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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뜻밖의 해적-14화 (1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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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 속의 표류선

3일이 지난 지금,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내 옆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보고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여자를 이렇게 맘대로 풀어둔 거지? 아 모르겠다. 마리아가 뭔 생각을 하고 사는건지.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단 열쇠를 여기까지 운반해준 고마운(개뿔, 퍽이나 고맙겠다) 사람이고, 나름 귀한 장물이니까. 낮에 돌아다니는 정도의 자유는 주는게 좋겠다고 판단했단다.

나는 한 숨을 쉬고 조타수에게 말했다.

"다섯 작대기, 오른쪽으로."

해류를 갈아끼고, 나는 다시 조타수에게 말했다.

"여섯 작대기, 왼쪽으로."

그리고 천천히 굴러가는 와중에, 내 옆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소녀가 말을 건다.

"몇 살이세요?"

그 말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스물 다섯."

젊으시네요. 라면서 나를 보던 그녀가 말한다.

"가다가 왜 방향은 튼 거에요?"

아아아아아악! 예전 삶에서 다섯 살 먹은 조카가 내 옆에 달라붙어서 이렇게 나를 괴롭혔는데. 이건 그거보다 더 나이를 먹고는 왜 저러는거야!?

"해류를 바꿔타려고."

그 말에 소녀가 다시 물어본다.

"해류?"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뭐라뭐라 꿍시렁거리면서 대답했다.

"방향이 맞는 해류를 타면 배 속도가 훨씬 빨라지니까."

그 말에 그녀가 다시 물어본다 그만 물어봐! 확 물어뜯어버릴까?!

"그게 보여요?"

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

"바다의 정령왕에게 수명의 삼분의 일을 바치면 볼 수 있지."

"세상에, 수명을 바쳐요?"

나는 묵묵히 크로노미터로 시간을 확인했다. 마침 시간도 인간이 가장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잔인해질 수 있는 오전 11시, 소녀 하나 정도는 끝장내도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 같아. 나는 한숨을 쉬고 진실을 말해주었다. 세상에 저런 말을 믿다니.

"뻥이다."

그 말에 소녀가 나를 노려본다.

"... 배 한 10년 타면 보일거다."

안 보이는 녀석들도 있겠지만 말이지.

"몇 살에 배를 타셨나요?"

"내 나이에서 배 탄 세월을 빼면 되겠네."

15살, 이라고 중얼거린 다음 다시 로제가 질문을 퍼붓는다.

질문과 대답, 다시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 공손하게 대하라는 명령만 없었으면 나는 진작에 이 여자를 마스트에 꺼꾸로 매달아 버릴 수도 있다!

"아참, 제 이름은 로제에요."

아, 어쩌라고. 스파게티 소스같은 이름이네. 로제소스 맛있던데.

"레이먼드."

그렇게 말하고 나는 돛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 자식들아! 내가 바꾸라고 하기 전에는 횡범 피고 계속 있을거냐?! 배가 거꾸로 가면 그때 종범 필래!? 횡범 접고 종범 펼쳐!"

니가 왜 움찔거리냐.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 소녀를 바라봤다. 바닷 바람은 별로 맞아보지 않은 하얀 피부에, 검은 장발. 푸른 눈. 인형처럼 귀여운 소녀에다가...

배에 아무런 쓸모 없는 굴러다니는 짐짝.

근데 말하는 짐짝. 그것도 주로 질문을 하는 짐짝.

마음에 들지 않아! 배에는 노는 인간이 있으면 안된다! 사실 그게 제일 싫어! 나는 습관적으로 육분의를 꺼내서 눈에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아 젠장, 이걸 쓰면...

"그건 뭐에요?"

뒤편에서 마리아가 나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저건 분명히 내가 지금 엿먹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오는 표정이다. 왜냐하면 이 로제라는 소녀가 보지 않을 때 마다 내 얼굴이 실시간으로 곰팡이 핀 건빵마냥 썩어들어가고 있었으니까.

"... 육분의다. 배 위치를 확인할 때 쓰지."

그 말에 로제가 직접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낮에는 잘 못 다루는 녀석이 보면 눈 멀어."

그 말에 소녀가 멈칫하더니 다시 천천히 손을 내렸다. 뻥이지롱. 이거 비싼거야 임마. 망가지면 배가 통째로 눈을 잃는거랑 마찬가지고.

일단 체크를 마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왼쪽으로 한 작대기만 더 주자."

그리고 나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로제를 보다 말했다.

"멀미는 괜찮나?"

"그러게요, 적응이 벌써 된 건가?"

"복부는?"

"아직 아픈데, 참을 만 해요."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게 벌써 참을 만 해져? 그럴리는 없는데. 내가 무심하게 그녀의 배를 꾹 눌러보았고 바로 비명을 지르면서 무릎을 꿇는 소녀.

예스! 나는 속으로 올레를 외치며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라. 그거 덧나면 바다 위에서 골치아프다."

그 말에 나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럴게요. 고마워요 레이먼드."

뭐 이상한 오해가 시작된 모양인데. 최소한 눈 앞에서 보이지 않았으면 해서 치우는거다. 그렇게 고마운 표정 짓지마.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고 훨씬 밝은 표정이 되었다.

"꽤 삼촌과 조카 같고 그림 좋던데."

그 말에 내가 픽 웃었다. 그럴리가 없잖아.

"세상에 조카를 죽여버리고 싶어하는 삼촌도 있습니까?"

그 말에 마리아가 실실 웃다가 말했다.

"좋은 분위기야. 이대로 더 하면 먹어도 배탈 안 날 정도로 익겠는데."

고기나 과일도 아니고. 뭘 익히고 있냐.

