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
박율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가 누워있는 곳은 새하얀 석면 천장이 보이는 병원이었다.
팔에 연결된 링겔과 익숙한 병원 침대.
아무리 고개를 돌려봐도 이곳은 병원이었다.
박율는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있었던 건지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온몸이 뻐근했다.
박율은 통증을 꾹 참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화창한 햇볕이 창을 뚫고 피부를 간지럽혔다.
전봇대 전선 위엔 새들이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박율은 뺨을 찰싹 때렸다.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
돌아왔다.
지금 그가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그가 보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무너진 건물들이 깔려있고 사방이 폐허가 된 먼 미래의 한국이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로운 한국이었다.
도로 위엔 차들이 가득하고, 길거리엔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후였다.
하지만 박율의 표정은 반대였다.
당장에라도 일이 벌어질 듯 불안한 눈동자를 굴렸다.
“안돼...”
이렇게 돌아와선 안 된다.
아직 아무 일도 끝맺지 못한 상태였다.
“돌아가야 해...”
그가 없다면 인류는 또 다시 패배할지도 모른다.
박율은 곧장 병실을 박차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멈춰섰다.
어떻게 돌아가지?
돌아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가야 하는 곳은 머나먼 미래.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문득 그의 뇌리를 타고 그를 미래로 데려갔던 마왕이 스쳐지나갔다.
“단탈리온...!”
일전의 역사로 돌아가게 된 것도 단탈리온에 의해서였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는 방법도 단탈리온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박율은 낙담했다.
단탈리온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백지의 세계라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그가 마계에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박율은 머리를 쥐어잡았다.
“망할...”
쿠당탕!
병실 문 너머 복도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박율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벌컥!
문이 활짝 열리고, 문 너머에 익숙한 이가 거친 숨을 고른 채 서 있었다.
“누나...!”
『율아...!』
문 너머에 마르가리타가 있었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박율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반가움 이전에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더 컸다.
『이게 도대체...』
“저도...”
그녀 역시 박율과 마찬가지인 듯했다.
벙찐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주 잠시 두 사람의 거리만큼 공백이 생겨났다.
『...분명 우리는 바알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까 도로 한복판이었어.』
그녀의 말에 박율은 미간을 찌푸렸다.
“...눈을 감았다 뜨니까 여기 였다고요...?”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과 함께 원래의 역사로 돌아갔던 마르가리타였지만, 그녀는 박율이 본 것을 보지 못한 듯했다.
『분명 네가 바알에게 한 방 먹이려는 순간이었어.』
하지만 눈을 떴을 땐 이곳이었다.
박율과 같은 시간선에 같은 순간을 경험했지만, 일순간 시간이 멈췄을 때 그 순간은 느끼지 못한 듯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신’을 보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는 소리였다.
박율은 잠시 입을 달싹였다.
“전...신을 봤어요.”
박율이 말했다.
그러자 마르가리타는 순간 벌어진 입 그대로 고개를 내밀었다.
박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뭐..?』
“마지막 그 순간에 모든 게 멈추더니 그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절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그게...』
“두 세계가 충돌할 거라고 했어요.”
박율은 침착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 그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정리했다.
마르가리타는 굳은 얼굴로 박율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표정이 점차 구겨졌다.
『그러니까 조만간 두 세계가 충돌할 것이고, 나머지를 부탁한다고 너한테 말했다고?』
“맞아요.”
마르가리타는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건 박율도 마찬가지였다.
쿠당탕!
그녀의 뒤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율 씨!!!”
복도 끝에서 목소리 하나가 벽을 여러 번 튕기며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이내 활짝 열린 문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곧바로 툭 치면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다시 나타났다.
“허억...허억...”
그는 거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부릅 뜬 눈으로 박율을 보았다.
눈을 비비기도 하고,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이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지각한 박석훈은 박율에게 달려들었다.
“율 씨!!!”
박율은 그를 보곤 가볍게 몸을 비틀었다.
콰당탕!
날아온 박석훈은 몸뚱이가 벽에 부딪혀 바닥을 굴렀다.
“크악...!”
벽에 박은 얼굴을 부여잡던 박석훈은 이내 벌떡 일어나 박율을 보았다.
박율은 다시 달려드려는 그를 애써 밀쳤다.
“죽은 줄 알았잖아요!”
그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제가 죽긴 왜 죽어요.”
“마왕들을 죽인 이후로 쓰러져서 여태 누워있었다고요!”
“...”
박율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누워있었던 침상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박석훈을 본다.
“의사 선생님은 전혀 생명에 지장이 없다곤 하지만, 여태 깨어날 생각을 도통 않아서 진짜...!!!”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다고요?”
박율은 박석훈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마 세 달 조금 넘었을 거에요.”
“세 달...?”
박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 달이라.
그가 플라우로스를 죽인 이후 대략 세 달 정도가 흘렀다는 소리였다.
