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봉기 형...!”
박율은 흠칫 백봉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턱.
뒤에서 장대호가 박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속죄라고 하더군.”
장대호는 씁쓸한 어투로 혀를 끌었다.
박율은 굳이 그게 무슨 뜻이냐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뻗은 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일단 들어가서 나머지 이야기를 나누세.”
장대호가 포탈을 넘어 스페인으로 향했다.
“회...회장님...!”
그의 뒤에서 수행비서가 놀라며 소리쳤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들어오라 손짓했다.
어차피 스페인에 볼 일이 있었다며 능청스레 답하는 장대호는 그대로 포탈을 넘어갔다.
수행비서는 안절부절하지 못한 채 그를 뒤쫓았다.
멍하니 사라진 백봉기와 장대호를 보던 박율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발을 떼었다.
“...우리도 갑시다.”
박율은 그를 쫓아 포탈을 넘었다.
마르가리타와 박석훈 역시 재빨리 그를 따라갔다.
* * *
포탈을 넘어 스페인으로 온 박율은 오랜만에 만난 일행들과 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플라우로스가 죽고 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길드 율이 어떻게 되었는지, 백봉기는 왜 아직 늑대 가면을 쓰고 있는지, 현재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등등 말이다.
장대호의 이야기를 듣던 박율은 하나둘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들이 더 잘 풀린 듯했다.
사자들끼리 정치싸움이 벌어져 국내외 할 것 없이 갈등이 생겨났던 본래의 역사와는 달리 현재의 역사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 중 길드 율의 역할이 상당수 차지한 덕에 길드 율의 입지는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커진 듯했다.
그로 인해 스페인의 레거시 길드에서도 길드 율에 도움을 청했고 말이다.
“그런데 아무 조건 없이 지원을 수락했다고요...?”
박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그가 박율을 통해 머나먼 미래의 참상을 보았다지만, 그는 한 기업의 수장이자 길드의 장이었다.
수익을 우선시하고, 효율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그것들을 싸그리 무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홀짝.
장대호는 차로 입가를 적셨다.
“내 맘이네.”
그는 새침한 얼굴로 답했다.
박율은 딱히 딴지는 걸지 않고 의외라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물어봐야 할 것들이 산더미 같았지만, 그는 일단 그것들은 일단 뒤로 하고 당장 해야할 일에 집중했다.
“일단 그전에 세원 씨.”
박율이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멍을 때리고 있던 하세원은 그의 부름에 흠칫 놀랐다.
“네...네!?”
“포탈을 타고 넘어왔다던 그 사람들.”
박율이 입을 열자 하세원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는데, 무언가 기합이 잔뜩 든 이등병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분들이 넘어온 포탈은 어딨어요?”
“아...그...”
하세원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전부 사라졌어요.”
“사라져요? 하나도 남김없이?”
“네, 사람들이 포탈을 빠져나오자마자 포탈이 닫혔다고 했어요.”
“그 포탈들은 전부 어디로 연결된 포탈이었어요?”
“그게...너무 다양해서...”
“그래도 대충.”
하세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근처 부평에 있는 학교랑 동해 쪽 터널이랑 강남 쪽이랑...”
“...”
몇 개의 위치를 더 말하던 하세원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충 말한 것들만 해도 열댓개가 넘어갔다.
박율은 그 위치들 사이의 유사점을 찾으려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전혀 접점이 없는 구역들이었다.
“혹시 세원 씨, 이상한 곳에 간 적 없어요?”
“이상한...곳이요?”
“건물들이 무너져있고, 악마들이 사방에 있는?”
“...없을...걸요?”
“잘 생각해봐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이상한 곳이었다던가, 포탈을 넘어갔는데 낯선 땅이었다던가...”
박율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하세원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없어요.”
“...”
하세원의 능력은 그녀가 새긴 흔적과 흔적 사이를 연결하는 것.
다시 말해 그녀가 다녀간 곳들만 연결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포탈을 타고 넘어온 이들이 있었던 곳에 닿은 적이 없다.
모종의 이유로 이곳의 포탈과 그곳의 포탈이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혹시 포탈을 넘어온 사람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연결되는 포탈을 만들 수 있겠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볼...까요?”
하세원은 끝말을 흩트리며 말했다.
자신감이 전혀 없는 목소리였다.
일단 박율은 해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등에 짊어지고 있던 활을 꺼내 가까운 벽에 쏘았다.
푹!
그리고 권능을 개방한다.
화살이 박힌 벽에서 하얀 불꽃이 피어나더니 이내 커다란 포탈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그 반대편은 열리지 않았다.
하세원은 온정신을 집중해 포탈을 연결할 지점을 찾았다.
“읏...”
하세원이 아주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무언가 열과 성을 다해 포탈을 찾지만, 그녀는 이내 온몸의 힘을 풀었다.
동시에 한쪽만 열린 포탈이 닫혔다.
“죄송해요.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박율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에서 포탈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낯선이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먼 미래에서 온 이들이었고, 박율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던 이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말했다.
한 남자가 반란을 준비한다고.
그것은 필시 박율을 말하는 것이었다.
“...포탈에서 사람들이 처음 넘어온 게 언제인거죠?”