"거 사지 멀쩡하게 생기신 분이 자꾸 중년 변태같은 이야기 하지 마시지요."

나는 하품을 하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마리아에게 말했다.

"선원들에게는 언제 말할겁니까?"

그 말에 그녀가 대답한다.

"럼보틀 만에 도착해서. 가기 싫다고 하는 애들은 두고, 다른 녀석들을 꼬셔야겠지."

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

"그러다보면 소문이 퍼지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 거기를 가서 뭘 하는 지는 말 안해줄거니까."

그거 사기치는거 아니... 됐다, 말을 말자. 나와 마리아가 이야기를 해서 하나도 정상으로 끝난 다이얼로그가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리고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던 마리아가 약간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 어이, 여기 어디야."

그 말에 나는 주변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바다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젓고 마리아가 나를 바라보며 손으로 저 멀리에 보이는 커다란 암석을 가리켰다. 꼭 촛대처럼 솟아있는 바위.

"저거 진홍의 촛대 닮았는데. 착각이지?"

그게 뭔데. 나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머리를 긁었다.

"이런 씨... 지도 찍어봐 지금 어디야?"

그 말에 나는 선장실로 가서 지도를 찍어주었다. 여긴데 뭐가 문제야? 나의 표정을 바라보던 마리아가 대답했다.

"말해봐, 카민 루주힐 전설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그 말에 나는 잠잠히 있었다. 그건 또 뭐야.

"왜 하필이면 이리로 가기로 정한거야?!"

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

"당연히, 빠르게 갈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마리아가 머리를 짚었다.

"약 삼십년 전에, 진홍의 촛대를 경유해서 무역을 하러 가던 선장이 있었어."

그리고 마리아가 나를 바라봤다.

"이름은 카민 루주힐. 진홍의 촛대로 가는 와중에 커다란 태풍을 만나서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했었지. 그래도 그는 항해를 멈추지 않았어. 선원들이 와서 선장을 말리고 난리도 아니었데."

마리아의 얼굴이 썩으면서 말했다.

"그때, 너무 화가 난 그 카민 선장이 선장실 밖으로 뛰쳐나와서 바다에 대고 소리쳤지. 악마에게 이 배에 탄 사람들 모두의 영혼을 바쳐서라도 진홍의 촛대까지는 도착할 거라고."

그리고 마리아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

"기적처럼 그 말이 끝나자마자 태풍은 그치고. 배는 진홍의 촛대에 도착하는데 성공했어. 하지만, 최종 목적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지. 거기에서 악마가 영혼을 가져갔거든. 그래서 아직도 영혼이 빼앗긴채로 선원들과 함께 진홍의 촛대 근처를 방황하고 있다고 전해져."

그 선원들은 무슨 죄야? 선장 잘 못 만나서 졸지에 영혼이 도매가로 팔려버렸네.

"저는 미신 안 믿습니다."

이름이 카민(빨강색) 루주(빨강색)힐인 사람이 진홍(빨간색)의 촛대에서 떠돌고 있다고. 온통 시뻘겋구만. 무슨 공산당 선장인가? 무슨 우연의 일치로 그런 일이 생기겠냐. 그냥 뱃사람들이 적당히 꾸며낸 이야기겠지. 나는 무심코 나침반을 바라봤다.

"아, 이래서 그런 전설이 생긴건가."

여기 자기장 이상지대구나. 나는 물끄러미 혼자 핑핑핑 정신나간 회전목마마냥 돌고 있는 나침반을 바라보았고. 마리아가 그걸 보다가 나를 바라봤다.

"벌써 불길한데."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나침반 없어도 저희 크르노미터랑 육분의가 있습니다. 항해하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 정도는..."

문득 느꼈다. 배 속도가 확 떨어졌는데. 무슨 일이지?

나는 천천히 선장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얼씨구."

자욱하게 낀 안개. 대낮에 해무(바다안개)라니, 흔한 일은 아닌데. 핑핑핑 돌던 나침반이 딱 멈추더니 그대로 한 방향을 가르켰다. 그리고, 내 방향 감각은 그곳이 절대로 북쪽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선원들이 당황하기 시작하자, 나는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지랄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무슨 돗대기 시장이냐."

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 쯔쯔 하고 혀를 찼다.

사내새끼들이 쫄아서는. 나는 하품을 한 번 하고 주변을 슥 둘러봤다. 진짜 더럽게 농밀한 안개잖아. 걷힐 때 까지 기다리는게 나으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난간에 다가가서 바다를 바라봤다.

"닻 내려라. 이 안개에 항해하는 건 무리다."

그 말에 선원들이 기겁을 하면서 말했다.

"이 안개는 그냥 안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멈추면 안됩니다!"

그 말에 나는 귀를 파고 말했다.

"죽은 자들의 숨결 같냐? 막 무서워? 이 븅신들아, 닻이나 내려."

뒤편에서 마리아가 말했다.

"닻 내리지마. 항해는 계속한다."

그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눈코입이 다 막혔는데 어떻게 항해를 합니까?"

그 말에 마리아가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항해한다."

... 선장은 마리아다.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에 말했다.

"항해 계속 한다."

내 방향 감각이 맞기를 빌어야지.

============================ 작품 후기 ============================

플라잉 더치맨은 캐러비안의 해적 때문에 유명하죠. 데비 존스가 플라잉 더치맨의 선장이라는 전설은 플라잉 더치맨에 관한 미신들 중 한 가지입니다.

소설에 나온 카민 루주힐 미신은 플라잉 더치맨에 관한 수많은 전설들 중에 하나(캐러비안의 해적에서 쓴 내용 말고)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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