처절한 목소리이자, 젊은이의 파란이 담긴 목소리.
터벅.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그 나지막한 소리를 듣지 못한 모두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터벅.
[찰나를 위한 억겁의 업이었구나.]
이곳은 전장.
전사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너무나도 완벽한 무대이지 않을 수 없었다.
터벅.
비로소 박율은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샌 머리가 돋보이는 낯선 이가 지팡이에 의지해 한쪽 다리를 절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의 존재를 알아챈 이는 오로지 박율 뿐이었다.
“당신은...”
낯선 이였으나 낯설지 않았다.
처음 마계에 발을 들였을 때 보았던 노인이었다.
그는 박율과 데판 앞에 멈춰 섰다.
[멋진 마무리구나. 아이야.]
그제서야 모든 이의 시선이 낯선 이를 향했다.
낯선 이는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찍었다.
쿵!
적막이 깨진다.
쿵!
고작 지팡이.
그것에 의해 땅이 흔들렸다.
쿵!
낯선이의 피부가 갈라졌다.
수십 가닥으로 나뉜 주름 사이에 금이 벌어진다.
쿵!
낯선이의 피부가 깨진 유리창처럼 부서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조각들은 피 웅덩이에 잠긴다.
그리고 쿵!
마지막으로 그가 지팡이를 찍었을 때, 그는 그제야 제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그에게 경외했다.
탄사조차 흘리지 못했다.
그것만이 그를 경외하는 방법이었다.
[...]
데판은 실낱 같은 힘으로 가늘게 눈을 떴다.
그의 앞엔 그를 구성하는 세상을 만든 이가 서 있었다.
데판의 입이 벌어졌다.
[...주군.]
[그리하였구나. 아이야. 그리하여, 이리도... 멀디먼 곳에서부터 이곳까지 온 것이로구나.]
단탈리온이 데판을 본다.
[어찌...]
[아무 말 말거라.]
그는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자애로운 손으로 데판의 복부에 손을 얹었다.
이미 그의 복부는 반쯤 뚫려 상반과 하반이 거의 분리된 상태였다.
까득까득 이를 가는 탄환은 이제 데판의 심장을 물어뜯는다.
데판은 반사적으로 신음을 뱉었다.
[고생하였구나.]
단탈리온의 손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났다.
그것은 데판의 복부가 있었던 그 자리에 떨어졌다.
검은 불씨, 염화가 이글거렸다.
아지랑이를 피웠고, 마치 춤을 추듯 흔들렸다.
불길을 따라 떠오르는 연기 속에서 생명을 가득 담은 나무가 피었고, 그 위로 생명들이 태어난다.
그것은 다만 염화였다.
허나 염화에 그치지 않았다.
[키에에엑!!!!!!]
까득 거리는 탄환이 비명을 질렀다.
발버둥을 쳤다.
데판의 생을 갉아먹던 탄환은 스스로의 생을 위해 비명을 질렀다.
허나 그 신음은 염화에 가려 자라는 나무의 양분이 되었다.
이윽고 탄환은 사라져 자리에 남은 것은 오롯이 안녕(安寧)일 뿐이었다.
[...어찌 여행은 즐겁더냐?]
두 인물이 익히 아는 대상은 서로가 아니었다.
허나 그들은 서로가 되고 있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하였더냐.]
염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번진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
사라진 데판의 복부를 따라 형(形)을 그렸고, 여전히 존재하는 데판의 윤곽을 따라 상(象)을 그렸다.
[그래, 어떠한 것들을 보았느냐.]
단탈리온의 손가락 끝이 불타기 시작했다.
그것 역시 염화였다.
[여태 보지 못하였던 것들을 보았습니다.]
[...어디 계속 이야기 해보거라.]
단탈리온의 손끝에서부터 떨어지는 흔적은 데판에게 부족한 형(形)과 상(象)을 대신했다.
[창초를 보았습니다.]
[그러하였더냐?]
