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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보틀 만에서 일어난 일
항해는 너무나도 순조로웠다. 그 빌어먹을 안개 이후로는 이어지는 바람은 줄곧 돛에 직각으로 쏟아지는 우측면풍이었다. 계속 빨라지는데 멈추지 않고 이 바람이 계속 분다. 말 그대로 걱정할 것도 없었다. 조타수는 내가 맨날 붙들고 괴롭혀서 그런지 이제 제법 항로에서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나는 가끔 항로와 위치를 확인하고 지시를 내린 다음에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걸로 장땡.
다만, 나의 밤은 그들의 낮보다 힘들었다.
그리고 그 밤이 다가오자 나는 생리 증후군에 걸린 여자라도 된 것처럼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항해사실에 들어갔다.
나를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제. 내가 세헤라자데도 아니고! 천일 야화냐?! 왜 나만 보면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안달이야?
"아, 레이먼드."
반갑게 일어나서 나를 바라보는 로제. 나는 뚱한 표정으로 저녁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벌써 가게요...?"
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
"또 뭐가 궁금한데."
그 말에 그녀가 웃으면서 말한다.
"배가 빨리 가고 있어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지."
"순풍이 제일 빠르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한다. 배를 바로 뒤에서 밀어주는 순풍이 제일 빠르지 않냐고. 순풍이 좋기는 하지. 뒤에서 바로 밀어주니까. 근데 바람이랑 속도가 같아져버리면 그때부터는 그 속도가 유지되거든.
"배와 직각이 되는 측면풍이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훨씬 좋지."
나는 한숨을 쉬면서 침대에 걸터앉았고, 그걸 보며 로제가 활짝 웃으며 약간 몸을 내 쪽으로 당겨앉았다.
"왜요?"
"배가 아무리 빨라져도 계속해서 미는 힘을 받을 수 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어. 나는 로제에게 그렇게 대답을 해주었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원들이 엄청 큰 문어 이야기를 하던데요."
... 그래, 이전이었으면 미신이라고 했겠지만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는 상태로 접어들고 있으니까.
"그런 전설이 있기는 하지. 몸통이 배보다 더 큰 문어. 배를 부수고 선원들을 잡아먹는다고 전해지는."
그 말에 그녀가 뭔가를 물어보려고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야."
내 말에 그녀가 약간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어... 음..."
하! 더 물어볼게 없지 요것아!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언젠가는 니가 질문이 다 떨어질 날이 올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 더 물어볼게 없으면 나는 이제 돌아가지."
그 말에 로제가 으으, 하는 소리를 내고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냥!"
로제의 말에 내 발걸음이 멈췄다.
"그냥... 그냥 이야기나 해요 우리."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내가 되게 나쁜 새끼 같잖아. 나는 머리를 긁다가 입을 열었다.
"술은 좀 하나?"
그 말에 로제가 물음표를 얼굴에 띄운다.
"아직 마시면 안된다고 하던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 하고 말했다.
"그럼 이번 기회에 맛이나 보라고."
그러면서 나는 찬장에 올려져 있는 럼주를 하나 꺼내서 테이블에 턱 하고 올려놓고, 나무로 만든 컵에다가 로제의 몫을 따라놓았다.
"안주는 없다. 해적은 그런거 안 키워. 쓰면 물 마셔라."
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럼주병에 입을 가져가 한 모금 했다. 그걸 보고 있던 로제가 천천히 나무컵에 입을 대고 맛을 보았다.
"?!"
입에서 그대로 주르르 흘러 내리는 럼주. 그리고 나는 그걸 보면서 눈쌀을 찌푸렸다.
"아, 아깝잖아."
그 말에 로제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내 저를 죽이려고 독약을...!"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노려보는 로제의 머리를 알밤으로 한 번 찍고 말했다.
"약이다 이것아, 마음의 약."
나는 그렇게 말하고 하품을 한 다음 다시 한 모금을 마셨고. 로제가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한 번 그 잔에 입술을 가져가 그대로...
"야 이 미친...!"
그걸 원샷하고는 쿨럭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한 번에 다 마시는 사람이 어딧냐?!"
그 말에 로제가 눈이 빨개진 채로 쿨럭이면서 말했다.
"야... 약이라면서요. 레이먼드는 지식이 많으니까, 약은 원래 맛 없어도 쭉 들이키는 거잖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이상한 여자야. 나는 얼이 나가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덜미부터 벌겋게 얼굴을 향해서 기어올라오는 붉은 홍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후으....으...."
취했다. 당연히 취했겠지! 럼이 무슨 애들 먹으라고 만들어주는 칵테일도 아니고. 저 독한 걸 원샷하면.
비틀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엄습하는 두려움 속에 진지하게 로제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머리가 아파..."
흔들거리면서 이쪽으로 오는 그 모습에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턱 하고 내 팔을 잡는 로제. 그 악력이 압착기와 비슷하다. 예전에 검을 휘두르는 걸 보니 나 같은 녀석들 사십명이 럼주병 들고 달려들어도 맨손으로 털어버릴 기세던데.
그 말은, 잡힌 이상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거다. 나를 끌어안고 히죽거리면서 로제가 말했다.
"뱃노래 알려줘요~!"
그 말에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뱃노래?"
그 말에 로제가 실실 웃으면서 말을 이어간다.
"며칠 전에 쉬면서 부르던거요, 선원들이!"
