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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이방인
날이 밝아왔다.
새벽에 잠에서 깬 준은 가부좌를 한 채 날이 밝을 때가지 명상에 들어 있었다.
천왕대심공과 마법에 관하여 처음부터 되새기면서 잘못 이해한 것이 없나 살펴보는 것이었다.
다행이 천왕대심공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마법서에서 보고 익힌 것은 약간 달랐다. 마법수식과 공격마법 같은 것은 다른 게 없는데, 어느 마법서에서도 자신과 같이 마나고리가 서로 붙어 있는 기이한 현상에 대한 것은 없었다.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마나고리가 붙은 것일까? 심장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 알 수없는 이 기운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 같은데, 이걸 모르겠군.”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했다. 차원이동이 되었을 때 몸속에 흡수된 혼돈의 기운인데, 그때는 기절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려.’
명상을 멈추고 눈을 뜬 후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글리아나와 패트릭, 세브리노는 아직까지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음, 오늘 아침에는 무엇을 먹을까? 그래! 누룽지탕!”
준은 어제 저녁에 지은 밥 냄비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냄비 속에는 누룽지가 붙어 있었다.
화르르.
불씨만 남아 있는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자 다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냄비에 물을 붓고 불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각종 채소를 냄비 안에 집어넣고는 푸욱 끓였다.
글리아나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났고, 조금 뒤 패트릭과 세브리노도 잠에서 깨어났다.
“준, 뭐하는 거야?”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야.”
“그래? 오늘은 어떤 것을 맛 보여줄 거야?”
“기대해도 좋아. 어서 세수부터 해.”
“알았어.”
글리아나는 냄비를 쳐다보고는 간이 욕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패트릭이 준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준 님,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식사 준비를 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패트릭,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오늘은 별미를 준비했어.”
“별미라고요?”
“기대해도 좋아. 글리아나가 세수하고 나오면 세수부터 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후루룩, 쩝쩝.
준이 만든 누룽지탕은 속이 풀리면서 아주 고소했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잘도 먹었다.
누룽지탕과 과일로 식사를 마친 후 이들은 준이 끓여준 차를 마시면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이제야 오도치 상단의 사람들도 아침을 먹으려고 준비 중이었다.
출발하려면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기에 준은 노페르슈롱을 목욕시키기로 했다.
“노페르슈롱아, 목욕하자.”
이히힝!
준의 말을 알아들은 노페르슈롱은 좋아서 입술을 뒤집으며 울었다.
각종 과일을 담은 통을 가져와 앞에다 내려놓자, 노페르슈롱은 과일을 맛있게 먹었다.
준은 노페르슈롱의 몸에 물을 뿌리고 솔로 몸의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씻겼다.
비누로 충분하게 거품을 내었기에 노페르슈롱의 몸에서는 장미향이 진하게 났다.
처음에는 목욕에 익숙지 않아서 몸부림쳤지만 그럴 때면 준이 포박마법으로 꼼짝하지 못하게 한 뒤 강제로 목욕을 시켰기에 이제는 알아서 가만히 있었다.
노페르슈롱도 목욕을 하면 몸이 깨끗해지고 진드기나 벼룩 이 없어졌기에 이제는 더욱 좋아했다. 게다가 몸에서 장미향이 났기에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글리아나와 일행들의 말은 그렇지가 않았기에 목욕을 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준이 포박마법을 걸어 꼼짝하지 못하게 만든 뒤에야 목욕을 시킬 수 있었다.
대형 수건으로 물기를 깨끗하게 제거한 뒤 빗으로 잘 빗겨 안장을 얹었다.
원래 종자가 우수한 말인 데다 준이라는 좋은 주인을 만나게 됨으로써 이렇게 목욕까지 시키자 더욱 잘생겨 보였다. 좋은 먹이를 마음껏 먹어 최상의 몸 상태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촤라라락.
금속음이 터져 나오면서 준이 설치했던 이동식 집인 게르가 다시 거두어지자 마법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준과 이들은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말까지 목욕 시켰기에 매우 깔끔해졌다.
글리아나는 되도록이면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로브의 후드를 썼다. 오도치 상단의 일꾼이나 용병들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신의 미모로 인해 도시 올가에서도 크고 작은 소란이 일어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출발!”
오도치 상단의 선두에 있던 용병이 큰소리로 외쳤다.
쿠르르르.
짐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준과 그 일행들은 후미에서 따라가야 했기에 아직 여유가 있었다.
오도치 상단이 모두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자 그제야 천천히 타고 있던 말을 움직였다.
오도치 상단주의 셋째 아들인 크리슨은 올해로 21살이며, 이번 상행의 책임자였다.
국경영지인 브란스 남작령까지는 고작 7일 정도 걸리는 상행 이었기에 3년 전부터 상단주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경험을 쌓아왔다.
이번에는 자신이 상단의 책임자가 되어 첫 상행을 하는 의미 있는 상행이었다.
첫날에는 마차를 타고 이동했지만 마차 속에서 편안하게 가는 것은 경험을 쌓는 자신에게는 그리 좋지 않다는 생각에 둘째 날부터는 말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마차에서 나와 말을 타고 이동 중이었는데, 후미에서 따라오는 준 일행을 힐끔거리면서 자신의 옆에서 이동 중인 유닉스에게 말하였다.
