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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VS 해군
아, 나는 짐짝 취급을 받고 있다. 럼주 같은 것들을 넣어놓는 커다란 상자에 담긴 나는 선원들이 몸을 움직일 때 마다 몸이 같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짐상자 속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바리스에게 들키면 곤란하다, 라는 것이 로만의 이야기였고 그 의견에는 나도 동의한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상자 안에다가 쳐넣는 건 글러먹은 방법 아니냐?!
쿵, 하는 울림과 함께 엉덩이에 둔중한 충격이 지나갔다. 그래, 이제 배에 탄 모양인데. 분명히 바닥에 안착했는데도 몸이 흔들거리는 걸 보면 배가 출발까지 한 모양이다. 이제 녀석들은 내가 말한 장소인 작센 해협으로 향하겠지. 그리고 거기에서 결착이 맺어질 것이다.
... 그래서 언제 꺼내줄거야?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을 얼마나 했을까. 상자의 앞면에 두 갈래로 갈라진 쇳조각이 퍽, 하고 박혀들었다. 야, 빠루를 상자의 시점에서 보면 이렇구나.
으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따이고, 그 앞에는 로만과 이전에 봤던 항해사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리고, 상자를 열자마자 안쪽으로 살짝 밀려들어오는 싸늘한 한기.
"나와라."
천천히 밖으로 나오자...
배 아래가 보인다.
투명한 얼음으로 짜올려서 그런건가. 이래서야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겠는데. 화장실도 이 모냥으로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으면 진짜 더럽겠다. 사람 싸는 모습도 보이겠지만, 밑으로 덩어리 떨어지는 것도 보일 거 아니야.
내 중얼거림을 들은 로만이 기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배를 본 첫인상이 고작 그건가?"
로만이 그러면서 손을 슥 젓자, 허옇게 서리가 일어나면서 투명하던 얼음이 하얗게 물든다. 음, 이제 좀 심적으로 안정이 되는구만. 아까 전의 그 배는 노출증 환자들이 보면 환장을 하면서 달려들겠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어.
"배 안이 좀 싸늘한데."
로만이 대답했다.
"통짜 얼음으로 된 배가 이 정도면 따뜻한 편이다."
그거야 그렇지만 이래서야 선원들 복지 상태가 굉장히 열악할 것 같은데.
"이 배 안에서는 불을 피우는 건 자유롭다."
그러면 온도는 어느정도 적절하게 유지가 될 것 같네. 이글루 같은 건가. 어차피 얼음으로 되어있는 배가 화재가 날 리는 없고 말이지. 나는 로만의 안내에 따라서 배 안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텅 빈 공터, 그 안에서 로만이 이불이나 기타 등등을 준비하고는 다시 손을 휙휙 저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하얀 얼음조각들이 일어나서 서로 척척 얽히더니...
침대와 의자, 테이블 같은 것들이 얼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 이 배에서 절대로 선상싸움을 걸면 안되겠는데. 이거 완전히 겨울x국 아니야. 렛잇고 막 그런건가. 아렌델에서 보면 환장하겠네. 순식간에 그럴 듯한 가구들이 만들어지고, 다시 로만이 손을 휙 움직이자 벽과 문이 만들어졌다.
선상 싸움은 포기다. 진짜로. 쳐들어가면 순식간에 개박살나겠어. 이 배 위에서 싸우는 건 절대 금지다.
"식사를 해야겠지."
약간 시간이 지나고, 테이블 위에는 뜨겁게 김이 올라오는 스테이크와 신선한 야채 샐러드 같은 것들이 테이블 위에 놓이기 시작했다. 배 위에서 이런 음식을 먹는다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 상해버릴텐데.
라는 생각 자체가 멍청했구나. 지금이 배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냉장고잖아. 그러면 씨발 식재료의 보존은 아무 문제도 없는 거잖아. 잘 먹고 잘 살겠네.
비교하면 나쁜 사람이지만. 바다의 날개보다 훨씬 좋은 것 같은데. 난 눈 앞에서 김이 올라오는 스테이크를 썰면서 로만에게 말을 걸었다.
"그 갈고리는, 어쩌다가 달게 된 거지?"
그 말에 로만이 말했다.
"이 배랑 바꿨다. 주인으로 인정 받으려면 싸늘한 앤에게 손이나 발 하나를 바쳐야 하니."
바다의 날개가 훨씬 나은 것 같아.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배라니. 존나 나쁜 배잖아. 로만의 오른팔로는 나이프를 다루기 어려워서 그런지 그의 스테이크는 이미 썰려서 놓여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로만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여해적의 항해사라고 했지, 바다의 날개를 얻는 데에도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을텐데 말이지."
이 인간이 왜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곰살맞게 대하는거지? 게다가 대접 자체도 생각했던 거 이상인데. 애초에 방을 하나 만들어 버릴 줄은 몰랐다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거냐.
나는 깊게 생각하다가 입을 열고 러셀의 함에서 쪽지를 가진 이후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길로틴 섬으로 들어갔다라... 미나를 무시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군."
그 말에 테이블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미나가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제독..."
"네 실력이 별로라는 소리가 아니잖아, 너도 그 길로틴 섬을 본 적은 있을 거 아니냐."
저 풋내기 항해사의 이름이 미나였나. 로만의 말에 미나는 입을 잠깐 다물고 있었다.
"뭐,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실력이면 나쁘지 않은 편이니까."