박율이 장대호를 보았다.
“대략 4주 정도 되었을 테야.”
“4주...”
그 정도 기간이면 두 세계의 포탈이 연결된 시기가 얼추 박율이 단탈리온에 의해 본래의 역사로 돌아간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모종의 이유로 두 세계가 연결된 것과 두 세계의 시간이 다르게 흘렀으며, 현재의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언제 포탈이 또 연결될지는 알 수 없겠죠?”
“네... 제가 의도해서 여는 포탈이 아니라서요...”
하세원은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답했다.
박율은 고맙다며 희끗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중에 포탈이 다시 열리거든 말해줘요.”
“네넵...!”
하세원은 잔뜩 기합을 넣은 목소리로 답했다.
박율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그녀는 괜찮다며 오히려 더 기합을 넣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장대호가 답했다.
그러자 문이 끼익하고 열리며 흙먼지 투성이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흘깃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더니 이내 장대호에게 다가갔다.
그는 방 안에 있는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지만, 장대호가 손짓을 하자 그때부터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푸르카스 세력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말하게.”
그의 말에 따르면 일전까지는 일개 5-9급 악마들로 탐색전을 벌이던 푸르카스 측 악마들이 자정을 기점으로 더욱 많은 물량을 공세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2급 악마 수준의 고위 악마들까지 나타나 사자 측 손실이 점차 커지고 있으며, 이러다가는 전세가 역전될 판국이라고 했다.
선봉에서 늑대 가면을 쓴 남자가 힘을 쓰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하여 때마침 스페인에 찾아온 장대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남자가 찾아온 것이었다.
“흠...”
남자가 이야기를 끝내고, 그는 사뭇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장대호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도 여유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것 없네. 그럴 줄 알고 우리 측에서는 이미 준비를 끝냈으니.”
장대호는 수행비서에게 손짓을 했고, 그는 곧바로 길드 율의 본진에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장대호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박율을 보았다.
딱히 무어라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단탈리온을 찾을 수도 없고, 하세원의 포탈을 찾을 수도 없다.
결국은 기다려야 무언가 답이 나올 문제였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순 없었다.
박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망치를 소환한다.
그의 움직임에 박석훈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보았다.
“유...율씨...!”
“갑시다. 괜히 시간 끌 필요 없어요.”
“벌써 그렇게 무리하게 움직이면...”
박석훈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박율은 몇 달을 병실 신세를 지닌 환자였다.
재활도 없이 일어난 것도 말이 안되는 일이긴 했지만, 이 상태에서 곧바로 전투에 뛰어든다니.
하지만 현재 박율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느꼈던 뻐근함은 이제 전혀 느껴지지도 않았다.
몇 달을 누워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말이다.
아마 그의 몸에 스며든 수많은 권능들로 인한 듯했다.
『갈까.』
마르가리타 역시 이미 준비를 끝낸 참이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움직일 수 있다면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터였다.
게다가 박율과 마르가리타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전장에 있었던 몸.
아직 전투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안내해주시죠.”
박율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는 짐짓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문을 지나 길을 안내했다.
그를 따라 마르가리타가 움직였고, 박석훈은 잠시 뜸을 들이다 역시나 그들을 쫓았다.
“혹시 모르니 다른 인력들도 대비시켜 놓게나.”
자리에 남겨진 장대호는 수행비서에게 말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하세원을 보았다.
“거기, 하세원 양?”
그녀는 박율을 쫓아가려 했지만, 장대호의 부름에 흠칫 자리에 멈췄다.
누가 보면 혼내기라도 하려고 불러세운 줄 알겠다.
“네...?”
“돌아가는 포탈을 부탁하네.”
“돌아가시게요?”
“그러면?”
순간 고개를 갸우뚱하던 하세원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넵.”
“난 너희들과 달리 평범한 인간이야. 돈이 많은 기업가일 뿐이지.”
장대호는 혀를 질질 끌었다.
그는 길드 율과 태성그룹의 수장.
괜히 이런 곳에 있다가 사고라도 당했다가는 벌어진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일을 끝냈다면 빠르게 돌아가는 게 상책이었다.
하세원은 곧바로 활을 꺼내 벽에 화살을 박았다.
화살촉에서부터 피어오르는 하얀 불꽃은 커다란 타원형 포탈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포탈 너머 길드율의 풍경이 보였다.
장대호는 포탈이 완전히 만들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포탈을 넘어갔다.
“그럼 나머지를 부탁하네.”
“네...넵!”
하세원은 포탈을 넘어간 그를 보며 답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에 피식 웃더니 이내 저 멀리 사라졌다.
“후... 역시 회장님은 왠지 모르게 무서워...”
하세원이 다시 포탈을 닫으려고 하던 때였다.
일순간 새하얗게 타오르던 포탈이 폭발할 듯 더욱 크게 불길을 내뿜었다.
“...!!!”
하세원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커다랗게 변한 포탈은 이내 다시 원형을 되찾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분명 길드율과 연결된 포탈이었지만, 지금 저 포탈은 길드 율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쩌적!
포탈이 갈라진다.
마치 유리가 깨지듯 번개 같은 금이 포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내.
그 너머에서 낯선이가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쨍!
동시에 포탈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