유닉스는 오도치 상단에 소속되어 12년째 일해오고 있는 자로, 검술실력이 제법 뛰어나다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5년 전부터는 크리슨의 개인 경호원 겸 조언을 해주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봐, 유닉스. 후미에서 따라오는 저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러셀 왕국까지 가는 모양인데, 국경영지인 브란스 남작령까지 저희의 뒤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4명 중에서 한 명은 여자 같은데?”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후드는 왜 쓰고 있는 걸까?”
“혹시 얼굴을 보여주기가 창피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왜?”
“그거야,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파란색 로브를 입은 저자는 마법사인가?”
“파란색 로브를 입는 마법사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마법사는 아닌 것 같아 보였습니다.”
“수하들은 어젯밤에 친 천막이 아티팩트라고 하던데?”
“예, 저도 처음 보는 특이한 형태의 천막이었습니다.”
“조그마한 천막에 말까지 끌고 들어가 잤다고 하니 신기하군.”
“마법물품이니 공간확장마법 같은 게 걸려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선 두 사람 정도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공간에 말까지 이끌고 들어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겠군.”
크리슨과 유닉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준은 피식거렸다.
천왕대심공을 익혔기에 범인이 상상도 못할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도 마음만 먹는다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준, 왜 웃는 거야?”
“저들이 우리 이야기를 해서 들어봤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별것 없어. 글리아나가 후드를 쓴 이유를 궁금해 하던데?”
“그래서 뭐라 했는데?”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더군.”
“호호, 웃기네. 내 얼굴을 보았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감히 못하지. 누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글리아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 안 그래?”
옆에서 같이 이동 중이던 패트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호응해주었다.
“그건 준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지금도 글리아나 님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습니다.”
“호호,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정말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얼굴을 노출시키지 마십시오.”
“아…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다가닥 다가닥.
천천히 말을 타고 이동하던 이들은 석양이 질 때 사방이 탁 트인 초원을 지나게 되었다.
길에서 조금 벗어난 적당한 곳에 짐마차를 세우고 야영 준비를 서둘렀다.
준은 노페르슈롱에서 내려 오도치 상단의 야영지와 약 3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마법주머니 속에서 이동식 집인 게르를 꺼내었다.
촤라라락.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순식간에 둥근 원형의 천막 게르가 설치되었다.
크리슨과 유닉스는 말에서 내려 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게르를 설치하는 게 무척 신기해 보였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식간에 게르가 설치되자 준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곧 나머지 일행들도 뒤따라 들어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세브리노가 말뚝에 말고삐를 묶었으며, 말들에게 먼저 물과 과일을 먹였다.
오늘 저녁 식사 준비는 패트릭이 하게 되었기에, 준은 마법주머니 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꺼내주었다. 그러고는 책상과 의자를 꺼내어 놓고 앉았다.
준은 정사각형에 크기가 50cm, 두께 5cm 정도 되는 금속판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원래 이 금속판은 무게가 130kg 정도 나가는데, 여기에 경량화 마법을 걸었기에 그나마 10kg 정도의 무게가 되었다.
금속판을 내려놓고 그 위에 다가 10cm 정도 되는 별모양의 틀을 9개 놓았다. 오목하고 보통의 국자보다 약 3배 정도 큰 국자에 한쪽이 뾰족한 게 붓기 좋도록 되어 있는 특이한 국자였다. 그런 뒤 은덩이를 집게로 집어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주루룩.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 은덩이가 녹으면서 액체가 되어버렸다.
준은 조심스럽게 국자를 들어서 별모양의 틀에 부었다.
치이이이.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9개의 별모양의 틀에 액체 상태가 되어 있는 은을 다 붓고는 열기가 식을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그러고는 천으로 묻어 있는 은을 잘 닦았다.
이번에는 금속판 위에 톱니바퀴 모양의 틀을 놓고 조심스레 집게로 금덩이를 집어 국자에 넣었다.
치이이.
이번에도 김이 피어올랐다.
준은 액체상태가 된 금을 톱니바퀴 모양의 틀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준 님, 식사하십시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준은 일단 은과 금이 굳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기에 그동안 식사를 먼저 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름에 살짝 구운 빵과 따끈한 스프를 준비했다. 그리고 고기에 칼집을 넣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넣고 각종 채소도 넣어서 기름에 데치다가 다시 소스를 넣고 버무린 일종의 고기채소볶음도 있었다.
패트릭도 야영을 한 경험이 제법 있었기에 맛은 괜찮았다.
쩝쩝쩝, 후루룩.
준은 제법 배가 고팠었기에 아주 맛있게 잘 먹었지만 글리아나는 입이 조금 까다로운 편이라 구운 빵과 스프는 다 비웠지만 고기채소볶음은 조금만 먹었다. 부족한 양은 과일로 채웠다.
“패트릭, 잘 먹었어.”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난 연구하던 게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틀에 부었던 것은 적당하게 식어 겉은 제법 굳어 있었지만 속까지 완전히 식은 것은 아니었다.
가죽 장갑을 끼고는 틀을 들어서 때렸다.
타탁, 탁탁.
틀에서 별모양과 톱니바퀴 모양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