박율은 그가 본래의 역사로 건너가고 마계를 거친 그 시간들을 역산했다.
대충 계산을 해보면 본래의 역사에서 있었던 시간과 현실에서의 시간 흐름이 전혀 다르다는 소리였다.
쉽게 말해 현재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독립적이거나 미래의 시간보다 빠르다.
인간계와 마계의 시간 흐름이 다른 것을 생각하면 얼추 시간이 계산되었다.
“...!”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마지막을 바로잡을 수 있다.
박율은 고개를 들어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그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비장한 얼굴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나저나...”
박석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마르가리타를 향했다.
그녀가 누구인지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은 율 씨를 살리면서 죽었...!!!”
“놀라서 기절할 시간 없어요. 정신차려요.”
박율은 일전처럼 귀신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라 뒤로 자빠지려는 박석훈을 잡았다.
쿵! 쿵!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박율은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주인은 장대호 회장이었다.
그는 놀랄 법도 했지만, 침착한 얼굴로 박율을 마주했다.
“...역시 돌아왔군. 자네.”
* * *
장대호는 일전 10년 뒤 미래에서 왔다는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며 혀를 내둘렀지만, 장대호는 달랐다.
유일하게 그만이 미래에서 온 이들의 말을 믿고 있었다.
그는 이미 박율이 보여준 미래를 통해 그 상황들을 본 이후였다.
그들이 말하는 상황들, 그들의 표정, 손짓, 느껴지는 공포.
그 모든 것들이 진실을 고하고 있었다.
미래에서 온 이들이 하는 말들은 대개 비슷했다.
바알이 인간계를 침략할 것이고, 그로 인해 인간계는 악마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것들은 장대호가 본 환상들과 똑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다 그들 중 몇몇이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가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의 이름이 박율이라고 말이다.
그를 통해 장대호는 짐작했다.
과거로 돌아온 박율이 다시 미래로 돌아갔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만, 장대호는 위화감을 느끼며 그것들을 믿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종합한 뒤 박율에게로 찾아왔다.
미래에서 온 이들이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면 그 역시 눈을 뜨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대호가 병실을 찾았을 땐 박율이 정신을 차린 뒤였다.
“...그렇게 된 것이라네.”
“...”
장대호의 말에 박율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전부 하세원 씨의 포탈을 타고 나타났다는 거죠?”
“그렇네만.”
박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르가리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방법을 찾은 것이다.
당장 움직인다면 충분히 일을 끝낼 수 있다.
박율은 장대호를 보았다.
“하세원 씨는 어디 있죠?”
“하세원 말인가?”
장대호는 갑작스러운 박율의 다급함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지만, 이내 진정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스페인으로 갔다네.”
“스페인?”
“푸르카스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그곳에 지원을 보냈네만.”
“푸르카스라니... 아!”
박율은 그제야 기억했다.
이맘때쯤에 푸르카스가 스페인을 집어삼켰던 사건을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일찍 푸르카스가 스페인을 습격한 듯했다.
본래의 역사대로라면 가장 먼저 서울이 함락되고 그 다음으로 스페인이 함락되어야 했다.
그 시기 역시 서울을 완전히 함락하고 몇 개월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바뀐 역사에선 서울이 함락당하지도 않았고, 되려 인간들이 승리를 거두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서 푸르카스 측 세력이 생각보다 일찍 인간계를 침공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인간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빠르게 침공을 했다는 건 그만큼 준비가 짧았다는 뜻이니까.
박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스페인으로 가야겠습니다.”
박율이 말했다.
“그럴 줄 알았네.”
장대호는 예상했다는 듯 답했다.
그가 머리 속으로 생각한 상황 중 하나였다.
만약 박율이 정말 눈을 떴다면, 그리고 현 상황을 인지한다면 무조건적으로 스페인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세원을 스페인을 보낸 것도 같은 이유였다.
만약 박율이 깬다면 그는 푸르카스를 처치하러 갈 테고, 그럼 움직이는 시간을 단축해야 했다.
장대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짧게 전화를 끝마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잠시 기다리게나.”
장대호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뒷짐을 지었다.
“자네가 없어진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네.”
박율과 마르가리타는 그의 행동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장대호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박율은 일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병실 내에서 또 다른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그가 흠칫 고개를 돌렸을 때.
벽이 있어야 할 곳에 포탈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엔 하세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율 씨!!!”
그녀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박율은 다른 곳에 눈이 팔려 인사를 받아주지 못했다.
긴 타원형으로 벌어진 포탈 저 너머에 익숙한 가면을 쓴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봉기 형...?”
가면에 가려진 얼굴은 표정을 가린 채였다.
하지만 그 역시 박율을 마주하고는 그대로 굳었다.
두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늑대 가면을 쓴 백봉기는 한참 동안 박율을 멍하니 보더니 이내 고개를 살짝 꾸벅이곤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