아, 그 유령들 바다 속에 묻어주고 쉬면서 놀 때 부르던거 말하는 건가. 나는 머리를 긁다가 말했다.
"따라해봐라."
그 말에 시뻘건 얼굴로 팍팍 고개를 흔들며 실실 웃는 로제.
"Yo-Ho-Ho and a bottle of rum!"
그 말을 듣고 로제가 키들거리면서 따라하고, 그 말을 이어서 내가 다시 입을 연다.
"Man and Women in the sailing ship(항해 중인 배 안의 남자와 여자)."
그렇게 말한 다음 내가 로제의 어깨를 툭 치자 대충 알아들었는지 로제가 다시 외친다.
"Yo-Ho-Ho and a bottle of rum(요-호-호 거기에 럼주 한 통)!"
그걸 받아서 내가 다시 받아서 말한다.
"drunken but the woman had done with the rest(취했는데 여자가 쉴 생각이 없네)."
내 말을 받아서 뭔가 말을 하려고 하던 로제가 나를 노려보며 옆구리를 콱 쑤셨다.
"아아니에요오! 나, 멀쩡... 흐으."
뭐라는거야. 내가 지금 물고기랑 이야기를 하고 있나. 신나서 빙글빙글 돌며 날뛰다가 갑자기 휘청이며 이쪽으로 넘어지는 로제.
비비지마! 비비지 말라고! 내 옷에 침 닦지 마! 이 더러운 녀석이! 내 소중한 옷이 오염되고 있잖아!
순식간에 침얼룩을 만들어내며 옷에 얼굴을 부비던 로제가 키들거리면서 입을 연다.
"아, 옷 더러워졌다. 깨끗하게 해줘야지."
그러면서 이제는 그 얼룩을 핥고 있다. 니 침 때문에 더러워 졌는데 그걸 핥으면...! 아아아악! 내 옷!
로제가 히죽거리면서 더러워 더러워 거리면서 내 소매를 계속 핥아대고 나는 침대에 걸터 앉아서 그 꼴을 보며 얼굴을 구기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선원이 들어왔다.
"럼보틀 만 근처에 도..."
알아, 지금 니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지. 하지만 잘 들어라. 내가 먹으려고 한게 아니랴. 이 여자가 나를 핥아먹으려고 하는거야. 잘 보면 너도 이해 할 수 있겠지?
"죄송합니다. 한창 준비중인데. 입항은 저희가 알아서..."
그러고 화이팅, 하는 말과 함께 큭큭거리며 나가는 금니의 선원씨. 정확하게 내가 걱정한 방식으로 이 상황을 해석한 모양이다.
씨발 그런 상황 아니라고. 지금 이 여자가 나를 무슨 롤리팝이라도 되는 것 마냥 핥고 있잖아. 와서 떼어내 줘야 할 거 아니야! 밖에서 웅웅 소리가 들리는데. 지금 항해사 실에 들어가지 말라는 식의 이야기가 들리고 있다.
이제는 옷 안에 있는 살까지 젖고 있다.
"... 너 전생에 뭐였냐? 개?"
개들 뭐 툭하면 핥아대던데 말이야. 그 말에 로제가 다시 실실 웃으면서 말한다.
"멍."
으아아아아악! 이 미친 여자가 내 팔을... 팔을 물었어! 내 대사 선택이 굉장히 글러먹었었다. 잘못했어요 이 광증 소녀야!
"아파, 아파 이 자식아아아아! 아프다고! 놔! 이 미...이... 크아아아아악!"
으르르르릉 하는 소리까지 내가면서 현실감있게 옷 위에서 내 팔뚝 살을 물고 고개를 흔들어대는 로제. 미쳤구나 이 여자가, 럼주 한 잔에 미쳤어!
그렇게, 로제가 쓰러질 때까지. 나는 오른 팔과 허벅지를 물어뜯기고, 옷 소매가 침범벅이 되어야 했다.
크으으 하는 소리를 내면서 기절하듯 자고 있는 로제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밀어버리고 나는 문 밖으로 나왔다. 배 앞에 보이는 수많은 횃불들. 나는 바다를 슥 바라보았다.
"어차피 밤에는 입항 못하는데. 가서 더 즐기지 그래?"
마리아가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나는 아무말 없이 축축하게 젖은 소매를 들어올렸다.
"이거 보이십니까?"
그걸 보던 마리아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설마, 이게 다..."
그래 이게 다 침이다. 엄청 더럽지?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고.
"러브 쥬스?! 너 실력이 엄청나잖아! 손가락 만으로 여자를 이렇게나..."
이런 씨발. 여기 새끼들은 머리 속에서 우뇌랑 좌뇌가 교미라도 하고 있는거냐. 아니면 니들 잘 때 미약 같은거 링거로 맞냐?
"침 입니다 침!"
그 말에 마리아가 대답한다.
"그래 침, 여자 아랫도리에서 나오는."
나는 눈을 정신없이 깜박거리면서 고개를 움찔거리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말했다.
"횡범 다 올려! 오늘 그냥 암초에 꼬다박고 다 뒤지자아아아아아!"
============================ 작품 후기 ============================
이번화는, 유령과 태풍과 안개에 고생한 레이먼드를 위한 휴식... 이 모토였는데. 뭔가 조금 이상해져버렸어요.
어쨋든.
오늘은 즐거운 금요일.
두편 정도는 더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 싫으시면 말고요 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