[그리고 그 끝을 마주하였습니다.]
어느새 단탈리온의 손은 불씨만 남기고 사라졌다.
손끝을 불태운, 그리고 손을 재로 만든 염화에도 단탈리온은 아무런 침음성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고통에 불과하였으니.
[허나.]
데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쇳소리로 가득하던 그의 목소리에 생이 불씨를 터트렸다.
[아직 여정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
염화는 단탈리온의 팔을 태우고, 그의 반신마저 삼켰다.
이제는 반쪽 밖에 남지 않은 단탈리온은 그의 유일한 손으로 데판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에게서 옅어진 온기가 어느덧 데판의 것으로 변해있었다.
[...혹 나머지 여정을 맡겨도 되겠느냐?]
내려앉은 어스름이 순류를 따라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태양은 지평선 너머 그 어딘가로 사라졌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허나 염화는 어둠이 내려앉은 세상에 유일한 빛이 되어 불타올랐다.
데판은 눈을 감았다.
단탈리온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고맙네. 이 몹쓸 이의 장난에 함께 해주어서 말이네.]
이어 단탈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박율을 향했다.
“...오랜만이네요.”
[마지막까지 부탁하네. 그리고 다른 지평선의 나에게 말해주게나.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그리고 단탈리온은 사라졌다.
떨어지는 잿더미는 데판의 흠을 빗었다.
염화마저 사라지자 세상엔 흑이 내려앉았다.
바람이 불었다.
사라진 볕에 차게 식은 바람이었다.
그것은 무겁지 않았다.
가벼웠으며 살랑거렸다.
월광을 가리던 검은 구름은 흩어진다.
그저 남아있던 단탈리온의 흔적마저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주군의 뜻대로.]
데판은 말했다.
쩌적.
일순간 허공에 금이 벌어졌다.
존재의 공백이 만들어낸 빈틈이었다.
“...”
번진다.
고작 한 방울의 물감이 투명한 물을 바꾸듯.
하얗게 번지는 균열은 이내 흑을 대신했다.
그리고 깨진다.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데판은 그 너머를 보았다.
그곳엔 사라진 세상이 있었다.
사라졌던 마계인들이 굳어있었다.
사라졌던 단탈리온의 마계가 그곳에 있었다.
“이게...”
박율을 비롯한 일행들마저 그 너머를 보았다.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은 세상.
오롯이 하나만을 제외하고 그대로인 세상이었다.
멈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굳어있던 마계인들은 눈을 뜨고 세상을 맞이했다.
“단탈리온은...”
모든 것을 위해 오로지 스스로를 버렸다.
데판이 일어났다.
그는 너머의 세상을 향해 발을 딛었다.
[주군께서는...]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나무가 오롯히 태양을 바라기 위해선 땅이 필요하다.
천 리를 날아가는 새가 천 리에 도달하기 위해선 쉬어가기 위한 나무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그는 생을 위한 나무가 되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한 땅이 되었고, 날아가는 새를 위한 나무가 되었다.
“이 모든 걸 지키려고...”
박율 역시 그를 따라 부서진 결계 너머의 세상을 보았다.
그는 오로지 마계인들과 그 세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불태웠다.
그가 사라졌던 이유.
참혹 같은 아픔을 견뎌내어.
아이들의 죽음을 목도하였고.
그저 기다렸다.
이 순간을 위해서 말이다.
이제 검은 하늘은 사라졌다.
태양을 가리던 구름은 돌풍에 흩어졌다.
새로운 태양이 내리쬔다.
데판은 그의 세상을 구축하였던 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낮추었다.
지면에 닿는 이마는 다만 그를 기리기 위해.
[충.]
그것은 사라진 자를 위한 충성이었으며, 남겨질 자들을 위한 맹세였다.
그리고 데판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바닥과 주먹이 맞부딪혔다.
그것은 박율을 향했다.
[충.]
그리하여 그것은 새로운 맹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