라고 말하자, 미나가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지?"
그 말에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25살."
미나의 얼굴이 다시 확 구겨진다. 그리고 옆에 있던 로만이 와인을 마시다가 쓴웃음을 짓는다.
"사람 나이도 모르면서 그 정도 실력이면 그 나이에 나쁜 편이 아니라니, 실례가 심하잖나."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저야 배를 10년을 탔으니까 말이죠. 저 항해사 아가씨는 별로 많이 타본 모양새는 아니던데...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나는 말이지, 자그마치 첫 몽정을 배 위에서 한 남자란 말이다.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는지 니들은 모를거다.
일단 갈아입을 옷이 없다고. 갈아입을 옷이...
그 전에는 배 위에서 자위하는 새끼들을 보면서 성욕하나 극복하지 못한다고 엄청 비웃었는데. 이제 보니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더라고. 빼지 않아서 자다가 흘려버리면 다음 항구에 도착할때까지 굉장히 찝찝한 항해를 해야만 한다.
안좋은 추억에 안색이 굳어있던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배 위에 따지는 건 물질한 시간이지, 살아온 시간이 아닙니다."
맞는 말이군, 로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나의 표정은 점점 더 썩어들어갔다.
그리고 로만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럼, 그대는 15살 적부터 해적일을 한 건가?"
"아닙니다. 마리아 선장과 함께 일을 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탐험선에서 항해사를 하고 있었죠."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내가 어떻게 해적이 되었는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말에 로만의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그럼 해적일을 한 지는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가, 불가항력이었구만. 게다가 탐험선이라..."
혼자 뭔가를 고민하는 로만을 보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미나라고 했나? 저 아가씨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신 모양이군요."
그 말에 로만이 나를 바라봤다.
"그래, 어떻게 알았지?"
"배 움직이고 흔들리는 정도를 보면 알 수 있죠. 게다가 저 항해사의 의견보다 더 빠르군요."
그 말에 로만이 잠깐 감탄을 하고, 옆에서 미나가 입을 열었다.
"말도 안돼... 그걸 보지도 않고 알다니."
그리고 나서 식사 와중에 이어가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대충 가닥을 잡았다.
"아이리 공화국은 강국이다. 탄탄한 체제와 믿을 만한 리더를 스스로 뽑는 제도를 통해서 항상 더 나아가고 있으며...."
같은 아이리 공화국이 얼마나 대단한 국가인가에 대한 강의와...
"지금 나와있는 해군은 총 80척이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함을 건설할 여력이 충분하지, 게다가 최근에 계속해서 개발하고 있는 화포는 기존의 것보다 두 배 이상의 사정거리를 자랑한다."
같은 강대한 자신들의 해군자랑, 거기에 포함해서 나름대로 비밀로 해야 할 화포 개발 같은 것 까지 나에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굉장하군요."
나는 대답을 하면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 로만이라는 제독은 설마... 나를 회유하려고 하는 건가? 계속해서 아이리 공화국의 자랑스러운 점들을 늘어놓던 그가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항해는 경험이 중요하지. 아이리 공화국에는 생각보다 훌륭한 항해사가 부족하다네."
"그거야, 모든 국가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지요."
나는 말을 하고 나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항해는 글로 배워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수많은 경험이 필요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긴장해야 한다. 나는 빠르게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나침반이 없으면 해와 달,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고. 위도와 경도를 측정할 방법이 없으면 해수의 온도와 주변을 흐르는 해류, 잡히는 어류와 보이는 해조류 같은 것들을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 건 책으로 배울 수 없지요."
배 위에서 선장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다면 십 중 팔구는 항해사에 의한 반란이다. 만약 항해사가 일으킨 반란이 아니더라도 항해사는 절대 죽이지 않는다. 아니지, 죽이지 못한다.
그러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을 곧바로 바다에서 미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선상 반란이 일어나서 선장이 죽어도 항해사는 항상 안전한 것이다. 그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다.
"하지만, 육분의 같은 도구들이 있으면 문제 없지 않나?"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도구는 유용하지만, 거기에 의존하면 삼류입니다. 남극과 북극에 가까워 질 수록 생기는 오차, 해와 달이 움직이면서 생기는 오차, 달이 얼마나 차올랐느냐에 따라서 생기는 오차들은 그런 도구들로 판별할 수 없지요."
그 모든 것들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항해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 이 정도면 자기 PR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말이지.
"아까 말했지만, 아이리 공화국에는 유능한 항해사가 부족해서 항상 뛰어난 항해사들을 찾아다닌다네."
바로 자네같은.
그 단어에 나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좋아 계속해봐.
"그대가 처음부터 해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해적 일을 하게 된 사정도 이해가 가네. 무인도였다니, 이해가 가고 말고."
그리고 그가 고기를 한 점 입에 넣고 씹어넘긴 다음 나를 바라봤다.
"지금의 해적질을 그만두고, 아이리 공화국에서 당당하게 항해사로 일해보고 싶은 생각 없나?"
============================ 작품 후기 ============================
현실에서도 항해 중에 반란이 일어나면 선장은 죽지만 항해사는 항상 살아있죠.
1996년 일어난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에서도 한국인 1등 항해사는 살아남았죠. 나머지는 다 선원들이 죽였지만요.
항해사는 언터쳐브으으으을!
50화가 되었습니다. 응원해주시고 재밌다고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